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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Jul 11. 2023

브로콜리를 다듬다

딸내미 귀 빠진 날


딸내미 생일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벌써부터 아이는 가지고 싶은 것을 얘기하며  은근히 부담을 준다.

'아이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생일선물을 받아야 할 사람은 이 엄마 아니니? 엄마가 너 낳느라 이 더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말이다. 그날은 비가 왔더랬다..... 더위에 몸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널 돌보느라 많이 많이  힘들었었다. 엄마 아빠의 사랑과 관심이 갓 태어난 네게로 기울어감을 느꼈는지 네 언니는 부쩍 어리광이 심해졌다. 그래서 밤마다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자려 했었지.'


입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이러저러한 말들을 꾹꾹 눌러 담는다. 사실 이런 말들은 아이에게 잘 먹혀들지도 않는다. 엄마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걸 뭐, 이러고 나올 게 뻔하다. 본전도 못 건질 것을 뭐 하러 수고로이 꺼낼까.


토요일, 아이의 귀 빠진 날이 밝아왔다. 대청소를 하는 날이어서 마음이 괜스레 바빴다. 12시 반까지 왕십리 아웃백에 가야 된단다. 예약해 놓았다고. 부리나케 일어나 세탁기 돌리고, 청소기 돌리고, 이곳저곳 먼지 닦고 욕실 청소까지. 휴우, 나 너무 부지런한 거 아냐? 너무 부지런한 덕에 구슬땀을  반 되 정도 흘린 것 같다. 깨끗이 청소해 놓은 욕실에서 마수걸이 샤워를  해 볼까.


이러는 사이 아이들은 풍선을 불고 선물을 포장하여 세팅을 해 놓은 다음 사진을 찍는다고 한참 동안을 열중, 또 열중이다. 사진에 크나큰 의미를 부여하는 요즘애들.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관광지에서 한두 컷 남기던 예전의 우리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SNS 열풍 때문인지 핸드폰 저장 공간이 부족할 만큼 사진을 연속으로 찍어 보관한다.

순간순간을  다 남기고 싶은 거니, 얘들아?


얼른 끝내고 외출준비하지는, 여유로운 아이들이 내심 못마땅하다. 준비하는데 한 나절은 걸리더구만, 언제 하려고 저리 늑장일꼬. 그 긴 머리를 감고 말리려면 한 시간은 족히 드라이기 소리가 계속되던데. 그 소리, 열기....

"얘들아, 머리 말리기 너무 힘든데 엄마처럼 커트머리 해버려, 분이면 다 말라."

"됐어, 엄마나 하셔!"

시간에 쫓기는 딸들의 아침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매양 가벼이 던져보는 말이건만

아이들은 그럴 때마다 단호했다.


사실, 나도 긴 생머리를 좋아한다. 청순가련형의 대명사인 긴 생머리가 하고 싶어  

20대에는 매직도 해 보고 롤스트레이트펌도 해 보았지만 다 소용이 없었다. 반곱슬머리는 금세

말려들고 제멋대로 구불거리기 일쑤였다. 돈만 날리고 머릿결만 상하고 해서 이후로는

짧은  커트머리를 고수해 왔다. 한 달에 한 번  미용실에 가는 번거로움을 감내하면서.

파마값 안 들겠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것은 반곱슬머리의 고충을

모르니 하는 말이었다. 만 오면 새둥지처럼 부스스해지고  조금만 길어도 머리만 한 짐이다.

파마 값 들어도 좋으니 난 생머리였으면 좋겠다고요, 찰랑거리는 생머리!


이 시점에서 갑작스레 아픈 기억 한 가닥이, 기억이라는 수면 위로 머리를 빼꼼 내민다. 나의 짧은 머리를 비웃듯  이렇게 말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남자들은 짧은 머리 안 좋아해요!


비수도 그런 비수가  있을까 싶은 것이, 반쯤 굳어가는 상처를 일부러 건드려 놓은 것처럼 아팠다.

나도 생머리를 하고 싶은  1인이었지만, 그리하여 길러도 보고 땋아도 보고, 살짝 웨이브 넣어 분위기도 살리고 싶었지만,  내 머릿결 상태로는 이 스타일이 최선이라 이러고 있는데......

말 한 마디로 상처를 들쑤신 그 사람은, 참말로 야속한 그녀는 웨이브가 살짝 들어간 파마머리였다. 그마한 두상에서 흘러내리는, 윤기 반지르르한 머리카락이 순정만화의 여주인공처첨  청순하고 가련함을 자아내던 그녀.


청순가련형의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아니, 남자들이 좋아하면 누구나 다 머리 기르고 생머리 해야 되나?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전부? 미쓰도 아니고 사, 오십 대 중년들, 노년들 할 것 없이, 곱슬머리건 생머리건 반곱슬머리건 다들? 반박하고 싶었으나 하지 않았다. 반박하기 싫었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내 방식대로 사는 게  최선이고 최고라 여겼음이었다.

그럼에도 그 당시를 떠올리면 왠지 패잔병처럼 분하다....


남자들이 싫어하는 짧은 커트머리'를  말리고 정성껏 볼륨을 살려 빗어본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이 얼마나 신속하고 간편한가.  앞뒤로 고개를 돌려가며 점검을 한다. 둥그렇고 봉긋하다.


브로콜리 같아!


어느새 다가온 딸내미가 불쑥 한마디 한다. 새로 감고, 말려, 있는 힘껏 손질한 머리 위에 부어지는 최상의 칭찬이다. 멋지게 다듬어진 브로콜리를 쓰다듬어 본다. 뒤통수가  둥실거리는 느낌이 참 흐뭇하다. 얼굴엔 토닥토닥 기름칠을 좀 하고 아이들이랑 길을 나선다. 28년 전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치즈범벅인 느끼한 음식들을 아이들은 맛나게 먹는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입으로 들어가는지 좀체 모르겠는 이 떠들썩한 곳에서. 너무 시끄럽다 하니 분위기를 즐기라 한다. 예약이 꽉 차 힘들게 예약했다며, 맛있게 드시라고. 일하느라 같이 못 온 그이도 맘에 걸리고 가만 가성비 따지고 있는 또 다른 나로 인해  음식 맛도 모르겠다. 그래도  주인공이 즐거웠음 됐지, 싶어 젊은이들끼리 나머지 시간을 보내라 하고 먼저 들어왔다. 아이의 책상 위에 선물을 올려놓고서 기념일의 나머지를  조용히 보기로 한다.


벌써 28년이 흘렀구나, 세월 참 빠르기도 지......  소르르, 졸음이 밀려온다.

잘 다듬어 놓은 브로콜리가 망가질지라도, 그 감미로운 유혹을 이겨낼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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