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탈리 Dec 10. 2023

간택당할 뻔했어요

여름날의 산책길

한창 삼복더위에 허우적대고 있던 지난 여름날, 느지막이 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맘이 동하면 카페에 들러 시원한 음료 한 잔 하기로 하고, 한가롭게 대로변을 따라 걷기로 했다.

"엄마는 왜 그리 걸음이 빨라?"

아이는 같이 걸을 때면 언제나 나의 걸음 빠른 것을 책망하듯 묻는다.

"내가? 나는 전혀 빠르다 생각하지 않는데, 빠른가?"

"그래, 조금만 천천히 걸어줘."

일부러 보폭을 좁혀 굼벵이처럼 걸으니 이번에는 너무 느리다고 성화를 부리는 아이.

"아그야, 어매가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랴?"


이렇듯 티격태격 더위를 가르며 나아가던 중이었다. 하얀 바탕에 검정 얼룩이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오더니, 발 앞을 얼쩡얼쩡대며 걸음을 막는다. 고양이는 제법 큰 성체 고양이로, 썩 청결해 보이지 않은데도 아이는 귀엽다고 환성을 지른다. 고양이가 고개를 들어 우리의 눈을 응시하기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쓰담쓰담해 주어도 가만있는 것이 사람의 손길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그만 갈까 하고 일어섰더니, 아 글쎄, 이 고양이가 벌러덩 드러누워 배를  보인다! 날 잡아 잡숫든지 데려가 키우든지 맘대로 하슈......  고양이의 몸짓언어였다.


"뭐야, 이 고양이! 우리 지금 간택당한 거야?"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보는 아이에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노! 안 돼, 엄마는 자신 없어."

그새 아이의 마음에 점화되었을지도 모르는 설렘이란 등불을 단호한 한 마디로 후욱 불어 껐다.

한 생명을 거둔다는 것이 보통 일인가..... 애완동물을 너머 반려동물로까지 일컫는 요즘이지만, 그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반려동물을 들였다가 끝까지 책임을 지지 못해 유기된 동물들이 어디 한두 마리이던가. 이러한 반려동물의 유기는 휴가철에 더더욱 빈번하게 발생한다 하니, '반려'란 말이 참으로 무색하지 않은가.


"아가야, 안 됐지만 우리를 향한 애교스러운 몸짓을 거두어 주렴. 우리는 너를 데려갈 수가 없단다. 안녕!"

발길을 돌려 걸으면서도 아쉬운 듯 연신 뒤를 돌아보는 아이. 아쉬운 것은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던지 멍한 눈길로 한동안 우리를 좇는 녀석!

'날 데려가 달라니까요!' 간절함이 묻어 있는 길냥이의 시선에 뜨문뜨문 발길을 멈춰야 했다.

'흥! 칫! 뿡! 싫으면 말라구요, 나같이 이쁜 고양이를 마다하다니!'

마침내 체념한 고양이가 다른 피사체에 접근하여 다시금 애교작전을 펼치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는 마음이 개운해졌다. 고양이의 변심에 일순 마음이 놓이면서도 우리의 화제는 고양이를 떠나지 못했다.


"저 고양이가 엊그제 지하철 환기구에서 더위를 식히던 그 고양이인가?"

"그래, 좀 닮긴 했구나."

"그때 그 고양이도 참 귀여웠는데......"

"더위를 피하려고 환기구에 엎드려 있는데 지나간 아저씨가 쫓아버렸었지."

"우리도 이렇게 더운데 털 있는 짐승들은 얼마다 더울까?"

"그러게 말이야. 고양이는 더위도 잘 타고 추위도 엄청 잘 탄다. 고양이가 부뚜막을 엄청 좋아하는 거 아니? 그 옛날, 겨울이면 따뜻한 부뚜막에서 골골송을 부르던 고양이가 생각나는구나. 그 고양이는 콩나물도 먹고 라면도 먹었지. 고양이를 마루에 놔둔 채로 우리가 밥을 먹고 있으면, 몇 번 야옹거리다가 방문의 창호지를 발기발기 찢어버리곤 했어. 자기도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싶다 이거겠지? 참 성깔 있지만 귀여웠단다."


유동인구가 많은 대로변 일대에, 길거리 생활에 지친 고양이가 더위를 틈 타 간택령을 내리고 무작위로 집사를 간택하던 지난여름. 간택이 송구스러워, 마음의 짐을 떠안고 지나쳐 간 이들은 우리 외에도 얼마나 많을까. 과연 길냥이는 간택에 성공했을까? 간택에 성공하여 길거리 생활을 청산하고 따뜻하고 안락한 보금자리를 얻었을까? 어떤 다정한 집사가 그 영광을 고스란히 떠안았을까? 이 겨울, 간택에 성공한 고양이가 캣 타워를 오르내리고, 도도히 제 영역을 거닐기도 하다가, 골골송을 부르며 집사에게 귀염을 받는 모습을 상상하며, 간택당할 뻔했던 아찔한 기억을 반추해 본다.  바라건대 모든 고양이들 건강하게 겨울을 나를!

매거진의 이전글 쿠키는 주몽 형을 사랑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