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름 즈음부터
"말리그넌트, 그게 뭐였지?"
친구와 나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었다.
친구는 외국계 기업의 인사 상무로, 나는 상업시설 컨설팅 회사의 디렉터로 근무해서 우리 전공은 떠올려야 그제서 기억이 나는 소재가 되었다.
"야, 그 정도 단어는 기억해야지, 악성"
"나 그거 같대"
얼마전 엉덩이가 덧나, 싸이클 동호회를 못 나가고 있다는 말을 들은지 두 달치 채 지나지 않아 친구는 '흑색종' 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생소한 이름이라서 한참 설명해야 그제서 좀 알아들을까 말까 하는 병명이었다. 피부암이지만, 그렇게는 설명이 태부족한, 그냥 췌장암보다 빨리 진행되는 못된 놈을 만난 것이다.
보통은 손끝, 발끝의 거무튀튀한 덩어리로 발견이 되는데, 친구는 엉덩이 한참 안쪽에서 자라나기 시작해서 이 진단을 받기까지도 꽤 시간이 걸렸다. 6개월을 선고받았다. 너무 와닿지 않아서 그냥 우리는 그때까지는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하지 못한채 농을 주고 받기 일쑤였다.
친구는 얼마전 홍콩에서 근무하다가 엄마가 보고싶다는 이유로 귀국하여 근무중이었고,
나는 남편을 따라 도쿄에 나오게 되면서, 서울을 지키는 친구와 셋이 매일 격렬한 톡을 주고 받고 있던 때였다.
서울을 지키는 친구의 아버지는 혈액암 진단을 받아 투병중인 의사였는데, 마침 40여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지도 않는 흑색종을 전공하신 피부과 선생님이셨다. 그 설명을 들을때부터 우린 상황의 심각함에 서서히 이성을 갖기 시작하였다. 죽는다는 것은 둘째치고, 악성 조직이 보이는 대로 절단해내야 하며, 남은 생존기간이 길지 않더라도 가혹한 통증으로 인하여 절단하는 편을 보통 권하게 된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미 6 cm 라는 크기가 의미하는 것은 골반 전이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당장 우측 다리 전체의 절단과 골반의 절단 등에 대한 가능성의 이야기를 듣게되었고, 우린 친구에게 그 내용을 전달 할 수 없었다. 위암, 대장암, 등은 겉으로 보기엔 참 깔끔한 병이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 친구는 정기 모임을 하는 여섯명의 동창생 중에서 유일하게 시집을 가지 않았다. 너무 검소하며, 열심히 일하며, 자산관리를 해대는 통에 가끔 우리는 그 친구를 구박하기도 했었다. 유난히 노후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한다는 생각이 든 때가 많았다. 강남에 있는 아파트를 월급을 모아 사는 경우는 그 친구를 통해 처음보았고, 제주의 땅이나 주식, 펀드 등의 소식도 그 친구를 통해 접하곤 했었다.
2023년 5월 17일.
딱 오늘까지라고 미리 20년 전 즈음에 알려주었다 하더라도
그 친구는 다시금 그렇게 열심히 살아낼 것 같았다.
1년간의 투병 생활이었다.
간혹 난 물어야 할 것들은 스트레이트하게 묻곤 했다.
무엇이 가장 하고 싶어?
'일상'
그냥 커피마시고, 맛있는거 먹고, 웃고, 일하고,
우리가 매일 하는 그것이 가장 그립다 했다.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기전부터 물 이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말을 하지도 못했고, 가끔씩 숨 쉬는 것 조차 힘들어 했다.
오히려 톡은 간혹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어떤 마음의 조급함이 찾아와서,
피하고 싶은 주제를 정면으로 맞딱드리기 시작했다.
넌 이 상황을 지금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어?
'숙명'
나 사실 평안해.
통증을 빼면.
평안함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어떤 안도감 같은 것들이 몰려왔다.
통증은 이 시간이 길지 않음이 누구에게나 보여서 곧 해결이 될 것 같았다.
그게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