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도 않음.

by 잉킴

얇고 긴 영국의 겨울이 끝나간다.

이 무렵의 우리가 살던 집 앞의 나무, 거위들, 새소리, 파란 새싹들이 여전히 생생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


24년 10월. 끝을 알게 되고 마주 했을 때는 서운함에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간직해 보려고 했었다.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막상 끝이 나고 보니 그냥 지겹고 지루했던 일상들이다. 그립지도 않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며 그렇다고 후회를 하지는 않는다. 완벽한 끝을 갖기 위해 내가 질리도록 겪어봐야 했던 시간들이다.


모 아니면 도인 동반자였음을 알면서 선택했고 스스로 나를 제일 먼 곳에 가뒀었다. 자유로부터 도피를 할 시간이었다고 생각했었고 그렇게 살아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남들처럼 잘 살아보자는 계획은 내가 얼마나 미친년인지 알게 했고 내가 얼마나 단단한지도 알게 해 줬다.


그는 순수하고 천진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 점에 반했다가 그 점에 질려버렸다. 우리가 이십 대였을 때 한 개인으로 만나서 연애를 했던 것은 우리 그 자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너, 나는 나. 그냥 홀딱 반해버렸었다. 그러나 결혼이란 제도는 우리의 그 매력들을 빛나게 해주지는 못했다. 서로 너무 다른 두 문화의 충돌이었다. 그리고 (특히 내가 생각했을 때) 그는 그의 가족, 장남이라는 위치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틀에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면 나도 내 환경, 나의 위치, 나의 생각을 바꿀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노력이랑은 다른 문제다. 노력은 별개다.


장난 처럼 하던 말이 그는 강아지, 나는 고양이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리고, 존경받고, 꼭 사람들을 리드하고 보호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관심 없다. 그냥 내 집 그릇이 정갈하게 놓아져 있었으면 좋겠고, 소파 바닥, 싱크대가 깨끗했으면 좋겠고, 영화를 보거나, 길가에 나가서 사람들을 조용히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친구들은 일 년에 한 번만 만나는 게 딱 좋고 술마시길 좋아한다.


그냥 긴 겨울방학이 끝난 것 같다. 그런 시절이 있었던 거다.

지금은 연락처도 없는 과거의 많은 친구들이 있고 몇 안 되는 남자친구도 있었다. 단지 그는 내 남편이었고 특별히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것 외엔 딱히 지나간 다른 인연들과 다르게 와닿지 않는다.


그럴 거 알지만 그도 후회 없이 그냥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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