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날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마라맛 정리

by 각선생

나랑 닮은 유투버

강사 수업에 한창 열심이던 어느 날,
윤경 선생님이 요즘 유튜브에서 뜨고 있다며 정리 영상 하나를 보내줬다.
“이 분 말투랑 얼굴이 은주쌤이랑 참 많이 닮았어.”

‘누가 나랑 닮았다고?’

호기심에 눌러본 영상 속 주인공은
대구에서 활동하는 한 정리업체 사장님이었다.
친정언니 콘셉트의 친근한 말투가 인상적인 분이었다.
그 무렵 나와 동기들은
재능기부와 봉사활동만 주야장천 다니던 시절이었다.
컨설팅 비용을 어떻게 책정해야 하는지,
현장은 어떻게 운영되는지 모르는 게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유쾌하게 현장을 즐기며 일하는
영상 속 사장님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고, 그분의 영업 노하우를 배우고 싶었다.

저녁 설거지를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KTX 타고, 당일치기로 혼자 대구에 한번 가볼까…”

어차피 활동 지역이 다르니 괜한 경계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같은 말씨를 쓰는 동향 사람이 업계 후배로서 리스펙 하는 마음에 서울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
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는 내게 내어주시지 않을까,
상상해 봤다.

지난번 면접에서 만났던 본부장님처럼,
이 길을 먼저 걸은 업계 선배로서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당시 무슨 용기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곧장 그분의 연락처를 찾기 위해
블로그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한줄기 희망의 빛

블로그를 찾고 보니 연락처보다 더 눈에 띄는 글이 있었다.

“사업 확장으로 서울 정리팀을 모집합니다.”

신은 역시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내가 대구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되게 생겼다.

대구에서 시작한 분이
서울까지 확장한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했다.
얼마나 일을 잘하셨으면 싶기도 했고,
내가 마음먹는다고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는 걸 그때서야 실감했다.

지원 상세 내용을 보니 조건이 있었다.
‘개인’이 아닌 ‘팀’으로 지원할 것.
마침 그때 나는 동기들과 팀으로 있던 상황이었다.
우리 팀이 한 곳에서 다 같이 일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었다.

이건 정말, 내가 그리던 그림과 딱 맞아떨어졌다.
‘여기서 열심히 하면
나중에 이 업체 팀장으로 일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꿈에 한 발짝 다가선 기분이다.

나는 간단한 내 프로필과 앞으로의 포부를
장문의 문자로 정성껏 써서 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
“한 시간 뒤 연락드리겠다”는 답장이 도착했다.
시원시원하니 사장님 성격도 마음에 든다.


[이 유튜브 속 사장님이 훗날 신박한 정리에 출연한 이*영 대표다.]

우린 제법 대화가 잘 통했어요

대표님과는 이야기가 잘 통했다.
유튜브에서 보던 것처럼 말투도 친근했다.
대구에서 워낙 잘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서울 고객이 직접 대구로 대표님을 찾아올 정도라고 했다.

대구를 벗어나 서울과 일산에서 최초로
총 세 번의 대형 컨설팅 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아직 서울에 거처가 없는 상태라
혹시 우리 사무실에 간단한 수납 도구를 보관해 둘 공간이 있는지 여부를 가볍게 물어보셨다.
그때 우리 팀은 모여서 회의를 하는 공유 사무실이 있었지만 그곳은 창고 개념이 아닌 사무실이라 짐을 적재할 순 없었다.
그런데 나는 순간,
“정 안되면 저희 집에 둬도 돼요” 하고
무조건 초긍정 모드로 대답했다.

대표님은 웃으시며
나의 이런 적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든다고 하셨고,
우선 세 번 작업해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제안하셨다.
그렇게 나는 극적으로 대구팀과 함께 대형 컨설팅에 참여할 3번의 기회를 얻었다.

일단 첫 컨설팅에는 선생님과 제일 잘 맞는 팀원 한 명만 데려오세요.”

나는 팀원 중 누구와 갈까 고민하다가,
평소 가장 티키타카가 잘 맞았던 총무 선생님과 함께 가기로 했다.

폭망의 기운

컨설팅 전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미용실을 찾았다.

“내일은 아주 특별한 날이니까 예쁘게 해 주세요.”
아이유 사진까지 들이밀며 유난을 떨었다.

이 말을 안 할걸 그랬다
원장님의 정성이 너무 과하게 들어갔다.

내 단발머리는 ‘영심이 아빠' 머리가 됐다.
아래만 살짝 말리는 C컬 파마를 해달라고 했는데 어찌나 꼼꼼하게 말았던지 집에 와서 드라이기로 아무리 펴봐도 뽀글뽀글했다.
거울 속 내 머리를 보며
영화 ‘집으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렇게 해달라 했잖아요, 이렇게~”

마음 같아선 나도 7살 아이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그때부터 폭망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현관 앞에서부터 주눅들은 멘털

컨설팅 장소는
강남의 대형 아파트였다.
내 방보다
이 집 현관이 더 컸다.
긴장 탓이었을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6개월 동안 주로 실습했던 곳은
취약계층 대상의 봉사 현장이었다.
실제 고객 집에서의 첫 컨설팅이라
분위기부터 달랐다.
웃는 분위기 속 묵직한 긴장감이 돌았다.

대표님 역시
서울 첫 진출이라
겉으론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론 많이 신경이 쓰였을 것 같다.

그날의 나는
멘털이 완전히 나가 있었다.
할 일은 태산 같았고,
이렇게 넓은 공간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처음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참 오버였다.
총책임자도 아니고
그저 말단 팀원이었을 뿐인데
왜 그렇게까지 긴장했는지 모르겠다.

점심때 다 함께 모여 밥을 먹는데,
입맛이 없었다.
안 먹으면 더 눈에 띌까 봐 억지로 밥을 삼켰다.
밥알이 모래알처럼 느껴졌다.

그저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오히려 내가 데려간 총무 선생님은 중간중간
방마다 일의 진행상황을 둘러보는 여유로움이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거라는
압박감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신경 쓰였던 머리도,
하루 종일 내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집에 혼자 남은 어린 딸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는데
일이 끝난 건 밤 10시였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종일 가방 속에 넣어둔 핸드폰을 그제야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수십 통.
읽지 않은 카톡 메시지도 쌓여 있었다.

당시 내 딸 민아는 여덟 살이었다.
남편은 야간근무로 밤에는 애를 부탁할 곳이 없다.
한 번도 밤늦은 시간까지 애 혼자 둔적이 없던 터라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너무 감사하게도
먼저 퇴근한 총무 선생님이
“애기 혼자 집에 있다”는 말을 단톡방에 올려준 덕분에 같은 동기 선생님이 초저녁부터
민아를 돌보고 계셨다.

평소 우리 집에서 모임을 자주 해서
민아도 잘 따르던 분이다.
애랑 같이 동네 치킨집에 있다고 카톡을 남겨주셨다.
나는 곧장 그리로 달려갔다.


치킨집에서 터진 하루치 눈물

치킨집에 도착했을 때,
민아는 그 선생님 품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참았던 하루의 서러움이 터졌다.



영심이 아빠 머리도 서럽고,
오늘의 내가 너무 작게 느껴진 것도 서럽고
그냥 모든 게 다 서러웠다.

아이의 대한 미안함, 동기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
그냥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나는 그날,
정말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동기 선생님은 처음엔 당황하신 듯했지만,
내게 아무것도 물어보시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 다행히 치킨집에 손님도 없었다.
엄마가 우는 소리에 민아가 부스스 눈을 떴다.

한 번 터진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쏟아내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종일 긴장으로 돌처럼 굳어 있던 어깨를
선생님은 조용히 토닥여 주셨다.

“괜찮아.” 은주선생님.

그 한마디가 참 따뜻했다.

마라맛 하루

그날은
내 인생의 첫 ‘마라맛’을 경험한 날이다.
맛있다, 맛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강렬했다.

가슴이 얼얼할 만큼 뜨거운 하루였다.
마치
앞으로 걸어가게 될 이 길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미리 알려주는 신호 같았다.

어찌 됐든
그날 이후로 나는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졌다.
체력만큼이나
멘털 관리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날 밤,
치킨 집에서 잠들어 있던 그 어린 딸은
이제 어엿한 사춘기 소녀가 되었고,
요즘은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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