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나는 첫 아이를 출산했다.
자연분만을 꿈꾸던 순진한 산모는 결국 수술대 위에 눕게 되었다. 수술이 끝나고, 이가 맞물려 딱딱 소리가 날 정도로 오한이 들었다. 아이를 낳았다는 기쁨보다 알 수 없는 허망한 기분에 눈물을 흘렸다. 자연분만과 제왕절개는 흔히 선불제와 후불제의 차이라고 말한다. 먼저 고통을 겪고 난 자연분만은 회복이 빨라서 낳은 당일 날부터 걸을 수 있다. 반면 제왕절개는 진통을 겪지 않는 대신 수술 부위 때문에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단언할 수 없다. 수술 한 나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아픔에 힘들어했다. 살성이 약해서인지 남들보다 회복이 더뎠다. 이를 꽉 깨문 채 걷고 또 걸었다. 울다 웃다 부르르 화를 내기도 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지. 언제 아팠냐는 듯 조리원에서 총총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고, 동기를 만들 생각에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수다 파티가 열릴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수유실은 너무나 고요했다. 입을 떼기 어려웠던 순간, 맞은편에서 큰 목소리로 누군가 물꼬를 텄다. 옳다구나 끼어들 생각이었지만 들리는 건 중국어뿐이었다. 시기가 그랬는지 중국인 산모들이 많아서 여기가 한국이 맞는지 잠시 헷갈렸다.조리원 동기 만드는 것은 포기하고 잘 쉬면서 유익한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조리원에는 산모를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다. 아기 목욕시키기, 영양 교육, 요가 등의 수업이다.
비싼 돈을 내는 만큼 모든 시간을 알차게 쓸 거라고 다짐했지만 생각보다 참여가 어려웠다.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건 아무래도 모유 수유였다. 아이를 보고 오면 1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갈아 입고 잠시 눈을 붙인 것 뿐인데 전화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산모님, 수유하시겠어요?
여느 때처럼 수유가 끝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 문득 놓친 수업으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내가 실전 육아를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마침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늦었지만 그들의 뒤를 쫓아 물리 치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업 주제는 로션 바르는 방법이었다. 핸드폰을 꺼내어 한 자라도 놓칠까 받아 적었다. 빨리 올 걸 하는 아쉬움이 고개를 들 때쯤 수업은 끝났다. 마무리 인사를 하나 싶었는데 강사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홍보 책자와 로션을 꺼냈다. 순간 의아했다. 교육이라고 했는데 설마 판매하시려는 건가? 주변 친구들에게도, 인터넷 카페에서도 이런 사례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황당한 나와 다르게 산모들의 눈은 반짝였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몸을 앞으로 반쯤 기울이기도 했다. 속사포 같은 제품 설명이 쏟아지고 질문 차례가 되자 양옆에서 손을 번쩍 들기 시작했다. 느낌을 알아차린 산모 몇 분은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나갔는데, 나도 그때 따라나서야 했다. 몸이 묶인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어느새 주문서가 올려져 있고, 나는 펜을 들고 있었다.
“사지 말고 나가”와 “아기한테 좋다는 데 어떻게 해. 고민하지 말고 사”라는 두 가지 속삭임이 들려왔다. 결국 아기를 위한 선택을 했다. 제품은 각자 방으로 돌아가면 직접 가져다준다고 했다. 5분도 채 안 돼서 배달 음식처럼 문고리에 덜렁 걸린 봉투가 보였다.
순간 14만원이 지출되었다. 인터넷으로 사면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으려나? 궁금했지만 알아보면 화가 날 것 같았다. 내 사전에 충동구매와 과소비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그날은 분위기를 이기지 못했다. 호르몬 때문인지,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홀려버렸다. 아마 홈쇼핑을 보고 매진 임박이 뜨면 나도 모르게 사는 심리겠지.
부디 이 제품을 후회 없이 쓸 수 있기를 바랐다. 다행인 건 우리 아이는 꼭 이 로션이 아니어도 만 원대 저렴한 국민 로션도 잘 맞았다. 아니, 오히려 효과가 더 좋았다.결국 열어보지도 않은 크림 하나는 서랍 구석진 곳에서 먼지만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