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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 eye Aug 15. 2019

된장남이 된 불혹의 남자

된장국은 매일이라도 먹을 수 있어!

 태어나서 20살 때까지의 나는 집에서 맛있는 집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생각해 보려고 해도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야 물론 맛있게 먹은 음식들은 있지만 가정에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에게 식사는 인생의 즐거움이 아니었다. 언제나 전쟁 같았다. 그저 밥은  밥, 반찬은 그냥 반찬 혀끝의 미각을 자극하고 포만감을 주면서 행복감을 주는 추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장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4남매가 먹는 것을 가지고 치열하게 다투었던. 5개가 한 줄이던 요구르트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으르렁 거렸던 기억, 나에게 식도락의 세계는 정글과 같았다. 그랬었는지 지금도 나를 빼고 맛있는 걸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찌나 잘 마음이 상했던지, 지금 생각하면 어렸을 적 집에서 가족 간의 식사시간에 행복을 느끼지 못한 나의 결핍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바로 나의 모난 성격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TV나 광고에서 고향의 맛, 엄마 맛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전혀 공감을 못한 나는 인스턴트와 외부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20대를 보냈던 것 같다. 아침은 당연히 안 먹는 것이고 점심은 항상 식당에서 사 먹는 밥이었고, 저녁은 술 한잔에 안주를 벗 삼아 한 끼를 해결했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며 결국 피를 토하며 119에 실려갔고 나의 소화 기관들은 나의 못된 식사에 넉다운이 되었다. 중요한 20대의 나의 밥상은 나를 헤치는 밥상이 되었다.

 운동을 좋아하고 좋은 몸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운동도 2시간씩 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식단관리가 잘 되지를 않았다. 혼자서 끼니를 해결할 때는 맛보다는 음식의 성분에만 관심을 가지고 단백질과 각종 몸에 필요한 성분들을 약으로 보충하기 시작했다. 30대의 식단은 그렇게 성분의 ‘질’ 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하였다. 실제로 이때까지도 김치찌개, 삼겹살, 소고기 같은 음식이 맛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회는 손도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맛’을 잃어가는 후천성 결핍증을 앓고 있었다. 몸은 점점 좋아지고 멋있어졌지만 나는 식도락의 행복은 여전히 느낄 수 없었다. 나에게 입맛이란 것은 단지 허기가 주는 노동일뿐이었다.

 

 그러던 나에게도 첫 된장이 찾아왔다.

 제대를 하고 복학하기 전 3달 정도 아르바이트로 일한 주점에서 가끔씩 저녁을 만들어 주셨다. 그날따라 사장님이 우거지 된장국을 해주셨다. 물론 배도 고프고 한창 무엇을 먹어도 잘 먹을 시기인 나였으니 허겁지겁 먹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시던 사장님은 된장국 끓여 먹으라고 우거지를 된장에 무쳐서 주셨다. 한 덩이씩 나누어 냉장고에 얼려두었다가 꺼내어 물에 넣어 끓여 내면 끝이었다. 무척이나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었다. 마치 3분 카레처럼. 곧 나는 우거지 된장국의 맛에 익숙해졌고 곧 이 맛을 내기 위해 사장님께 물어보게 되었다. 물론 사장님은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이때가 내가 익힌 된장국 첫 레시피이다.

 먼저 우거지를 삶아준다. 우거지는 질기고 냄새가 나기 때문에 뜨거운 물에 푹 삶아 준다. 물론 시래기로 해도 마찬가지이다. 물기를 꽉 짜낸 우거지나 시래기를 준비해두고 양념장을 준비한다. 된장과 고추장을 4:1 비율로 섞고 간장을 한 스푼 넣어준다. 그리고 고추와 파를 잘게 썰어 주고 다진 마늘도 한 스푼, 설탕 한 스푼을 넣어서 비벼주면 멋진 양념장이 된다. 양념장과 시래기나 우거지를  손으로 슥슥 비벼주고 참기름을 얹어서 무침으로 그대로 먹어도 된다. 그리고 물에 넣어서 국으로 끓여서 먹어도 간단하고 맛있는 된장국이 된다. 이맛으로 3, 4년을 버틴 것 같다.

 그러다 첫 된장 이후 처음으로 충격의 음식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장모님의 음식들이다. 이때부터 나의 미각이 살아나게 되었던 것 같다. 나의 입맛은 결혼 전과 후과 완전히 다른 입맛이 되었다. 지금의 건강한 입맛을 가지게 된 것이 바로 처가댁, 바로 장모님의 손맛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다 처음부터 맛있게 먹은 것은 아니다. 완벽한 인스턴트와 맵고 달고 짠맛에만 익숙한 나에게 담백함과 구수함의 맛, 그리고 재료 본연의 맛을 알게 해 준 것이다.

 

 여주시 가남읍 송림리. 하루에 버스가 4대만 오던 곳. 시내에도 상영관 하나의 학교 교실만 한 극장만이 있는 곳


 2011년 1월 새해 설날. 전날의 과한 술자리로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얼굴은 넘어져서 왼쪽이었는지 오른쪽이었는지 얼굴 한쪽이 갈려 피딱지가 시커먼 점처럼 보이고 많이 취한 것은 맞는 것 같은데 너무 아프기만 했다. 핸드폰으로 전화벨이 울리고 누군인지 확인도 안 하고 전화를 받자 당시의 여자 친구, 지금의 와이프가 불안한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오빠 뭐 하고 있어요?”

 “나 그냥 있는데?”

 “어, 집에 나 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는데, 엄마가 전화해 보라고 해서.”

 “어.......... 그래?”

 “여보세요?”

  장모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하나?”

 “아, 네 그냥 누워 있습니다.”

 “설날인데 어디 안 가나?”

 “아, 네 저희 집은 그냥 각자 알아서.......”

 “밥은 먹었고?”

 “아뇨,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지금 일어 나서요.”

 “쯧쯧, 밥은 먹어야지. 어디 갈데없으면 지금 오게.”

 “네?”

 이렇게 나는 설날에 지금의 장모님을 만나러 처가댁에 내려가게 되었다. 허둥지둥 씻고, 양복을 찾아서 꺼내 입고, 갈린 얼굴이 아픈지도 잊고, 빨리 움직여야 했다.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차를 타고 여주터미널까지 6시간이 걸렸다. 밤 8시가 다되어 도착했고 그곳에 나를 데리러 온 아내와 처제를 만나 진짜 태어나서 처음 본 시골마을에 가게 되었다.

 장모님은 나에게 왜 이렇게 말랐냐면서 엄청난 스케일의 밥상을 주었고 설날이라 명절 음식도 가득했다. 불편했다. 아주 불편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여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였고, 설날에, 게다가 밥상이라니. 나의 밥 먹는 모습은 말 그대로 ‘깨작깨작’인데,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었다.

 ‘그냥 일단 빨리 먹자.’

 일단 고봉밥부터 빠르게 처리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빈 그릇은 더 채워주셨다. 먹는 족족 음식은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시간이 자꾸 밥상을 처음 받은 시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이미 배가 부른 나는 다른 음식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때 내 눈에 보인 것이 물김치였다.

 ‘그래, 저거라도.’

 숟가락을 뻗어서 국물이 혓바닥에 닿는 순간 찌릿했다. 정말 ‘맛’ 있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그때 이미 나는 배가 한 껏 불러 있었지만 동치미의 맛은 나의 숟가락을 계속 빨아들였다. 탄산음료 같은 청량감과 매콤하면서 톡 쏘는 시원함은 나의 혀끝의 갈증들을 시원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계속 동치미를 먹는 나의 모습을 보시고 장모님은 무한리필로 응답해 주셨고, 결혼 후에도 동치미 사랑과 함께 많은 반찬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계신다. 내가 먹고 싶다고 말하면 거기에 사랑을 듬쁙 담아주셔서 3박스 정도 되는 내 키만 한 반찬들을 담아서 보내주신다.

 

 그런 장모님께서 패혈증으로 쓰러지셨다.

 결혼 후 1년 후 장모님께서 쓰러지셨다. 급성 패혈증으로 그 시골에서 앰뷸런스를 타고 내가 사는 인천의 대학병원까지 오게 되셨다. 모두가 돌아가실까 봐 전전긍긍했고, 중환자실에 계신 어머님을 와이프가 간호해야 했고, 몸이 불편하신 장인어른과 아직 어린 막내 처제를 데리고 난 집으로 왔다. 모두들 걱정과 근심이 많았고, 나도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서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가족을 간병한 경험이 있는 나는 그때 밥 먹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아침을 거르는 나지만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무언가 양념을 할 것도 없고 빨리 할 수 있는 재료가 무엇일까? 번뜩 떠오른 것이 바로 콩나물이었다. 새벽의 중환자실 면회를 마치면 문을 연 곳은 해장국집 밖에 없었다. 특히 콩나물 해장국은 입맛이 없고 침울했던 나를 새벽의 소주 한잔과 함께 위로해 주었었다. 다행히 신혼 초라 집에서 음식을 해 먹으려고 노력했었기에 ‘요알못’을 조금은 벗어난 시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콩나물국이 장인어른의 마음에 큰 위로와 감동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사위가 새벽부터 일어나 부스럭 거리며 끓여준 콩나물 국. 레시피는 정말 말할 것도 없다. 소금 한 움큼과 물, 콩나물. 국물이 살짝 노래 질 때까지 끓여 내면 된다. 이날 반찬은 프라이와 장모님 김치가 끝이 었지만 장인어른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다행히 곧 정신을 차리신 장모님은 곧 일반 병실로 가셨고 장인어른께 전해 들으시고는 내가 끓여준 콩나물국이 드시고 싶으시다고 하셔서 결국 집에서 다시 끓여서 가져다 드렸다. 병실에서 국물을 호로록 드시면서 사위가 끓여준 거라고 자랑하시면서 행복해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나도 왠지 뿌듯해졌다. 사실 장모님께 가져다 드린 콩나물국에는 하얀 마법의 가루를 조금 넣어드렸다. 장인어른이 맛있다고 하신 것은 사위의 모습에 감동을 받으신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고 집에서 다시 끓일 때는 나도 그 맛이 안 나서 결국 감칠맛을 조금 넣어 드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는 사랑하는 아가와 와이프를 위해 된장국을 끓인다.

 물론 나는 맛있는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지만, 나의 사랑하는 아가에게는 맛있는 삶을 가르쳐 주고 싶다. 처음에는 단순히 음식의 맛을 느끼게 되었지만 그 맛을 통해서 가족 간의 사랑이 어떻게 전달되고 행복해진다는 것을 지금은 알게 되었다. 나의 아이에게 사랑을 전달하기에 가장 좋은 것은 맛있는 음식이고 바로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바로 그 음식이 올라갈 우리 집 식탁일 것이다. 식탁이 흔들리고 맛을 잃게 되면 나의 가정도 잃게 될 것이다. 훌륭하게 가정의 식탁을 잘 지켜준다면 분명 나의 아이도 잘 자랄 것이라고 믿는다. 가족이 같은 식탁에 모일 수 있도록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주는 것이 나의 의무요 가장 중요한 책임일 것이다. 음식의 맛도 모르던 내가 이제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음식을 통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아내를 통해 얻은 가정의 식사 때문일 것이다. 이런 세상을 모르고 30년을 허비한 것이 너무나 아쉽기에, 나의 아이에게는 맛있는 세상을 빨리 알려주고 싶다.

 나의 된장국 레시피는 잡탕이다. 하지만 지금 나의 식탁을 지켜줄 음식이 바로 된장국이다. 정말 어떤 재료들을 통해서든 잘 어우러지고 맛있어지는 훌륭한 인성을 가진 음식이 바로 된장국이다.


 시간을 담는 된장국 - 주 재료는 계절

 봄에는 각종 나물들 달래, 쑥 등으로 향긋한 된장국을 끓이고, 여름에는 감자와 호박으로 뜨거운 국을 끓여본다. 늦은 가을이 오면 배추, 무 등으로 담백한 가을의 맛을 담아보고, 겨울에는 말린 채소들로 든든하게 속을 채울 수도 있다. 이렇듯 된장국은 우리의 계절을 알려준다.


 공간을 담는 된장국 - 바다와 육지

 가끔씩 바지락을 넣어서 시원한 바다의 맛도 내보고, 소고기 한 덩이 넣어서 육고기의 풍미를 느껴도 행복하다. 된장국은 아니지만 된장을 풀어서 꽃게를 쪄서 등딱지에 참기름과 흰쌀밥을 넣어 사사삭 밥을 비벼먹어도 좋고, 구수하게 수육을 삶아 김치 속과 함께 먹어도 좋다.

 

 친구와 된장국은 오래될수록 맛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남겨진 된장국은 다음날 먹으면 더 맛있다는 것이다. 끓이면 끓일 수 록 된장국은 더욱 구수해지고 맛있어진다.  된장은 참 ‘맛’을 낼 줄 아는 내가 아는 음식 중에 가장 ‘멋’ 있는 음식이다.

 이렇게 된장은 음식 속에 시공간과 멋이 담겨 있으며 나의 가정과 아이를 지켜줄 소중하고 친절한 음식이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된장 한 스푼을 물에 풀어 주면서 나의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도 푹 같이 끓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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