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슬기로운 학교 생활, 본격 초딩 교사 성장 로망 소설
*과학의 달은 대한민국의 기념일로, 매년 4월을 의미합니다. 특히 4월 21일은 '과학의 날'**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는 1967년 4월 21일 과학기술처가 중앙 행정기관으로 독립한 것을 기념하여 1968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학의 달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모든 국민 생활의 과학화를 촉진하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4월 한 달 동안 전국 각지의 국립과학관, 학교, 연구기관 등에서 과학 관련 대회, 체험 행사, 대중 과학 강연회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여 국민들이 과학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또한, '과학의 날'을 전후하여 '과학주간'을 선포하고 과학기술 진흥에 힘써온 유공자들을 표창하는 행사도 진행됩니다.
퇴근까지는 아직 40분이 남아 있었다. 학교 전체가 긴 숨을 고르는 듯한 오후 시간. 종례를 마친 교사들이 조용히 교실 문을 닫고 연구실로 향했다. 해는 창가에 기울어 있었고, 연한 햇살이 조용히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6학년 연구실도 하나둘 불이 켜졌다. 가장 먼저 들어선 사람은 강아름이었다. 서류철과 공책을 품에 안은 채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교탁 옆쪽 자리에 앉은 그는 노트를 펴고 조용히 펜을 꺼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교실의 소음이 귀에 선명히 남아 있는 듯, 그는 몇 번이나 공책의 모서리를 들었다 놨다 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뒤 윤허담 체육부장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어깨를 툭툭 털며 의자에 털썩 앉은 그는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회의는요, 뛰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강아름이 고개를 들며 웃었다.
“정말 그렇게 피곤하세요? 앉아만 계셨을 텐데요.”
“그게 문제죠.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있는데, 등은 땀이 다 젖고 머리는 어질어질합니다.”
윤허담은 그렇게 말하며 체육복 자락을 한 번 정돈하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순간 연구실 문이 다시 열렸다. 남도윤 선생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와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수업 마치고 회의까지, 하루가 참 알차네요.”
그는 짧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들어선 사람은 독고철 학년부장이었다. 말없이 텀블러에 커피를 타서 들고는 습관처럼 한 모금 마셨다. 강아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아까 다녀오신 회의, 기획위원회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정확히 어떤 회의인지 잘 모르겠어서요.”
윤허담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옆자리에 앉은 독고철을 흘끗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강아름도 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마치 교실에서 무언가 중요한 설명이 시작될 때처럼, 조용한 기대가 감돌았다. 독고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단정했고,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기획위원회는 정식 명칭이 교육과정위원회라고 합니다.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 중 하나예요.”
강아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장 중요한 회의요?”
“네. 학교의 모든 교육활동, 그 뼈대를 만드는 회의라고 보면 됩니다. 교장, 교감 선생님과 각 부장님들이 모두 참석해서, 부서나 학년에서 진행할 일들을 공유하고, 협조가 필요한 일들을 조율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씩 꼭 빠지지 않고 진행하죠. 교장, 교감 선생님, 실장님 그리고 부장들이 모두 모여서 진행해서 부장회의라고 부르기도 해요.”
“아… 그럼 예를 들어 행사 일정 같은 것도 거기서 다뤄지는 건가요?”
“맞아요. 체험학습이 겹치지는 않는지, 부서별 사업이 학년 수업과 충돌하지는 않는지, 전체적인 흐름을 그 회의에서 설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내용을 한 번에 다루기엔 너무 많지 않나요?”
“그래서 정리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무부장이 회의를 주재하고, 각 부서와 학년에서 순서대로 발언을 하죠. 그냥 전달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학교가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를 정하는 자리입니다.”
강아름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럼 회의 안에서 의견 충돌도 생기겠네요.”
“자주 생깁니다.”
이번엔 윤허담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래서 회의가 지루하기는커녕, 꽤 드라마틱할 때도 있어요. 전선이 아주 다양하게 얽혀 있거든요.”
윤허담이 팔짱을 끼며 웃었다.
“오늘도 그런 장면들이 좀 있었습니다. 다행히 심하게 붙진 않았지만요.”
강아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부장님들이 회의 준비를 그렇게 철저히 하시는 이유도 알겠어요.”
“그게 바로 부장들의 제일 중요한 역할입니다.”
독고철이 짧고 간결하게 말했다.
“각 부서와 학년을 대표해서 전체 학교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고 조율하는 일. 회의 하나하나가 책임이고, 어떤 발언을 하느냐에 따라 학교의 일정이나 사업이 바뀌기도 하니까요.”
연구실 안이 조용해졌다. 강아름은 공책 한 귀퉁이에 작게 메모를 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윤허담이 손뼉을 살짝 치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오늘 회의 중에 있었던 얘기, 제가 한 번 정리해서 들려드릴까요?”
남도윤이 피식 웃었다.
“오늘도 시작이군요. 회의 정리인지, 일인 연극인지.”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게 업무 전달이니까요.”
“그런데 꼭 제목이 있을 것 같은데요?”
강아름이 묻자, 윤허담이 정색하며 말했다.
“물론 있죠. 오늘의 제목은… ‘3월은 가고, 과학의 달 서막’입니다.”
그 말에 연구실 전체에 잔잔한 웃음이 퍼졌다. 독고철마저도 눈웃음을 지었다. 강아름은 노트를 펴고, 펜을 들어올렸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체육부장님.”
윤허담은 반쯤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 그럼 회의의 시작부터 함께 떠나보시죠. 장소는 교무실 옆 회의실. 시간은 오늘 오후 3시 정각이었습니다…”
자, 그럼 제 얘기 한번 들어보시죠. 오늘 회의실에 들어서는데요, 아니 벌써부터 공기부터가 다르더라고요. 서류 냄새에다, 말 안 해도 팽팽한 그 기운. 교무부장님이랑 연구부장님은 이미 자리에 앉아 계셨고, 두 분 다 뭔가 회의자료를 차곡차곡 정리 중이셨죠. 늘 그렇듯이 일사불란합니다. 교무부장님은 금일 회의자료를 자리에 나눠주고 있었고, 연구부장님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바인더를 탁자 위에 펼치시더라고요. 무슨 수능 감독하러 오신 줄 알았습니다.
회의 시작 5분 전이었는데, 그때부터 하나둘씩 부장님들이 입장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각자 커피나 텀블러 하나씩 들고 오시는데,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는 다들 약간은 긴장한 얼굴이에요. 인사도 조심스럽고, 자리도 눈치껏 앉고요. 그래도 오랜만에 얼굴 보는 분들도 있어서 짧게 안부 주고받는 분위기가 살짝 따뜻했습니다.
교감 선생님이 먼저 회의실로 들어오셨습니다. 그 회색 교무수첩, 정말 상징 같은 거죠. 교감 선생님은 자리 맨 앞에 앉으셨고, 이어서 교장 선생님이 등장하셨습니다. 오늘은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계셨는데요, 누가 봐도 회의실과 어울리지 않는 그 봉지. 안에는 뭔가 있었겠죠. 다들 그게 뭔진 궁금했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게 어른들의 예의니까요. 우리는 전원 기립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익숙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죠.
“앉으세요, 다들 앉으세요.”
그 말에 맞춰 의자들이 쫘악 밀리는 소리가 나고, 회의는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강인봉 교무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셨어요.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묵직합니다. 어쩐지 마이크 없어도 울릴 것 같죠.
“지금부터 3월 교육과정위원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상호 간 인사. 이제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셨고, 회의실을 한 바퀴 쭉 둘러보시더니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3월 한 달, 개학식과 학부모 총회, 여러 교육활동들을 큰 문제 없이 마무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올해는 새롭게 부장을 맡개된 부장님들도 있고, 신규 교사도 있었지요. 그 가운데에서도 강아름 선생님이 입학식 방송을 차분하게 잘 마무리한 것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교무·연구·정보 부장님께도 그 과정에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순간 괜히 뿌듯해지더라고요. 우리 팀 이야기니까요. 그리고 교장 선생님은 이어서 당부의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4월부터는 본격적인 학사일정이 시작됩니다. 더불어 현장체험학습이나 행사도 많아질 시기입니다. 생활지도에서 사건 사고 없이 차분히 한 학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지도 부탁드립니다.”
말씀이 끝나자, 회의는 곧 본론으로 넘어갔습니다. 강인봉 부장님이 회의를 이어갔습니다.
“그럼 부서별 4월 교육활동 협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교무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4월에는 학부모 동아리 운영이 시작되고, 4월 마지막주부터는 교대 4학년 학생들의 교생 실습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발표는 교무부터 시작했고 부서별로 차례대로 이어져 갔습니다. 전수현 연구부장님, 늘 그렇듯 단정하고 간결했습니다. 진단평가 결과에 따른 미도달자 지도계획이 곧 마무리될 예정이고, 학업성적관리위원회를 통해 학생평가계획도 점검이 끝났다고 하셨죠. 말투는 조용했지만 신뢰감이 있었습니다.
정보부장 임진한 선생님은 4,5,6학년 노트북 점검 일정과 3학년 태블릿 신규 지급, 그리고 전체 보안 점검 계획까지 알기 쉽게 정리하셨습니다. 발표는 짧았지만 핵심은 확실했어요. 역시 기술 쪽은 저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입니다.
이제 제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스포츠클럽 운영 계획, 반별 대표 선발, 리그 운영 방안. 저는 딱딱하지 않게, 체육답게 가볍고 활기 있게 발표했습니다. 강인봉 부장님이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하시는 걸 보니, 나쁘지 않았나 봅니다.
그다음 순서, 고철진 인성부장님이셨습니다. 어울림교육, 친구사랑 주간, 생명존중교육, 학교폭력예방교육까지 빠짐없이 말씀하셨어요. 그런데요, 그분 발표를 듣고 있으면 항상 약간 뭐지? 뭔가 잊은 듯한 느낌이 들어요. 정제된 단어인데도 뭔가 허술한 느낌? 물론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리고 그 순간, 드디어 과학부장 정수학 선생님의 차례가 왔습니다. 발표자료를 살짝 펼치시더니, 말을 시작하시려던 그 찰나—
교장 선생님이 손을 드시며 막으셨습니다.
“과학부장님, 과학의 달 행사는 협의가 길어 질 것 같으니 회의 마지막에 따로 듣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이 부드럽긴 했지만, 회의실은 잠시 조용해졌죠. 정수학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평소처럼 고개만 살짝 끄덕이시고 조용히 자료를 접으셨습니다. 역시 그분답다 싶었어요. 괜히 강하게 나서거나 표정 바꾸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그러고는 학년별 발표로 넘어갔습니다.
오필주 1학년부장님, 첫 번째 발표를 하셨습니다.
“1학년은 어린이 교통공원으로 현장체험학습을 다녀올 예정입니다. 오전 4시간 동안 교통안전교육 받고 도보로 이동합니다. 학부모 도우미도 모집할 계획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2학년, 3학년… 쭉 발표가 이어졌는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다음부터는 집중이 잘 안 됐습니다. 제 머릿속엔 자꾸만 정수학 선배님의 발표가 맴돌았거든요. 저분이 과학의 달 행사를 그냥 평범하게 준비하실 리가 없잖아요.
‘똑똑똑—’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허담의 이야기가 멈추고, 연구실 문의 빼꼼히 열리며 모두들 현실로 돌아오듯 모두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이지혜 영어전담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영어전담 선생님이 허둥지둥 빈자리에 앉고, 윤허담은 다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지금 막 하이라이트가지 넘어가 않았거든요. 줄거리 정리 해드릴까요? 하하.”
한숨을 고른 윤허담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 그럼 이제 정수학 부장님의 ‘과학의 달’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다시, 교육과정위원회 회의시간>
자, 그럼 얘기 계속 들어보시죠. 아까 검은 봉지가 궁금하다고 하셨죠? 과학부장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교장선생님 스윽 검은 봉지를 꺼내들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를 하나씩 건네 주시더라고요.
“아 깜빡했네요. 부장님들 고생하셔서 제가 조그마한 간식 좀 챙겨왔습니다. 드시면서 하시죠. 초콜릿입니다. 당 떨어지신 분들 계실까 봐서요.”
회의실에 아주 잠깐, 웃음과 함께 온기가 돌았습니다. 진한 초콜릿 향이 돌면서 몇 분이 소리를 죽여 웃기도 했고, 고철진 부장님은 은근슬쩍 두 개를 챙기시더군요. 그때 교무부장님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과학의 달 행사 관련해서 과학부장님께서 설명해 주시죠.”
회의의 중심이 이동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쏠렸죠. 정수학 과학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정수학 부장님은 수더분한 겉모습에 덥수룩한 턱수염, 넥타이도 없이 윗단추 하나 풀어진 셔츠. 그런데, 눈빛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까만 피부에 살짝 마른 체형, 말라 보이지만 단단해 보였고, 눈동자에는 뭐랄까— 계산을 마친 눈빛이 있었습니다. 정수학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들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올해 과학의 달은, 학년군별 체험 중심 부스로 운영하고자 합니다. 학년별로 2시간식 4개 체험 부스를 운영합니다. 한 학급당 한 부스를 순환하며 체험하는 방식입니다.”
그의 말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한 문장마다 쉼표를 주듯 또렷했습니다.
“AI를 활용한 실험, 드론 조종, 그리고 VR을 활용한 과학탐험도 포함시킬 예정입니다.”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정수학의 말은 별다른 제스처도 없이 묵직하게 공간을 채웠고, 누군가 커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릴 정도였죠. 김영숙 2학년부장이 먼저 손을 들었습니다.
“일정은요? 언제, 어디서 진행합니까?”
“4월 1일부터 3일까지, 수·목·금입니다. 매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한 학년당 2차시씩 진행합니다. 장소는 강당입니다. 강당으로 정한 이유는 날씨에도 영향이 없고, 환경이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대답이었습니다. 회의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죠. 그 다음 질문, 이현주 3학년부장이 조용히 말을 이었습니다.
“담임교사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요?”
정수학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짧게 말했다.
“체험을 주도하는 건 과학전담과 보조 인력입니다. 담임선생님들께는 안전관리와 인솔 중심의 협조만 부탁드릴 예정입니다.”
잠시 정적. 모두가 끄덕이기 시작했습니다. 계획은 탄탄했고, 일처리는 깔끔했습니다.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매끄러웠죠. 하지만, 그 순간. 기류가 바뀌었습니다.
“그런데요.”
김도진 5학년부장이 손을 들었습니다.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분위기를 휘저을 정도의 무게감이 있었습니다.
“학년별 통합 운영,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학년별 자율 운영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회의안을 넘기며 덧붙였습니다.
“각 학년의 교육과정 흐름도 다르고, 준비 여건도 다릅니다. 일률적으로 짜인 일정과 방식보다는, 주간 내에 자율적으로 날짜를 정하고, 각 학년이 중심이 되어 주제를 구성하는 방식이 교육적 효과도 크고 현장성도 있을 겁니다.”
정수학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단 한마디, 짧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검토하겠습니다.”
그러나 회의실은 이미 잔잔한 물이 아닌, 물살이 생기기 시작한 강이 되었다. 다음 발언자는 고철진 인성부장이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행사,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학생들에게 화려한 체험도 좋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 너무 빠르게 체험하고, 너무 빨리 지나갑니다. 깊이 없이, 감동 없이요.”
그의 말에 회의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정수학의 시선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걸 담임 선생님들의 재량 안에서, 수업 중 조용히 녹여내는 방식으로 진행했으면 합니다. 꼭 크게, 복잡하게, 부담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결국 중요한 건,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라느냐입니다.”
교무부장 강인봉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멈칫했다.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고, 초콜릿은 어느새 책상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때 교감이 침착하게 정리를 시작했다.
“지금 말씀들 모두 의미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정하기보다는 각 학년으로 돌아가, 부장님들께서 학년 선생님들 의견을 수렴한 뒤 학년별 운영 방안을 정리해 다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결정은 그 때 하죠.”
그 말에 부장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허담은 그 순간의 공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정수학은 한마디 말없이 자료를 정리했고, 그의 뒷모습에는 조급함도 없었고, 실망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준비한 계획이 갑자기 막히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건데도 마치 이럴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뭔가 더 계산하고, 더 준비하고 있다는 눈빛. 말없이 다시 움직일 사람의 표정이었다.
다시 6학년 연구실. 연구실은 아까와 달리 조금 숙연해졌다. 일이 조금 복잡해 졌구나라는 생각을 모두가 하게된 것이다. 방금까지 쏟아졌던 윤허담의 이야기. 교무실 회의실에서 벌어진 팽팽한 긴장, 정수학의 단단한 발표와 맞서 터져나온 반론들, 마지막엔 교감의 일갈까지. 그 모든 장면들이, 마치 현장 영상처럼 연구실 안에 투사된 듯한 분위기였다.
누구 하나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고, 순간의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건, 독고철이었다.
“선생님들 의견은 어떠신지요?”
그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담담했지만, 말끝에는 묵직한 책임감이 실려 있었다.
“과학의 달 행사를… 학년별로 나눠서 2시간씩 체험활동을 하는 방식이 좋을지, 아니면 각 학년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게 더 나을지. 이제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강아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 학년별 자율운영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아이들 성향도 다르고, 수업 흐름도 학년마다 다르잖아요. 예를 들어 6학년은 진로 수업이랑 연계할 수도 있고, 4학년은 생태 체험으로 확장할 수도 있고요. 교과서 일정도 다르니, 너무 통일된 방식보다는 융통성 있게, 학년에서 기획하는 게 오히려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그 말에 남도윤이 바로 받아쳤다.
“그런데요, 강 선생님. 그 방식은 각 학년 간의 활동 차이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예리했다.
“5학년이랑 6학년이 비슷한 수준의 행사를 한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요? 그럼 또 비교되고, 민원 생깁니다. 오히려 그럴 바엔 학년이 아니라 학급 자율로 가는 게 낫습니다.”
강아름이 당황한 듯 입을 열려 했지만, 남도윤이 말을 이어갔다.
“학년단위로 일정을 짜면 조정할 게 너무 많아요. 반대로 학급별 자율 운영이면 부담도 분산되고, 각 담임이 중심을 잡아서 조절할 수 있죠. 담임 중심 수업, 그게 가장 현실적인 운영입니다.”
그 말에 독고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윤허담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가볍지만 또렷한 음이 연구실에 울려 퍼졌다.
‘따르르르르—’
전화벨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전화기로 향했고, 독고철이 조용히 수화기를 들었다.
“네, 6학년 연구실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곧 내려가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과학의 달 행사 건으로… 교무실에서 학년부장들과 과학부장, 그리고 교감선생님이 다시 모여서 회의를 하기로 했답니다. 지금 바로 내려오랍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독고철은 회의자료가 든 노트를 챙기며 짧게 말했다.
“돌고 도네요. 일단 의견은 정리해두시고, 상황 보고 다시 공유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어느 때보다 바빴고, 무거웠다. 그가 나가자마자, 영어전담 이지혜 선생이 윤허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근데요… 체육부장님. 그 회의, 그러니까 교육과정위원회는… 계속 어떻게 진행됐어요?”
질문은 조심스러웠지만, 눈빛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윤허담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멀리 두었다.
“그 이야기는… 아직 안 끝났습니다.”
교감선생님의 말을 듣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초콜릿 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방금 전 교감의 말 한마디로 회의실의 분위기가 다시 긴장감 속으로 돌아가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먼저 입을 연 것은 1학년 오필주 부장이었습니다. 1학년 오필주 부장님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물었어요.
“과학 부장님, 그러면 그 체험 부스는 모두 과학부에서 준비해주시고, 저희 학년 선생님들은 아이들만 잘 데리고 다니고 안전 관리만 하면 되는 겁니까?”
정수학 부장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죠.
“네, 그렇습니다. 체험 준비는 과학부에서 기본적으로 다 하겠습니다. 학년에서는 아이들 안전지도와 인솔만 신경 써주시면 됩니다.”
그 순간, 학년부장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습니다. 윤허담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어요. 그건 ‘이거 괜찮겠는데?’ 하는 동의의 눈빛이었죠. 분위기가 이대로 정리되려는 듯 보였어요. 하지만, 늘 그렇듯 회의는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5학년 김도진 부장님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습니다.
“잠깐만요, 그렇게 되면 과학부 한 곳에 업무가 너무 몰리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죠. 김 부장님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면 준비하는 쪽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차라리 각 학년이 나눠서 준비하고 운영하는 게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학급마다 수준과 필요가 다를 텐데, 담임교사가 직접 준비하면 학생들 상황에 더 맞출 수도 있고요.”
그러자 바로 옆자리의 독고철 6학년 부장님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습니다.
“김 부장님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각자 조금씩 나누면 전체 부담도 덜어지고, 일도 원활하게 돌아갑니다. 특정 부서에 업무를 집중시키는 건 피해야죠.”
인성부장 고철진 부장님도 그때 손을 들고 한마디 거들었어요.
“맞습니다. 과학의 달 행사, 너무 거창하게 준비하는 것보다, 학생들이 평소에 배우는 과학적 소양이나 태도에 중점을 두고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학년별로 작은 규모로 운영하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분위기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윤허담은 그 분위기를 보며 속으로 탄식을 했죠. ‘역시 쉽게 가는 법이 없구나…’하고요.
그때, 2학년 김영숙 부장님이 반박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목소리에 확신을 담아 명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한 부서에서 조금 더 준비하면 전체 교사들이 더 편할 텐데, 굳이 여러 학년이 일을 나눠 하는 게 더 비효율적입니다. 과학부에서 준비하고, 담임들은 아이들에게만 집중하는 방식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이번엔 4학년 오영순 부장님이 차분히 말을 꺼냈습니다.
“김영숙 부장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어차피 과학 분야에서는 정수학 부장님이 가장 전문가 아니십니까? 전문성을 생각하면 그분이 준비하시는 게 행사 질적인 면에서 더 나을 겁니다.”
회의가 점점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고, 분위기는 다시 무거워졌죠. 바로 그 순간이었어요. 회의 내내 별 관심 없어 보였던 행정실장 권귀남이 느릿하게 손을 들어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 잠깐만요. 그럼 예산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정수학 부장님이 준비해 온 자료를 천천히 넘기며 대답했습니다.
“예산은 1인당 5,000원으로 잡혀 있고요, 학생 수를 계산하면 전체 약 350만 원 정도로 책정되어 있습니다.”
행정실장이 다시 느릿한 말투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행사 운영 방식을 어떻게 하든 그 예산은 그대로 집행되는 겁니까?”
정 부장님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방식에 상관없이 예산은 동일하게 지원됩니다.”
순간적으로 회의실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어요. 윤허담은 이걸 보며 속으로 또 한 번 생각했죠. ‘아, 이러다 끝이 안 보이겠구나…’ 바로 그때, 이 모든 걸 조용히 지켜보던 교감 한지수 선생님이 중재에 나섰습니다.
“지금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이 자리에서 당장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고요. 각 학년으로 돌아가 선생님들 의견을 충분히 모아오시면, 다음 회의 때 다시 논의하도록 합시다.”
교감선생님의 말로 회의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부장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죠. 윤허담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정수학 부장님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김도진 부장님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자료를 챙기고 있었습니다. 독고철 부장님은 조용히 짐을 챙겨 회의실 문을 나섰죠. 저는 깊은 숨을 한번 내쉬며 생각했습니다.
‘이건 아직 끝이 아니구나. 이제부터 진짜 논의가 시작되겠네…’
그렇게 저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의 고요함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야기를 다 마친 윤허담은 이제 막 긴장이 풀려 느슨하게 의자에 기대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벌컥!
연구실 문이 갑자기 열리며 낯선 얼굴의 여자 선생님이 고개를 슬며시 들이밀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어딘가 초췌하고 위축된 느낌이 강했다. 약간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무언가 물어볼 때조차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윤허담은 잠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급히 인사했다.
“어, 한지온 선생님. 들어오세요.”
한지온은 살짝 머리를 숙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들 바쁘신데...”
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힘이 없었다. 눈빛 역시 초조함과 망설임으로 가득했다. 한지온은 잠시 머뭇거리다 시선을 들어 남도윤 쪽을 보았다.
“혹시 남도윤 선생님, 지금... 바쁘신가요? 나이스 학적 입력하는데, 매뉴얼을 봐도 잘 모르겠는 게 있어서요.”
말끝이 흐려졌다. 남도윤은 짧게 그녀를 쳐다보다 단칼에 대답했다.
“지금 저희 학년 협의가 아직 안 끝나서요.”
그 말은 정확하고 단호했다. 한지온은 순간 움찔하더니, 조금 더 몸을 움츠리고는 애써 밝게 웃으며 말했다.
“네... 죄송해요. 바쁘신데 제가 방해했네요. 안녕히 계세요...”
한지온이 몸을 돌리려던 찰나, 가만히 지켜보던 강아름이 조급히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남도윤 선생님. 저희 지금 협의 멈춘 상태인데, 잠깐 봐드릴 순 없나요? 저번에 저도 도와주셨잖아요.”
강아름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원망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남도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강아름 선생님 그거랑 지금 상황이랑 좀 다릅니다. 저 선생님은 이미 너무 자주 물어보셨어요. 본인이 혼자서 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스스로 해결하셔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투에는 차가운 선이 그어져 있었다. 강아름은 그때의 남도윤과 지금의 남도윤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예전엔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도와줬던 사람이, 지금은 이렇게나 냉정하다니. 강아름이 다시 말을 꺼내자 남도윤이 한마디 덧붙였다.
“입학식은 학교에서 정말 중요하고, 상황 자체가 긴박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도울 수밖에 없었던 거고요. 지금은 저 선생님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분위기가 더 이상 묘해질 수 없을 정도로 얼어붙었다. 윤허담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 그저 입술만 몇 번 달싹거릴 뿐이었다. 한지온은 다시 한 번 애써 미소 지으려 했지만, 얼굴에 힘이 없었다. 그녀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서류철을 다시 한번 꼭 쥐며 작게 말했다.
“괜찮아요, 강아름 선생님. 제가 조금 더 알아보면 되죠 뭐... 죄송해요, 정말로.”
한지온의 어깨는 아까보다 더 축 처져 보였다. 몸을 돌려 복도로 걸어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윤허담은 순간적인 연민을 느꼈다. 키는 컸지만 마른 어깨와 긴 팔다리가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불안과 위축을 더 드러내는 것 같았다. 한지온이 문을 닫고 나가자, 윤허담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남도윤은 별로 개의치 않은 듯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다시 자료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자, 우리 협의 계속하죠. 부장님 오시기 전에 학습준비물 아직 결정 못 한 것도 있는데.”
윤허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네 사람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순간 연구실은 정적에 휩싸였고, 네 사람은 동시에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독고철 부장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선생님들, 회의가 좀 길어지네요. 퇴근시간 다되어서 오늘은 바로 퇴근하셔요. 고생하셨습니다.”
남도윤은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짧게 한숨을 쉬었고, 강아름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의가 얼마나 더 복잡해졌길래...”
윤허담은 그 문장을 천천히 다시 읽으며 마음속으로 한지온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 초췌한 얼굴과 무기력한 눈빛이 쉽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저 선생님, 힘들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잠시였다. 윤허담은 연구실을 천천히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
“자,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합시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방금 전의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 ‘과학의 달’ 행사 준비가 쉽지 않을 거라는 작은 예감과 겹쳐져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4시 40분이 되었다. 강아름은 교실 문을 천천히 닫고 복도에 나왔다. 복도는 이미 퇴근한 다른 교사들이 모두 빠져나가 조용했다. 길고 한적한 복도를 걷다 계단을 내려서자, 아래층에서 교실 문을 잠그고 나오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윤기 없는 갈색 머리에, 어깨가 축 처진 채 힘없이 서류 가방을 들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강아름은 그녀가 바로 아까 6학년 연구실에서 어색한 모습으로 돌아섰던 한지온 선생님이라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한지온은 약간 당황한 듯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강아름도 순간적으로 머뭇거리다가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아, 선생님. 이제 퇴근하세요?”
한지온은 잠시 멈칫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이제 막 문 잠그고 나오는 길이었어요.”
말을 마친 그녀의 얼굴은 피로감이 역력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색함을 떨쳐보려는 듯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복도를 지나 교문 밖으로 나오면서 한지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강아름 선생님 댁은 어디세요?”
“아, 저는 부평에 살아요. 선생님은요?”
“부평이면 저랑 같은 방향이네요. 저는 청라 쪽에 살아요. 같이 전철역까지 가시겠어요?”
한지온의 말투는 약간 망설이는 듯했지만 친절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걷기 시작했다. 어색함이 가득한 침묵을 깨기 위해 이번에는 강아름이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무슨 과 나오셨어요? 저는 과학교육과인데.”
그 말에 한지온이 순간 멈칫했다. 그녀의 얼굴에 미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저도… 과학과인데요?”
강아름은 뜻밖이라는 듯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우와, 그럼 같은 과 선배님이시네요? 신기해요!”
한지온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작게 말했다.
“저는 춘천교대 출신이에요.”
“아… 저는 경인교대 나왔어요.”
짧은 대화가 다시 끊겼다. 미묘한 어색함이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맴돌았다. 어느새 두 사람은 말없이 전철역에 도착했고, 개찰구를 통과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한지온이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사실은요… 학년에서 이야기를 좀 들었어요. 입학식 방송 처음 맡으셨는데 방송사고 없이 잘 끝냈다고. 올해 들어온 신규교사 중에 아주 유능한 사람이라고 교육과정위원회에서도 교장선생님께서 칭찬까지 하셨다며 다들 이야기하더라고요.”
강아름은 조금 당황스러워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실제로는 중간에 조명이 갑자기 꺼져서 사고 날 뻔했어요. 다만 교장선생님이 워낙 재치 있게 대처해 주신 덕분에 잘 넘어간 거예요. 사실 거의 망칠 뻔했죠.”
한지온은 왠지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요? 저는 또 정말 완벽하게 해내신 줄 알았어요.”
한지온은 다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강아름은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았다. 한지온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는 나이스 업무가 너무 힘들어요. 아이들 명부, 이름, 편제 관리에 권한 설정도 복잡하고요. 솔직히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 물어볼 사람도 없어요. 매뉴얼은 두껍기만 하고 읽어도 이해도 잘 안 되고요. 오늘도 몇 가지 좀 물어보려 했는데 남도윤 선생님이 너무 바쁘신 것 같더라고요.”
한지온의 말투가 점점 징징거리는 듯했다. 강아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한지온의 눈가에는 깊은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고, 입술은 힘없이 떨렸다.
“저희 반은요, 올해 유독 힘든 아이들이 많아요. 학부모님도 정말 까다로운 분이 계셔서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다른 학년은 다들 괜찮다고 하던데 왜 하필 저만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요. 6학년은 아이들이 참 좋다는 말도 있던데… 그런 편한 아이들 가르치면 저도 이렇게 힘들지 않을 텐데요.”
강아름은 그녀의 말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 선생님은 늘 자신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아까 남도윤 선생님이 왜 그렇게 차갑게 선을 그었는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한지온은 여전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방송 업무가 더 편할 수도 있죠. 매뉴얼이라도 잘 되어 있으면 좋겠어요. 나이스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어렵거든요.”
강아름은 답답한 마음에 잠시 멈칫하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사실 방송은 매뉴얼 자체가 없어요. 매뉴얼이 없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준비하고 알아서 해야 하는 업무에요. 방송이라는 게 준비부터 송출까지 거의 모든 게 개인의 몫이에요.”
하지만 그 순간 전철이 큰 소음을 내며 도착했고, 한지온은 강아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계속 자기 말만 이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참 좋겠어요. 적어도 자기 업무는 확실히 알고 시작하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헤매고 있는데, 사람들은 제가 괜찮다고 생각하나 봐요. 제가 얼마나 힘든지 전혀 모르면서…”
전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밀려 나오면서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지온은 의자에 지친 듯 주저앉았다. 강아름은 한지온의 옆자리에 앉았지만 왠지 그녀의 징징거림을 더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한지온은 곧 다시 불만 섞인 투덜거림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강 선생님은 방송 업무 맡으셔서 그래도 행사는 빨리 끝났으니까 좋겠어요. 저는 나이스 때문에 계속 늦게까지 남아서 매일같이 고생하고 있는데… 다들 자기가 힘든 줄 알지, 제가 얼마나 힘든지는 몰라요. 남도윤 선생님도 조금만 도와주면 될 텐데 너무 냉정하시고요.”
강아름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아까까지 가지고 있던 한지온에 대한 연민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강아름은 천천히 생각했다.
‘아, 이래서 남도윤 선생님이 아까 그렇게 냉정하게 대했구나.’
전철은 계속 달리고 있었지만, 강아름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옆자리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한지온의 투덜거림이 점점 듣기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학교 밖에서마저 그녀의 긴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강아름은 정신없이 교실로 출근했다.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학생들이 하나둘씩 교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8시 20분이었다. 초등학교의 출근 풍경은 특별했다. 출근과 동시에 학생들이 교실로 밀려 들어왔고, 교사들은 그 순간부터 온종일 학생들과 붙어 생활해야만 했다.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
“선생님, 어제 숙제 검사 오늘 하시는 거 맞죠?”
“저 선생님, 체육복 깜빡했어요!”
학생들의 목소리는 정신없이 강아름을 둘러쌌다. 8시 40분이 되자 모든 아이들이 교실에 자리를 잡았고, 본격적인 아침활동이 시작됐다. 오늘의 활동은 '한컴타자 연습'이었다. 강아름은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 여러분, 오늘 아침활동은 한컴타자예요. 모두 교실 뒤쪽 노트북 보관함에서 본인의 노트북을 꺼내세요. 연습 시작하세요!”
학생들은 교실 뒤편에 마련된 보관함에서 각자 자신의 노트북을 꺼내어 책상 위에 펼쳐놓고 타자 연습을 시작했다. 교실은 곧 ‘타다닥 타다닥’ 하는 타자 소리로 가득 찼다. 강아름은 책상 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화면을 살폈다. 하지만 눈은 화면을 향하고 있었으나, 머릿속은 어젯밤 전철 안에서 나눴던 한지온과의 대화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처음엔 남도윤이 한지온에게 너무 냉정하다고 느꼈었다. 그러나 어제 대화를 듣고 나니, 한지온의 투정과 징징거림이 너무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왜 남도윤이 그렇게 단호하고 차갑게 선을 그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다른 사람 이야기는 한쪽 입장만 들어서는 안 되나 봐…’
짧은 생각을 마치고 강아름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벌써 8시 55분이었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바로 1교시 국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강아름은 빠르게 교과서와 수업자료를 챙겼다. 수업은 쉼 없이 이어졌다. 1교시 국어가 끝나자 곧장 2교시 수학 수업 준비, 이어서 3교시 체육 수업을 위해 운동장으로 이동, 다시 교실로 돌아와 4교시 음악 수업까지 끝내고 나니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을 겨우 마치고 난 뒤에도 쉬는 시간은 없었다. 5교시 사회 수업이었고, 마지막으로 6교시 자율 수업까지 마쳐야 했다.
하루 종일 뛰고, 걷고, 설명하고, 지도하며 정신없이 학생들과 부대끼다 보니 어느새 모든 수업이 끝났다. 시계를 다시 보니 오후 2시 30분. 아이들이 떠들썩한 인사를 하고 하교하자, 그제야 강아름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피로가 몰려왔다. 화장실도 이제서야 갈 수 있었다. 강아름은 흐르는 시간을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정신없는 학교생활을 하며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한지온의 얼굴과 어젯밤의 징징거림이 생생히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오래 하지 못한 채 곧 다음 날 준비물을 확인하고, 내일의 수업자료를 챙기며 다시 하루의 끝없는 업무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루하루 학교생활은 여전히 정신없이 흘러갔다. 강아름은 방과후에도 방송실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눈꺼풀은 무겁고 어깨는 뻐근했지만, 방송부 학생들이 들어와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생님, 여기 신청곡 리스트에요.”
“그래 내일이 수요일이니까 빨리 준비하자!”
매주 수요일은 학생들의 신청곡을 받아 아침방송에서 틀어주는 날이었다. 학생들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마이크와 방송 장비를 점검하는 동안, 강아름은 옆에서 지켜보며 진행 과정을 점검했다. 방송이 무사히 끝나자 학생들이 신나게 인사를 하고 교실로 돌아갔다. 텅 빈 방송실에 혼자 남자, 강아름은 잠시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아, 정말 피곤하다. 이렇게까지 피곤할 줄 몰랐는데…’
그 순간, 문득 교감선생님이 얼마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강 선생님, 많이 피곤하면 여교사 휴게실에 가서 쉬어요. 거기 온돌바닥도 있고 최고급 안마의자도 있으니까. 딱 30분만 누워도 훨씬 개운할 거예요.’
‘그래, 한번 가보자. 30분만 딱 쉬고 나오면 퇴근 전까지 버틸 수 있겠지?’
강아름은 방송실 문을 조용히 닫고 복도를 걸어 여교사 휴게실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에도 온몸은 천근만근이었다. 그렇게 휴게실 문을 열었는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얼굴에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 소파 끝자락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한지온이었다.
한지온도 문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들었고,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강아름은 다시 피곤함이 몰려왔다. 전에 학교를 나오면서 나눴던 힘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솔직히 지금은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건 한지온이었다.
“아… 선생님 오셨어요?”
목소리는 여전히 작고 약했다. 강아름도 마지못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네, 잠깐 쉬려고요.”
안마의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냥 포기하고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그때 한지온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 안쪽 냉장고로 걸어가더니 문을 열었다. 그리곤 음료수 하나를 조용히 꺼내 강아름에게 건넸다.
“이거라도 마시면서 잠깐 쉬세요.”
뜻밖의 친절이었다. 강아름은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고맙다는 눈빛으로 음료수를 받고 작은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다시 한지온이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했다.
“선생님, 교육과정위원회 때 교장선생님이 강 선생님 칭찬을 많이 하셨대요. 방송 첫 업무인데 너무 잘했다고…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진짜 부럽네요…”
말을 끝내고 한지온은 애써 웃었지만, 그녀의 눈가가 조금 붉어지고 있었다. 강아름은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아 짧게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다들 좋게 봐주신 거죠 뭐.”
짧은 대답에도 한지온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전 오늘도 교감선생님께 호출 당했어요. 정보부장님, 교무부장님까지 같이 불려가서… 나이스 학적 정리를 제대로 못 했다고…”
말을 마친 한지온은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강아름은 당황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얼른 옆에 놓인 휴지 한 장을 그녀에게 건넸다.
“감사해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자주 힘든 소리만 하는 거죠? 그런데 정말… 학교 일이 이렇게까지 정신없고 힘든 줄은 몰랐어요. 교생 때만 해도 그냥 수업만 열심히 준비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한지온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힘없이 이어갔다.
“수업 준비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벅찬데, 나이스 업무는 정말 끝이 없어요. 권한 설정도 너무 복잡하고, 매뉴얼은 아무리 읽어도 잘 이해가 안 되고… 누구에게 물어봐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어요. 다들 대충만 알고 있어서 교육청 담당자나 인터넷 커뮤니티만 뒤지고 있어요. 다른 동기들은 왜 그렇게 잘 하는지… 정말 제 자신이 무능한 것 같아요.”
그녀의 말투에는 징징거림보다는 더 깊은 우울과 피로가 묻어났다. 강아름은 한지온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이 점점 다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한지온은 눈물을 닦으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올해 우리 반은 작년에 크게 다툰 아이들이 하필이면 같은 반이 되어 학부모님들 민원까지 많아서… 수업도 어렵고, 생활지도도 너무 힘들어요. 학부모님들이 자꾸 연락하시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고…”
한지온의 말이 이어질수록, 강아름의 가슴도 조금씩 아파왔다. 자신도 얼마 전까지 그런 심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한지온은 징징대는 동료가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름의 눈시울도 조금씩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저도 그래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고, 수업 끝나고 나면 매일 지쳐서 녹초가 되거든요. 사실 학교 일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강아름의 말에 한지온도 조금 놀란 듯 바라봤다. 그 표정에 조금씩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서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선생님도 그런가요…? 저는 저만 힘든 줄 알았어요. 다들 너무 잘 하는 것 같아서요.”
한지온이 다시 말을 하자, 강아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다 똑같이 힘들어요. 저도 사실 정말 힘들었거든요. 저도 매일 실수할까봐 걱정이 가득이에요.”
한지온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서먹함은 어느새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연민의 감정이 점차 따뜻한 공감으로 변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여교사 휴게실의 창문으로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이 들어왔다. 그렇게 강아름과 한지온은 천천히 진짜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학교 생활이 처음으로 부드럽게 연결되고 있었다.
다시 오후 4시, 강아름과 6학년 선생님들은 다시 연구실에 모였다. 모두들 전날 있었던 부장회의의 결론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라면 직접 정리해줬을 독고철 부장은 오늘 교육청 출장이 잡혀 자리에 없었다. 대신, 윤허담이 전달을 맡았다.
이번에는 교감선생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회의를 열었다.
“교장선생님께서 올해 과학의 달은 체험부스 중심으로 전교생이 함께 즐기는 행사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학년별 소규모 행사는 아무래도 그 취지에 못 미칠 수 있고, 학부모님들도 아쉬워하실 수 있어요. 각 학년에서 의견을 정리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한 분씩 말씀해 주시겠어요?”
1학년 오필주 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는 과학부에서 부스를 준비해 주신다면, 학생들 안전지도와 인솔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겠습니다.”
2학년 김영숙 부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과학부장님이 일괄로 준비해주시면 준비 부담이 줄고, 행사의 질도 더 높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3, 4학년 부장들도 “같은 의견”이라며 짧게 동의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5학년 김도진 부장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정수학 부장님이 모든 걸 책임지게 되면, 결국 섭외, 품의, 외부 강사 관리까지 과학부에 일이 집중됩니다. 외부업체 섭외 과정, 품의 결재, 일정 관리 등 실제로 해야 할 행정업무가 엄청납니다. 과연 혼자서 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6학년 부장도 이어받았다.
“사실 과학부장님 혼자 너무 많은 업무를 맡는 건 저도 반대입니다. 융합과학부로 학교예술교육 프로그램 운영에다 방과후 예술동아리까지 다 하고 계시잖아요. 이쯤이면 과학부장이 아니라 학교 부장 아닙니까?”
말이 끝나자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1, 2, 3, 4학년 부장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오필주 부장이 다시 나섰다.
“그래도 맡은 일 하는 거 아닙니까? 업무량이 많다고 피해갈 수는 없는 거죠.”
2학년 부장이 한숨을 쉬며 반박했다.
“그렇다고 다들 그냥 맡으라는 것도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여러 명이 준비하면 중복되는 일도 많고요. 오히려 학년군별로 나눠서 부스를 준비하면 어떨까요?”
교감선생님이 그 말을 정리했다.
“학년군별로 묶어서 준비하면, 한쪽에 부담이 쏠리지도 않고, 중복도 줄어드니 좋은 대안일 수 있겠네요. 1,2학년, 3,4학년, 5,6학년 식으로 세 그룹으로 나눠 같은 체험을 운영하는 방안,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부장들은 한동안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마침내 정수학이 결론을 내렸다.
“체험부스 활동은 학년군별로 2시간씩 준비해서 돌아가며 체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부스 내용과 운영 준비는 군별로 분담하고, 교장선생님의 의중은 아마 교육활동이 학부모들에게 잘 홍보되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의 달 행사는 짧고 임팩트 있게 ‘숏폼 영상’으로 홍보 영상을 남기겠습니다.”
회의실에 작은 탄식과 안도의 숨이 함께 흘렀다. 교감은 부드럽게 웃으며 마무리했다.
“좋아요. 이렇게 뜻이 모아졌으니, 이제 세부계획은 군별로 협의해서 바로 시작하면 되겠습니다.”
“진짜… 어제 회의실은 예능 프로그램 뺨쳤다니까요.”
윤허담은 일부러 재치 있게 분위기를 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아름, 남도윤, 영어교사 이지혜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초반엔 다들 ‘과학부장님이 다 하시죠!’
이런 분위기였는데, 5학년 부장님이 ‘혼자 죽으란 소리냐’고 버티고, 6학년 부장님은 ‘이쯤이면 학교 부장 아니냐’고 던지고… 잠깐 정적 흘렀죠.”
모두 피식 웃었다. 강아름은 고개를 갸웃했다.
“결국 어떻게 된 거예요? 진짜 정수학 부장님이 다 하게 된 건 아니죠?”
“다행히 아니에요. 2학년 부장님이 절묘하게 절충안을 내서, 학년군별로 나누는 걸로 정리됐어요. 1·2학년, 3·4학년, 5·6학년이 한 팀이 돼서 각각 다른 체험을 준비하고, 준비 부담을 나누는 거죠. 그리고 체험 끝나면 짧은 홍보 영상도 만듭니다.”
남도윤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 그럼 우리도 5·6학년이니까 같이 준비해야겠네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걱정이라고 해야 할지…”
이지혜가 작게 중얼거렸다.
“홍보 영상까지라… 학생들 인터뷰도 시키면 재밌겠네요.”
강아름은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모두가 각자 역할을 하게 돼서, 작년보다 부담이 줄긴 하겠네요. 그래도 걱정되긴 해요. 준비가 얼마나 복잡할지…”
윤허담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일은 나누면 줄고, 같이하면 재미도 있다잖아요. 이번엔 우리도 멋진 행사 한번 만들어봅시다.”
잠시 연구실에 잔잔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막연한 걱정과 함께 은근한 기대감이 번져 있었다. 긴 부장회의와 의견 조율이 모두 끝난 뒤, 선생님들의 얼굴에는 미묘한 피로와 안도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결국 올해 과학의 달 행사는 ‘체험부스 활동’으로 정리되었고, 각 교사들이 개별적으로 머리를 싸매야 할 일은 거의 사라졌다. 남도윤은 자리에 앉은 채 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교실 좀 정리하고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그는 무심한 듯 일어나 교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슬슬 나갈까요?”
윤허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머지 선생님들에게 말을 건넸다. 강아름은 짐을 챙기던 손을 멈추고, 윤허담이 무언가 덧붙일 듯한 눈치를 보였다. 윤허담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어제 복도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퇴근하려던 참에 5, 6학년 부장님하고 정수학 부장님이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됐거든요.”
강아름과 남은 교사들은 잠시 멈춰섰다. 다시 윤허담의 기억 속 장면이 펼쳐졌다.
복도의 어스름한 불빛 아래, 김도진과 독고철이 나지막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형, 왜 다 하려고 그래요? 우리가 일 좀 덜어주려고 했는데, 다 떠맡으려고 하시네요.”
김도진의 투덜거림에 독고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굴도 못 보고, 소리 맞출 시간도 없잖아요. 형, 너무 바빠요. 형 볼라고 이학교로 다 온건데.”
정수학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미안해. 아내가 출근이 빠르고 퇴근이 늦어서 내가 애 등하원을 맡으니까, 시간 내기가 쉽지가 않아. 그래서 일이 쌓이면 자꾸 늦어지는 거야.”
두 부장교사는 한숨을 쉬었다.
“형님, 다 잘하실 거 알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다음 달엔 교생도 오고, 1인 3악기 교육도 준비해야 하는데… 그건 유능한 계원님이 맡아서 잘 할 거라 믿어요.”
정수학은 시계를 확인하며
“나 오늘 또 애들 데리러 가야 해서 늦겠다. 내일 보자.”
말을 남기고 바쁘게 복도를 걸어갔다. 남겨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알았어요, 잘 가요 형님.”
이야기를 다 들은 강아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사의 일은 겉으로 드러난 수업이나 행사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점점 깨닫고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누군가는 무거운 짐을 나누려 애쓰고, 누군가는 묵묵히 자신의 몫을 더 떠안기도 한다. 학교 행사는 그저 하루의 이벤트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노고와 서로의 배려, 그리고 수많은 대화와 갈등, 작은 농담과 위로가 겹겹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었다. 윤허담은 문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강아름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강 선생님, 이번에 숏폼 영상은 아마 선생님이 맡게 될 거예요. 곧 정수학 부장님이 직접 업무 전달하실 겁니다. 파이팅입니다.”
강아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네…”라고 답하며 연구실을 나섰다. 교정에 늦은 햇살이 길게 드리워질 무렵, 강아름은 가만히 생각했다.
‘이제야 학교의 진짜 모습을 조금 알 것 같다. 앞으로는 내게 맡겨지는 일도, 다른 선생님들의 마음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져 있었다. 강아름은 자신도 이제, 이 어른들의 ‘함께 버티는’ 세계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곧 마주할 정수학 부장님과의 첫 진짜 업무 대화가 어떤 모습일지, 묘한 설렘과 긴장감으로 교문을 나섰다.
2화 과학의 달 끝.
학교 방송실, 수업을 마치고 방송실에서 업무를 보는 강아름.
강아름은 컴퓨터 앞에 앉아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띄워 놓고, 학교 공유드라이브를 클릭했다. <정보부-방송-과학의달 홍보>라는 폴더에 들어가자, 이미 학년별·학급별로 정리된 영상 소스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폴더 안에는 정수학이 미리 올려둔 템플릿과 예시 영상도 있었다. 그리고 눈에 띄는 하나의 파일, <읽어보시고 편집해주세요>라는 제목이었다. 클릭하자, 상세한 편집 방향과 콘티, 예시 자막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와…”
강아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설명은 명확하고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다. 설명만 따라 하면 누구라도 바로 편집을 마무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안내가 잘 되어 있으면 계원 입장에서는 정말 마음이 편한데… 특히 신규 교사에겐 이게 진짜 꿀이다.’
직접 기획하거나 창의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업무가 막막하게 느껴졌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강아름은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엔 살짝 아쉬움도 남았다.
‘얼굴 보면서 업무 이야기도 하고 싶었는데…’
정수학 부장과의 첫 대면을 기대했지만, 업무전달은 오직 학교 메신저의 간단한 메시지와 파일로만 이루어졌다.
[정수학 메시지]
선생님, 학년부장님들께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행사 진행 중 학급별로 20초 정도 학생들 모습 잘 담아서 업로드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아래 경로로 들어가시면 영상 소스와 템플릿, 콘티 있습니다.
학년군별로 1분 미만으로 숏폼 잘 부탁드려요.
4월 8일까지 먼저 저에게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빠르고, 간결하고, 정확하다… 어떻게 이렇게 일을 처리하지?’
강아름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때, 카톡 알림이 울렸다. 한지온에게서였다.
[한지온] 여교사 휴게실로 잠깐 올 수 있어요?
며칠 전부터 조금 더 가까워진 두 사람. 강아름은 방송실 일을 마치고 곧장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서 마주친 한지온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선생님, 오늘 얼굴이 한결 좋아 보이세요.”
강아름이 인사하자, 한지온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나이스 업무도 막히는 부분마다 물어볼 선생님이 생겼어요. 정말 살 것 같아요! 그리고… 선생님, 저번에 말씀드린 힘든 학부모님 있잖아요? 그분이랑 원래 친한 선생님이 계셔서, 어떻게 응대하면 되는지도 자세히 알려주셨어요.”
“누구세요? 같은 학년 선생님인가요?”
한지온은 손가락으로 ‘쉿’ 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수학 선생님이요! 그리고 선생님 방송 업무 일도 엄청 잘 도와주셨더라고요. 저도 이번에 알았어요.”
강아름은 순간 멍해졌다.
“정수학… 선생님이요? 진짜요?”
한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더 놀라운 거, 시업식 방송 사실은 아닌 정수학 부장님이 직접 방송실에 들어가서 직접 다 하셨대요.”
강아름은 그 자리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 시업식 방송? 아 전혀 몰랐어요. 입학식 방송만 생각하고 있어서.”
‘아, 그럼 내가 어리바리 할 때마다 날 도와준 사람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리고 하나 둘씩 누군가 자신을 도왔던 것들이 떠올랐다. 강당 불을 켜준사람, 믹서 세팅, 그리고 메모지까지. 어쩐지 완벽할 수밖에 없었던 방송,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늘 누군가가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있었던 사실.
두근, 두근. 강아름의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울렸다. 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