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슬기로운 학교 생활, 본격 초딩 교사 성장 로망 소설
* 3화 완성입니다. ^^ 조금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한지온은 어린 시절부터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들어왔던 말이 있다.
학부모 수업공개 날, 교실 안에는 분필 가루 냄새와 어른들의 향수가 섞인 공기가 떠다녔다. 복도에서는 구두 굽이 바닥을 치는 ‘탁, 탁’ 소리가 리듬처럼 이어졌다.
“우리 반에 한지온이라는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 있습니다. 친구들도 잘 도와주고, 설명도 참 잘해요.”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말에 어머니가 뒷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넌 나중에 선생님 하면 되겠다. 애들 가르치는 모습이 참 잘 어울려.”
“응, 나도 선생님 할 거야.”
지온은 어머니의 말에 별 의심 없이 대답했다. 그게 자신이 가야 할 길이라고 믿었으니까.
교실에서 지온은 늘 ‘작은 선생님’이었다.
“이 문제 어떻게 푸는 거야?”
“여기, 주어랑 서술어를 먼저 찾아봐.”
“아~ 그럼 이렇게 하면 되는 거네?”
그 한 마디에 친구가 웃었고, 다른 아이들이 공책을 들고 몰려왔다.
“야, 넌 진짜 선생님 같다.”
그 말은 농담이 아니라 예언처럼 들렸다.
그래, 난 선생님이 될 거야.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이거니까.
“이 문제 어떻게 푸는 거야?”
옆자리 친구가 수학 공책을 들이밀면, 지온은 차분히 설명해 줬다.
“아~ 그럼 이렇게 하면 되는 거네?”
그렇게 한 번 풀어주면 다른 아이들도 책을 들고 몰려왔다. 마치 작은 보조 교사처럼.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이 농담처럼 말했다.
“야, 넌 그냥 선생님 해라. 너 없으면 우리 다 낙제야.”
그래, 난 선생님이 될 거야. 내가 잘하는 건 이거니까.
고3 겨울, 수능 성적표를 받아 든 순간 모든 게 무너졌다. 하얀 봉투 속 성적표를 꺼냈다. 종이의 차가움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국어와 영어는 괜찮았다. 하지만 수학 점수는 바닥을 기었다.
“서울교대는 무리겠네. 지방교대라도 써야지.”
마음속에서 ‘나보다 뛰어난 애들이 더 좋은 학교로 간다’는 자격지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담임선생님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서울교대가 아니면 안 될 줄 알았는데… 이제 벌써 반은 실패한 거네. 부모님은 말없이 식탁에 밥을 올려놓았다. 서울 재수 학원 광고 전단지를 오래 들여다봤지만,
“재수는 힘들다. 한 번에 붙는 게 낫지 않겠니?”
그 말에 지온은 웃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밥숟가락은 손끝에서 서늘하게 식어갔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은 쓰렸다. 결국 안전하다는 지방교대에 원서를 넣고, 그대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지방 교대 첫날, 지온은 커다란 강의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같이 공부하며 성장할’ 동기들을 기대했지만, 분위기는 예상과 달랐다. 기차로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한 지방 소도시. 교대 캠퍼스의 봄 햇살은 따뜻했지만, 공기는 낯설고 차가웠다. 한지온이 참여하지 않은 OT에서 이미 무리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번 주에 시험범위 스터디 할 사람?”
“임용 준비반 들어올래?”
그런 말이 오갔지만, 지온은 어느 그룹에도 끼지 못했다. 강의실 창밖에서는 비둘기 날갯짓 소리가 들렸고, 안에서는 누군가 웃으며 서로의 어깨를 툭 치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이상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여기선… 내가 빛나지 않네.
2학년 여름방학, 선배의 소개로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의 과외를 맡았다. 첫 수업 날, 골목길 끝의 낮은 대문을 열자, 습기 섞인 냄새와 함께 아이가 문을 열었다.
“저 공부 안 해요.”
첫인사가 그랬다.
“그래도 이번 단원평가 준비는 해보자. 하면 생각보다 쉽거든.”
“싫어요.”
숙제를 꺼내라고 하자, 아이는 한 장의 하얀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숙제야?”
“네.”
“아무것도 안 썼잖아.”
“몰라요.”
같은 설명을 열 번 해도 아이는 창밖만 바라봤다.
“다시 풀어보자.”
“싫어요.”
지온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네가 이렇게 하니까 성적이 안 오르잖아!”
“선생님 잘 못 가르치는 거죠? 왜 제 탓을 해요? 재미있게 좀 가르쳐줘 보세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식어버린 것 같았다. 벽시계 초침 소리만이 귓가를 때렸다.
그래… 난 한 명도 못 이끄는구나. 내가 선생님이 될 자격이 있나?
결국 2학년 말, 지온은 휴학계를 냈다. 집에 돌아온 후, 하루는 끝없이 늘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시계는 오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세상은 움직이는데, 자신은 멈춰 있었다. 거울 속 얼굴은 부어 있었고, 눈 밑은 시커멓게 파였다.
‘나… 왜 사는 거지?’
부모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학교는… 다시 갈 거지?”
“… 몰라요.”
지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가서 뭐 해’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다 삼켜졌다.
한 학기 만에 학교로 돌아갔지만, 웃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졸업 후 임용고시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불합격.”
첫 번째.
“불합격.”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시험 전날, 손이 떨렸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나 진짜 끝이야.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5월 1일. 푸릇하고 행사 많은 가정의 달에 참결초등학교 첫 발령 날. 복도 끝 창문으로 오후 햇살이 들어와 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1학년 2반입니다. 휴직하신 선생님 자리에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교감의 말은 담백했다. 지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심장은 미친 듯 뛰었다. 1학년…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오래전 과외 학생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창밖만 바라보던 시선, 숙제장 위의 빈 종이. 그리고 그때의 자신— 지쳐서 한숨만 내쉬던 교대생 스물두 살 한지온이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그때처럼 무너진다면… 이번엔 정말 못 일어날 것만 같았다.
한지온은 발령 첫날 아직도 그 상황이 잘 기억난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지만,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축축했다. 교무실 문 앞에서 숨을 들이마셨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프린터 소리, 누군가 서류를 넘기는 바스락 거림, 커피 믹스의 달큼한 냄새. 문이 열리자, 여러 시선이 동시에 나를 스쳤다.
“1학년 2반입니다. 아이들이 입학한 지 2달밖에 되지 않아서 기본 생활습관 잘 잡을 수 있도록 지도해 주세요.”
교감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평온함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옆에서 오필주 부장이 의자를 반쯤 뒤로 젖힌 채 웃었다.
“쉽게 말해, 반을 통제 못 하면 아무것도 못해요. 특히 1학년은요, 정말 호랑이처럼 굴어야 합니다.”
농담처럼 보였지만, 웃지 않았다. 호랑이처럼… 내가 할 수 있을까?
복도를 따라 걸어가며 창문으로 보이는 운동장을 힐끗 봤다.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이 뛰어다녔지만, 곧 시선은 발끝으로 떨어졌다. 손잡이에 손을 얹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작은 몸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선생님이다!”
“이거 해주세요!”
“선생님, 저 이름 뭐예요?”
한 명이 팔목을 잡으면, 다른 한 명은 허리춤에 매달렸다. 작은 손에서 달콤한 사탕 냄새와 점심 전 밥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누군가는 내 머리카락을 건드렸고, 누군가는 내 신발 끈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지?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발령받은 그날 이후 매일이 전쟁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 연필을 부러뜨리며 웃는 아이, 책상 위에 올라가 춤을 추는 아이. 쉬는 시간마다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이거 잘라주세요!”
“종이접기 해주세요!”
“저랑 가위바위보 해요!”
의자에 앉아 종이를 자르다 보면, 다른 쪽 팔에는 또 다른 아이가 매달려 있었다. 책상 위는 풀과 종이 조각, 색연필이 뒤섞여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두 아이가 서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울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새 점심시간, 급식실로 가는 줄은 금세 흐트러졌다. 한 아이가 앞으로 달리다 넘어지고, 그 뒤를 따르던 아이들이 우르르 무너졌다.
“괜찮아?”
다친 아이를 부축하는 순간, 뒤쪽에서 또 다른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와중에 교실에 한 아이를 남겨두고 나와버렸다.
“아, 어떡해!”
다시 돌아가 아이를 데려오는 동안, 급식실에서는 다른 교사들이 한지온을 노골적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 눈빛 속에는
“1-2반이 요즘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모두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였다. 나는 벌써 문제가 많은 담임이 됐구나.
이튿날 오후, 학년연구실로 오필주 부장이 그녀를 불렀다.
“선생님, 애들은요, 단호하게 하셔야 돼요. 지금은 학교 선생님과 부모님을 구분하는 시기예요. 쓸데없는 친절은 금물입니다. 기본 생활 습관부터 잡으셔야죠.”
그 목소리는 단단했고, 표정은 한지온을 시험하는 듯했다.
그래, 단호해야 해. 그래야 질서를 잡을 수 있겠지.
다른 반 교사들의 호령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겹쳐 들렸다.
5월 5일 어린이날, 미술 수업. 교실 뒤편에서 한 아이가 친구 가방을 열어 장난을 치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가자.”
“싫어요.”
“지금 수업 중이잖아. 자리에 앉아야지.”
“싫다니까요.”
주변에서 아이들이 킥킥대는 웃음이 번졌다. 심장이 ‘쿵쿵’ 울렸고,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선생님이 뭐라고 했지? 수업시간엔 자리에 앉으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순간,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그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휙 돌렸다. 공기 속에 날카로운 긴장감이 맴돌았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나간 뒤였다. 의자 등받이에 잠시 기대 숨을 고르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엔 모르는 번호. 느낌이 싸늘한 것이 받고 싶지 않았다.
“여보세요?, 한지온 선생님 맞으시죠?”
목소리는 처음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예리한 날이 숨어 있었다.
“제 아이가 오늘 수업 중에 당한 일을 들었어요. 도대체 선생님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신 거죠?”
잠시 숨을 골랐다가,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친구들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고요?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고요? 이건 정서적 학대입니다! 선생님이 아이 마음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아세요? 평생 잊지 못할 수도 있다고요!”
말끝이 날카롭게 찢겼다.
“교사라는 사람이 애를 다루는 방법도 모르고… 그런 식이면 아이를 맡길 수가 없어요. 담임을 그만두던지 교사를 그만두던지 하세요!”
지온은 입을 열었지만, 목구멍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그 한 마디조차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계속 항의 문자를 읽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5월 8일 어버이날의 항의 문자는 더없이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논리적이었고,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완벽한 항의였다.
선생님, 제 아이가 집에 와서 한 말을 듣고 너무 놀라고 화가 나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제 아이가 수업 시간에 잠시 자리를 이탈했다고 해서, 모든 아이들 앞에서 큰 소리를 지르셨다면서요? 그 상황에서 아이가 느꼈을 모욕감과 수치심을 선생님은 조금이라도 상상해 보셨습니까? 아직 초등학교 1학년입니다. 이제 막 학교생활에 적응해 가야 할 나이에, 담임이라는 가장 가까운 어른에게 공개적으로 꾸중을 듣고 친구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면 그 아이의 마음에 얼마나 깊은 상처가 남을지 생각해 보셨나요? 아이는 어제저녁밥도 먹지 않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희 가족은 그 모습을 보며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더 큰 문제는, 선생님께서 그 상황을 ‘생활지도’라고 생각하신다는 점입니다. 생활지도와 정서적 폭력은 다릅니다. 아이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지도는 교육이 아니라 학대입니다. 저는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분이 이런 기본적인 선을 모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한 번의 사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제 아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사로서의 자질 문제이자, 1학년 전체 학생들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의 문제입니다.
저는 이번 일을 학교와 학부모 커뮤니티에 공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학부모들도 알 권리가 있고, 같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안으로 명확한 입장을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만약 성의 없는 대응을 한다면, 정식으로 교육청 민원을 넣고, 교체 요청을 하겠습니다.
하나같이 명령이었다. 사과가 선택이 아닌, 이미 결정된 결말처럼.
다음 날 아침, 교장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책상 위 서류철 위에서 번들거렸다. 교장은 의자에 기대어 손가락을 깍지 낀 채, 마치 가족에게 말하듯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이런 일은요… 길게 끌수록 좋지 않아요. 빨리 사과하고 넘어가는 게 서로 편합니다.”
교감이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를 더했다.
“맞아요, 선생님. 학부모 마음이 풀리면 금방 정리돼요. 괜히 더 힘들게 하지 말아요. 사과 한 번이면 되는 걸로.”
말투는 달콤했지만, ‘거절은 선택지가 아니다’라는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그때, 뒤쪽에서 오필주 부장이 팔짱을 낀 채 나섰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단호하되 겁은 주지 말라고요. 그런데 신규 선생님이 그걸 잘못 받아들여서 이런 일이 생긴 거잖아요.”
그의 입가에는 미묘한 미소가 스쳤다.
“다음부턴 조언을 좀 더 잘 새겨들으셔야 해요. 애들은 생각보다 예민하니까.”
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그래서, 사과는 언제 할 건가요?”
지온은 숨이 막혔다. 그들의 말은 모두 ‘선생님을 위해서’라는 포장을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자기 편의와 문제 종결을 위한 압박이었다. 고개를 숙이는 순간, 뭔가 내 안에서 작게 ‘툭’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날 이후, 교실 문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그 아이를 바라볼 때면 목구멍이 타들어갔다. 쉬는 시간에도, 웃는 얼굴 뒤로 숨겨둔 경계심이 나를 옥죄었다. 아이들을 집에 보내고 나면 숨이 턱턱 막혔다.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다른 교사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는 먼 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한지온은 그 웃음 속에 끼어들 자신이 없었다.
창밖은 한껏 봄을 품고 있었다. 햇살은 투명하게 흘러내렸고, 운동장 위 벚꽃 잎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흩날렸다. 멀리서 체육수업을 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햇빛은 따뜻했고, 바람은 차가운 완벽한 봄날이었다. 눈으로 볼 때는 따뜻하지만 실상 피부에 닿을 때는 차가운 봄, 학교는 바로 봄 같은 곳이다.
창밖으로 석양이 교실 바닥을 붉은 세상으로 물들이며 다른 세상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한지온이 책상을 정리하던 손이 멈췄다. 귀 한쪽 끝부터 간질이듯 간헐적으로 울리더니, 갑자기 잊고 있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거 봐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고개를 천천히 들자, 교실 뒷문 옆에 그 아이가 서 있었다. 6학년 때 과외를 했던 그 여자아이. 하지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아이가 지금 여기에 있을 리 없었다.
머리카락은 그때처럼 길었지만, 표정은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입꼬리는 비웃듯 올라갔고,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당신이 무슨 선생이에요?”
한 발자국 다가왔다.
“나 하나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면서… 애들 앞에서 소리나 지르고, 겁이 나 주고.”
지온은 뒷걸음질 쳤다.
“그… 그건…”
“그건, 뭐요? 아직도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나 보죠?”
“난 그저 부장님이 조언한 데로 그대로 한 것뿐이었다고, 난 처음이고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잘못될 걸 알아?”
아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핑계? 변명? 나 때도 그랬잖아요. 열 번을 말해도 못 알아듣는다고, 속으로 욕했죠? 그러다 결국 날 포기했잖아요. 항상 남 탓만 하고 실력도 없으면서 뭔가 된 것처럼. 임용도 3번이나 떨어져 놓고 겨우 붙어놓고는. ”
공기가 무거워졌다. 교실 안의 빛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아이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울렸다.
“당신은 선생이 아니에요. 그냥 무능한 어른, 동네에서 흔히 보는 나이 많은 누나, 이모.”
승리한 눈빛으로 계속 비난을 이어 갔다.
“지금도 똑같죠? 또 포기할 거잖아요. 또 도망갈 거잖아요. 이제 8살밖에 안된 저 1학년 애들도 못 가르치는.”
“..... 그렇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난 알아요. 당신은 절대 못 버텨요.”
지온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손끝이 떨렸고, 발목이 땅에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비웃듯 속삭였다.
“이제 곧, 애들이 당신을 무너뜨릴 거예요. 기다려봐요.”
순간, 석양이 완전히 사라지고, 교실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허상은 없었다. 남은 건, 고요 속에서 쿵쿵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뿐이었다.
봄빛은 충만했다. 창밖 운동장에서 튀어 오르는 아이들의 웃음은 햇살을 한 줌씩 움켜쥐어 교무실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교무실의 공기는 다르게 울렸다. 복사기가 낮게 끓는 주전자처럼 웅웅대고, 스테이플러가 종이를 찌르는 소리마저 소리 없는 비난이 찍혀 나오는 듯했다. 벚꽃 잎은 창틀에 얇게 붙었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힘없이 미끄러졌다. 봄은 완벽했지만, 이 방은 봄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지온이 교장실의 문을 열었다. 손잡이에서 떨어진 손끝이 공중에서 한 번 더 떨렸다. 그녀의 시선은 자동적으로 방의 우두머리들을 찾아갔다. 교장은 소파 등받이에 등을 똑바로 붙이고 앉아 있었고, 교감은 노트북을 닫으며 미소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오필주는 의자에 반쯤 기대 팔짱을 끼고,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로 혀를 찼다. 그 모든 움직임이, 누군가가 컵에 물을 가득 채운 뒤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동작과 닮아 있었다. 흔들림 없이, 그러나 무겁게.
바로 그 학부모와 아이가 마주 앉았다. 아이는 작은 의자의 끝에 걸터앉아 신발 앞코로 바닥을 긁었다. 학부모의 가방은 무릎 위에서 각을 이루고, 손가락이 지퍼 머리를 쥔 채 미세하게 흔들렸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교감이었다. 다정하게 포장된 문장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학부모님,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잠깐,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아이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해 보죠.”
교장이 아주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호응했다.
“네. 그럼 시작하시죠.”
모두의 시선이 한지온에게 모였다. 서서히, 그러나 빠져나갈 틈 없이. 그녀는 입술을 한 번 다물고 열었다. 소리보다 먼저 마른 숨이 나왔다.
“이번 일로 상처를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수업 중 제 말과 표정이 아이에게… 크게 느껴졌을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앞으로 아이의 마음을 더 살피겠습니다.”
말의 끝을 단단히 묶으려다 작은 떨림이 스며들었다. 한지온은 자신도 알았다. 단 하나의 문장을 말하는 데도 권총의 안전장치를 해제하는 것처럼 온 신경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학부모는 준비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 끄덕임에는 ‘듣기로는 충분했다’와 ‘그러나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가 동시에 들어 있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한 번 아래로 미끄러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다만 아이가 느낀 수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교감의 미소가 한 톤 더 부드러워졌다.
“그 부분은 저희가 함께 돕겠습니다. 선생님, 아이의 자리 배치, 발표 방식, 수업 중 개별 신호 같은 것들… 조금 조정해 볼까요?”
교장이 그 위에 얇은 종이를 한 장 더 얹듯 덧붙였다.
“한지온 선생님은 신규지만 그래도 정말 잘하고 있어요. 잘하려고 하다 보니, 아직 경험이 부족해 생활지도방법이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제 저와 교감, 1학년 부장 선생님이 함께 잘 지도조언 할 예정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필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말은 조언이었고, 어조는 채점이었다.
“제가 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지도할 때는 단호함은 필요하지만 겁을 주면 역효과라고요. 표정 관리, 톤, 간격. 신규 때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인데, 저도 잘 살필지 못하고 조금 놓쳤던 것 같네요.”
아이의 눈동자가 그 순간 한지온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계단 모서리를 손끝으로 더듬을 때처럼 조심스러운 시선이었다. 한지온은 그 조심스러움이 자신 때문에 생겼다고 느꼈다. 느끼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무게를 더했다.
“그럼… 앞으로 한 달 동안만이라도 수업 관찰을 조금 더 자주 해 주십시오. 아이가 괜찮아지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교감이 고개를 끄덕이고, 교장이 긍정의 짧은 음을 냈다. 오필주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밖의 봄은 변함없이 찬란했으나, 교무실의 벚꽃 그림자는 약간 더 회색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의 날짜도 잊을 수 없었다.
5월 15일 스승의 날.
그렇게 스승의 날 이후 학교는 표면적으로 조용해졌다. 그러나 조용함은 안정이 아니라 경계의 결과였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한지온의 어깨가 먼저 반응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의식도 없이 서로를 문질렀고, 손톱이 자신의 손톱을 훑을 때 작은 흰 가루가 떨어졌다. 준비물을 확인하는 습관은 강박으로 변했다. 수업 시작 전 같은 색 크레파스가 정확히 열두 개씩 들어 있는지 세 번을 더 셌다. 물병을 자주 들었다 놓았다. 목이 마르기 때문이 아니라, 마신다는 행위를 통해 목소리의 떨림을 감추려고.
쉬는 시간, 그녀는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아이들이 앞에서 “선생님, 이거 해요!”라고 말하면 즉각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몸은 무겁게 의자에 붙었다. 뇌에서 다리를 향해 출발한 ‘일어나’라는 신호가 허벅지에서 방향을 잃는 느낌이었다.
다른 교사들의 시선은 노골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점이 더 한지온을 신경 쓰게 하였다. 소문을 다 들었을 텐데 애써 모른척하는 사람들, 혹은 복도 모서리에서 마주치면 “힘들죠? 1학년이 원래 그래요.”, “요즘 학부모님들 예민하세요. 조심해야죠.” 같은 말들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계속 상처를 찔렀다. 어떤 말은 더 깊이 스며 통증의 윤곽을 선명하게 했다.
교감은 수업이 한창일 때 가끔 방문을 열었다. 두 번은 노크가 있었고, 네 번은 없었다. 그녀는 늘 같은 말을 남겼다.
“믿어요, 한 선생. 지금처럼만.”
그러고는 아이들 사이를 지나가며 누군가의 공책을 칭찬했다.
“아, 글씨가 참 곱다. 담임 선생님한테 잘 배우고 있네.”
나가며 한마디가 덧붙었다.
“다음엔 발표할 아이를 미리 정해서 손드는 시간을 줄여 봐요. 산만함이 줄어요.”
교장은 더 간결했다.
“수업, 잘하고 있네.” 그 뒤로 “다만…”이 따라왔다.
다만, 칠판 글씨가 조금 작다. 다만, 질문이 길다. 다만, 교실이 산만하다. 다만은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나타내는 접두사였다.
오필주는 잔소리의 미학을 알고 있었다.
“회의록 결재란은 이렇게 접으면 깔끔해요. 선 배치가 삐뚤면 눈에 거슬리거든요.”
“생활기록부 코멘트는 ‘관찰 기반’이 핵심이에요. 느낌 말고 근거. 신규들이 제일 많이 실수하는 것이 공문서인데 자꾸 시 같은 표현을 쓰는 거죠. 이건 공문서예요.”
“하루 루틴을 시간표처럼 몸에 박아 넣어야 해요. ‘좋은 선생님’은 결국 ‘좋은 기계’ 예요.”
기계라는 단어가 지나갈 때, 한지온은 자신의 심장이 약간 더 빠르게, 그러나 제멋대로 뛰는 걸 느꼈다. 수업은 어기적어기적 나아갔다. 그림책을 읽다가, 아이 한 명이 갑자기 의자에서 내려와 칠판 앞에 손도장을 찍었다. 한지온은 말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목소리가 늦게 나왔다.
“그냥.. 자리에… 앉자.”
아이는 한 번 더 손바닥을 칠판에 찍고 돌아갔다. 아이들의 웃음이 반짝였고, 그 빛이 한지온의 귀 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작은 말썽과 지연시키는 행동들이 수업마다 생겼다.
“지금부터 미술…”이라고 말하는 사이 누군가는 물통을 엎었고, 닦으려다가 종이가 찢어졌고, 그 종이를 바라보던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연쇄였다. 작은 파문들이 겹쳐 큰 원을 만드는 것처럼.
점심 줄을 설 때면 손이 떨려 호칭을 두 번씩 불렀다. “○○야… ○○야.” 아이가 뒤를 돌아보면, 웃어 주려 했으나 입꼬리가 반만 올라갔다. 식판 위 국물이 자꾸 옆칸으로 흘렀다. 식판을 들고 앉기까지가, 아침부터의 두 번째 산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이 떠난 교실. 오후 햇빛이 교무실 창을 비껴가며 바닥에 길게 드리웠다. 교실 컴퓨터 모니터 우측 하단이 조용히 깜빡였다. 알림 창이 뜬다.
발신자: 정수학 연구부장.
“안녕하세요? 한지온 선생님, 발령 축하인사 늦었습니다. ^^ 전임자께서 갑자기 휴직을 하셔서, 교원연수 업무 인수인계를 저에게 받으셔야 합니다. 혹시 지금 시간 여유 있으시면 교무실에서 잠시 뵐 수 있을까요?”
메시지를 읽는 동안, 그녀의 어깨가 천천히 굳어 갔다. 발령 첫날 얼핏 스쳐 들었던 ‘교원연수’라는 단어가 가슴팍 안쪽에서 다시 부풀었다가,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다. 해야 할 일은 늘 쌓였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는 늘 흐릿했다. ‘누가 언젠가 알려주겠지’ 하고 남겨두었던 나름의 나태함이 오늘 드디어 얼굴을 보여준 셈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나자 앉은자리의 온기가 곧장 식었다. 그녀는 메모장을 집어 들었고, 단어 둘을 적었다.
업무- 교원연수 그 옆에 괄호를 열고, _모름_이라고 덧붙였다.
복도로 나서자 아이들 웃음이 먼 곳에서 밀려왔다가 금세 얇아졌다. 교무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유리창마다 붙어 있는 ‘참된 결실을 이루는 행복한 참결초등학교’ 플래카드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마음의 흔들림일 수도.
“하, 내가 업무를 잘할 수 있을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아주 작게 물었다.
교무실 문 앞에서 선 순간 정말 우연히 발끝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칠판지우개가 걸렸다가 툭 튀었다. 쓸모없어 보이는 작은 가루가 앞장을 서듯 날리고, 그녀는 어쩐지 마음 한편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한숨을 크게 들이쉬고 노크.
“들어오세요.”
낮고 담담한 목소리. 문을 밀자 공기가 달라졌다. 정갈하게 정비된 책상, 색깔대로 분류된 파일, 날짜가 선명하게 찍힌 일정표에 여기저기 쓰여 있는 스케줄, 펜꽂이에 사정없이 꽂힌 펜들. 그 너머, 과학부장이자 연구부장인 정수학이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 시선이 정확히 그녀의 이마와 눈썹 사이쯤을 또렷하게 가리켰다.
“한지온 선생님? 맞죠? 앉으세요. 처음뵈요. 빨리 연락드렸어야 하는데. 제가 정신없이 바빠서요.”
그녀는 의자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조심스레 앉았다. 등을 등받이에 붙였다가 바로 떼었다. 너무 등을 맡기면 의자가 뒤에서 밀어내는 느낌이 싫었다. 정수학이 컴퓨터 화면을 살짝 한지온 쪽으로 돌렸다.
“교원연수 업무, 겉으로 보기엔 간단합니다. 근데 진짜 간단해요. 특별히 막 창의적으로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는 커서를 움직이며 한글문서로 작성된 첫 화면을 가리켰다. 칸이 분명한 표가 떠 있었다.
1. 교원 연수 공문 전달 및 관리
2. 전 직원 연수 시 필수 연수 확인 및 자료 수합·전달
3. 필수 연수 확인 및 전달(중복 확인 포함)
4. 자율연수비 서류 취합 및 지급 품의
글자 옆에는 작은 말풍선 아이콘이 붙어 있었고, 클릭하자 짧은 해설이 떴다. 마감일, 유의사항, 예시 파일 링크.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서대로 읽었다.
그때였다. 정수학이 손가락을 튕기며, 마치 과학 실험의 도입처럼 느닷없이 말했다.
“자, 몸풀기 퀴즈부터 갑니다.”
한지온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과를 한입 먹으면 뭐가 될까요?”
“네……?”
“파-인-애-플.”
그는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녀의 눈썹이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자동차를 톡톡 치면?”
“그건….”
“카톡.”
책상 위에 잠깐 정적이 앉았다가, 그 정적이 채 끝나기 전에 어처구니가 없어 얇은 입술이 웃음으로 살짝 움직였다. 웃음이 날뻔한 그녀는 잽싸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셋째를 던졌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비빔밥은?”
그녀는 자기 혀끝에서 먼저 정답이 튀어나오는 걸 알아채고도, 붙잡지 못했다.
“산채비빔밥?”
“정답!”
‘아 말렸다. 뭐지 이 사람?’
정답을 말한 자신도 어이가 없었고, 옆에 있는 교무보조 실무원의 시선과 미소. ‘결국 너도.’라는 정수학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공기를 한 번 쓸었다. 농담의 가루를 흩뿌리듯.
“잘하시네. 역시 잘할 줄 알았어요. 업무 듣는 태도가 너무 좋더라고요. 그럼, 해만 취재하는 사람은?”
“어... 그건.. 그건.…….”
“땡! 해리포터.”
그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가, 다시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마지막. 우주에서 사는 벌레는?”
그녀가 잠깐 생각하는 척 눈을 옆으로 굴렸다. 진짜로, 맞히려고 생각하려는 자신이 조금 우스워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지만 다시 정답을 맞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스타벅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짝짝짝 박수를 치며 활짝 웃었다. 그녀도 더는 참지 못하고, 가볍게, 그러나 확실히 웃었다. 어색함이 옅어지고, 몸 안 어딘가에서 뭉쳐 있던 것이 조금 풀렸다. 정수학이 그 틈으로 본론을 밀어 넣었다.
“좋아요. 이제 진짜 인수인계. 첫째, 공문은 받는 즉시 문서처리만 하지 말고, 공람할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해서 업무폴더를 선택해서 결제를 완료하세요. 혹시 따로 저장하게 될 파일명은 ‘YYYYMMDD_행사명_차수_담당자’. 공백 없이, 언더바. 이유는 단순해요.”
“찾기, 쉽다… 죠?”
“네. 정답! 두 번째, 필수 연수 확인은 명단을 네 색으로 나눕니다. 완료, 미완료, 증빙 누락, 예외. 색만 봐도 상태가 한눈에 들어오는 게 일하기가 편해요. 세 번째, 연수 만족도 설문 폼은 길수록 응답률이 떨어집니다. 문항 세 개 이하, 서술은 한 개만. 그 이상은 응답률도 떨어지고 늦어져요. 과학적으로도, 인문적으로도 피곤해요.”
그녀는 메모장에 빠르게 적었다. 단어가 문장이 되기 전에 핵심만 골라 넣었다. 종이 위 동그라미가 세 개 그려졌다. 공문—정리—규칙. 색—상태—한눈. 설문—짧게—핵심. 정수학이 한 손으로 컵을 집어 들며 덤덤히 덧붙였다. 그는 화면을 넘기며 실제 파일을 열어 보였다. 지난 학기의 업무 관련 서류들. 붙임 파일의 구성, 품의서, 결재선 흐름까지. 손끝은 빠르지 않았지만, 중간에 걸리는 법이 없었다.
“이건 매우 중요한 거니 별표 세 개.”
그녀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왜… 별표 세 개죠?”
“그냥, 별 세 개가 예뻐서? 그럼 하트 3개?”
그녀는 피식하고 길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이, 오늘 하루의 첫 번째 진짜 웃음이라는 걸 그녀는 알아챘다. 웃음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목젖 뒤쪽이 조금 따뜻해졌다.
“오늘 선생님이 당장 할 일은 세 가지. 첫째, 공유 드라이브 권한 확인하고 권한이 안 되어 있으면 저에게 연락하기. 그리고 들어가서 폴더 살펴보기. 둘째, 이번 달 교내 연수 있는지 확인하고 자료 접수하기. 셋째, 설문 템플릿 복제해서 헤더만 바꾸기. 이 셋만. 나머지는—”
그는 두 주먹을 가볍게 오므려 공중에서 ‘부우웅’ 소리를 냈다.
“제가 파쇄.”
그 유치한 동작에, 그녀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따라, 유치함이 무척 마음을 안심시켜 줬다. 유치한 사람 옆에서는 나도 같이 유치해지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것 같은 것. 정수학이 문서창을 닫고, 컵을 내려놓았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 선생님. 일단 인수인계. 끝! 수고하셨습니다. 박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 어때요? 학교가 좀 힘들죠? 힘들 거예요. 그리고 잘 모르는 게 당연해요.”
말의 속도가 고르게 느려졌다.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저도 그랬고 저기 앉아 있는 교감선생님도 그렇고 다 똑같아요. 남들은 다 아는 것 같아도, 사실 속으론 다 헤맵니다. 완벽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저도 교사가 너무 적성에 안 맞아서 처음에 너무 힘들었거든요. 군대도 일찍 갔다 와서 도망갈 것도 없고. 게다가..”
갑자기 목소리가 작아졌다.
“임용을 5번 만에 붙었어요. 뭐 다들 이렇게 유능한 지금의 모습에 절대 상상도 못 하고 있으시지만 하하.”
그녀의 손등이 뜨거워지고, 어깨뼈 사이로 모래주머니 하나가 벗겨지는 듯했다. 무언가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 혹시 내 미래의 모습이 이 사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마다 크고 작은 사고가 학교에는 많아요, 올해도 그럴 거예요. 학교는 늘 사건이 있고 그걸 겪을 때마다 마음이 진자처럼 흔들리고 멈추질 않거든요. 그런데 흔들리는 게 망가지는 게 아니에요. 흔들리니까 넘어지지 않고 다시 가운데로 멈추는 거죠.”
그는 어깨를 한 번 굴리고,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가볍게 돌아왔다.
“자, 마무리하기 전에 마지막 확인. 오늘 내용 이해되셨다면, 제 질문에도 답할 수 있습니다.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를 한입 먹으면?”
“파인애플.”
“자동차를 톡톡 치면?”
“이톡.”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비빔밥은?”
“산채비빔밥.”
“해만 취재하는 사람은?”
“해리포터.”
“우주에서 사는 벌레는?”
“스타벅스.”
“좋습니다. 오늘 연수 인수인계—완료.”
그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체크 표시를 그렸다. 그녀도 무심코 따라 그렸다. 허공에 그린 체크가 실제로도 어딘가에 찍혀 있을 것만 같은,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가 메모장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정수학이 불러 세웠다.
“한지온 선생님.”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오늘 하루도 참, 수고 많으셨어요.”
그는 의자를 반쯤 돌린 자세로, 담백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요—이건 꼭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선생님 한 분만을 위한 말이 아니라,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
교무실 한쪽에서 교무보조 실무원이 스테이플러를 철컥 눌렀다. 그 소리는 종이를 찍는 게 아니라 한지온의 마음에 스테이플러로 찍는 것 같았다. 정수학의 말이 떨어지지 한고 계속 기억되도록
“아이들은 완벽한 선생님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어른을 기억합니다. 같이 헤매고, 같이 배우고, 미안해 할 수도 있는 거예요. 저는 애들한테 미안하다고 잘 말해요. 미안할 수도 있죠. 우리 같이 버티는 거예요. 연금 탈 때까지만… 혼자만 가지 말고—같이 연금 타고 퇴직하자고요.”
조그만 변화들이, 덤덤하게 일어났다. 한지온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오늘… 알려주신 데로 업무를 시작해 볼게요.”
“좋아요.”
정수학은 허공에 또 하나의 체크 브이를 그렸다.
문을 나서 복도로 들어서자, 불과 한 시간 전과 같은 길인데도 발밑이 덜 미끄러웠다. 창문을 스쳐 지나간 바람이 벽에 붙은 안 내지를 살짝 흔들었다. 빛이 복도 바닥을 얇게 닦아내며 이동했다. 그녀는 핸드폰 메모장에 적었다. 공유 드라이브 구조 익힘(완). 주제 3개(진행). 템플릿 헤더(완). 그리고—웃음 1회.
작은 기록 끝에, 점 하나를 조심스레 찍었다.
그 점은 오늘의 끝이면서, 내일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호흡의 크기였다. 학교 안에서, 그리고 학교 바깥에서. 어른들이 서로의 숨이 되어, 아이들의 하루를 버텨낼 수 있게 하는—그 점. 한지온의 5월은 그렇게 가정의 달을 무사히 넘어가고 있었다.
에필로그 — 스승의 날
정수학의 교실, 오후의 햇살이 창가 책장 위에 눕듯 내려앉았다.
책상 위 컴퓨터 화면에는 나이스 접속창이 켜져 있었고, 옆자리에서는 한지온이 연필로 또박또박 메모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 근데… 저 이제 연구부장도 아니고, 정보부장도 아니고, 그냥 과학부장인 건 알고 있죠?”
정수학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며 툭 던졌다.
“그럼요.”
“그런데도 자꾸 나이스를 나한테 물어볼 거예요?”
“네.”
그 대답이 너무 단호해서, 정수학이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내가 실수한 거 같네. 작년에 너무 멋있게 보였어.”
그 웃음 뒤에 잠깐의 공백이 흘렀다. 한지온은 연필을 멈추고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사모님은 이제 괜찮으신 거죠?”
정수학은 잠시 먼 곳을 보다가 담담히 말했다.
“아, 그럼. 작년 이맘때쯤에 암 판정받았었지. 그래도 지금은 다 잘 돼서 복직도 했어. 대신 내가 주양육자가 됐지만. 아들 둘 등하원 시키느라 진짜 죽겠다.”
“그러니까요. 그때 저 위로할 게 아니라, 본인을 더 챙겼어야죠.”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농담처럼 말했다.
“알고 있었구나. 내가 위로한 거 하하. 근데 그때 차라리 내가 암 판정을 받았어야…”
“부장님, 쉿. 입조심하세요.”
짧은 웃음이 두 사람 사이를 건넜다. 정수학이 시계를 힐끔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네, 한 선생님 이제 교실 가세요. 저 아들들 데리러 가야 돼요. 내 육아 시간!”
“네, 얼른 가세요. 감사했어요.”
“말로만 감사? 뭐라도 하나 주고. 빨리 나가시오.”
그의 장난기 어린 손짓에 한지온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교실로 향했다. 복도 끝 창문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교실 문을 열자, 책상 위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작년 1학년이었던 아이들이 접어 둔 색종이 카네이션과 삐뚤빼뚤한 글씨로 가득한 작은 손편지였다. ‘선생님, 항상 웃게 해 줘서 고마워요’라는 문장이 가운데 크게 적혀 있었다.
한지온은 그것을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종이의 얇은 결이 전해지는 그 순간, 마음속 깊은 곳이 잔잔하게 데워졌다.
창가 쪽 달력을 바라보니, 굵은 붉은 글씨가 시선을 붙잡았다.
2026년 5월 15일 — 스승의 날.
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바쁜 하루의 소음 속에서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오늘만큼은 선물처럼 느껴졌다.
3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