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ol life1 제 9화 공개수업(하편)

부제: 슬기로운 학교 생활, 본격 초딩 교사 성장 로망 소설

by Red eye

S6. 불타는 교실

저녁 햇살이 교실 벽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한지온의 교실, 5학년 2반은 이미 하루의 수업을 마친 후였다. 아이들이 남기고 간 연필 부스러기, 벽에 붙은 학습 포스터, 누렇게 빛바랜 공지문이 한가롭게 매달려 있었다. 천장의 형광등은 절반만 켜져 있었고, 조용히 돌아가는 선풍기가 덜그럭거리는 리듬으로 고요를 깨뜨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한지온은 홀로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세종대왕과 한글 창제’라는 PPT 제목이 떠 있었다. 슬라이드마다 이미지 배치와 자막 정렬을 수없이 바꿔봤지만, 마음은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마우스 클릭 소리만이 사각사각, 불안한 리듬으로 이어졌다.

“내가 왜 저 사람한테 신경을 쓰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모니터 속 슬라이드의 글자들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김도진이 감정 없는 얼굴로 말하던 모습, 그리고 그 옆에서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을 섞던 안수연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둘 사이의 짧은 거리, 아무렇지 않은 말투, 그 모든 게 이상하게 신경을 긁었다.

‘무슨 상관이야.’


스스로 다그쳤다. 그녀는 커서를 움직여 글자 크기를 바꾸며 집중하려 했지만, 마음은 자꾸 과학실의 기억으로 흘러갔다. 며칠 전, 정수학이 조현병을 앓던 침입자를 잡아두고 자신을 먼저 문밖으로 내보내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느꼈던 공포와 동시에 밀려온 안도감.

“괜찮아요, 나가세요.”

그 한마디에 묘하게 가슴이 떨렸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을 지켜주는 듯한 그 말의 온도가 오래 남았다.

‘그나저나 그 아줌마는…’

한지온은 눈썹을 찌푸렸다.

‘자기가 경력으로 밀어붙이겠다는 거잖아. 그래, 내일 회의 때는 완벽하게 준비해서 확 눌러주겠어.’

노트북 옆에는 색색의 포스트잇이 나열되어 있었다.


“탐구 활동 – 협동 학습 구조 비교 / 발표 시간 조정 / 학부모 관찰 포인트.”

적어놓은 문장들이 교사로서의 완벽주의와 경쟁심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또 떠올랐다. 오늘 오후, 김도진과 안수연이 단둘이 교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 문틈으로 스쳐 들린 낮은 목소리. 왜 그렇게 거슬렸는지, 한지온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대체 뭔데? 전 부인이면 그냥 전 부인이지. 왜 거기서 챙겨주는 척을 해. 뭐라도 남아 있는 거야?’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무심히 펜을 집어 들었지만, 펜 끝이 종이를 긁으며 심술나게 찢어졌다. 찰칵. 선풍기가 멈췄다. 고요가 갑자기 커졌다. 그때였다.

똑, 똑, 똑—

문이 두드려졌다.

“지온 선생님. 뭐해요? 아직 안 갔네요?”

익숙한 목소리. 강아름이었다. 한지온은 노트북을 덮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 학부모 공개수업 자료 준비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열심히요?”

강아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여름 합숙 연수 때도 이렇게는 안 하셨던 것 같은데요?”

“나도 살면서 이렇게 열의 가지고 준비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한지온은 말끝에 살짝 한숨을 섞었다. 의자에 기대 앉은 그녀의 어깨에는 묘한 힘이 들어 있었다. 강아름이 의자에 걸터앉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어때요?”

“별로예요.”

“…네?”

강아름이 당황했다.

“근데 뭐가 어떤 건지 물어본 거예요?”

한지온이 되묻자, 강아름은 어리둥절했다.


“나도 그거 묻고 싶었는데요? 뭐가 별로라는 거예요? 내가 뭐 물어본 줄 알고?”

그 순간, 교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낯선 기운이 들어왔다.

“제가 별론가 보네요?”


차분한 목소리. 문가에는 안수연이 서 있었다. 복도 불빛이 그녀의 어깨 너머로 길게 비쳤다. 그녀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있었다. 잔 위로 김이 은근히 피어오르며, 마치 그 존재 자체가 공간의 중심을 점령하는 듯했다.

“문이 열려 있어서 들렸네요.”

그녀는 미소를 띠며 들어왔다. 강아름이 허둥지둥 일어섰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3월에 발령받은 6학년 2반 강아름이에요.”

“네. 어제 발령 받은 4반 안수연이에요.”

그녀가 조용히 대답했다.

“뭐, 메신저로 제 이야기는 많이 퍼진 것 같아서 굳이 자세히 말은 안 할게요.”


그 말에 강아름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 네, 네…”

한지온은 팔짱을 끼며 조용히 말했다.

“아직 안 가셨네요?”

“중간 발령이라 학급 정리할 게 많네요. 업무도 그렇고요.”

안수연은 천천히 교실을 둘러봤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학부모 공개수업…”

강아름이 입을 열려던 순간, 한지온의 눈빛이 번쩍였다.

“—앗!”

그녀는 순식간에 강아름의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강아름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냥 수업 준비예요.”

한지온의 말은 냉정하고 또렷했다. 안수연은 천천히 웃었다.

“우와, 대단하시네요. 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공개수업 준비하시는 줄 알고 놀랐어요. 정해지면 하세요. 힘 빼지 마시고요. 어떻게 결정될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잔 위로 김이 다시 피어올랐다.

“저는 뭐, 대세를 따를게요. 후배님께서 준비하시는 대로 묻어서 갈까 하기도 해요.”

한지온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저야말로 4반 선생님이 하시는 대로 따라가려고 생각 중이었네요.”

순간, 공기 중의 온도가 몇 도쯤 떨어졌다. 형광등 불빛이 깜박였다. 강아름은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웃는 척했지만, 손끝이 떨렸다.

‘괜히 왔다… 진짜 괜히 왔다…’

그리고 그 순간,

똑똑똑—

또 한 번의 노크 소리. 천국의 종소리처럼 들렸다.

“다 퇴근 안 하고 뭐 해요?”

남도윤이었다. 문을 열자 그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앗, 안녕하세요? 6학년 4반 담임 남도윤이라고 합니다. 처음… 아니 두 번? 아니…”

그는 말꼬리를 잇지 못한 채 웃음을 흘렸다. 안수연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반가워요. 다들 그러면 즐거운 퇴근 하세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지온을 향해 미소를 남기고 교실을 나섰다. 커피잔의 향이 남아,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 천천히 흘렀다. 문이 닫히는 소리.

찰칵.

그리고, 한지온의 심장 소리가 또렷이 울렸다. 그녀의 손등 위로 땀 한 줄이 흘렀다. 남도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퇴근할게요.”

강아름이 눈으로 ‘살려줘’ 하는 듯 신호를 보내며 따라 나갔다. 문이 닫히자, 교실엔 한지온 혼자 남았다. 책상 위 노트북의 화면이 다시 켜져 있었다. 세종대왕의 초상화가 화면 한가운데 떠 있었다. 그 초상화의 눈빛이,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래, 내일은 내가 세종대왕이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크게 웃었다. 누가들어도 불안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묘한 결심이 숨어 있었다. 창밖에는 붉은 석양이 번지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의 철봉대가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가 마치 두 여자의 긴 싸움의 예고처럼, 천천히 교실 바닥을 덮어가고 있었다.


S7. 칠판 앞의 뜨거운 감자


다음 날 오후, 다시 5학년 연구실. 두 번째 수업 협의회.

벽시계는 눈치 없는 중재자처럼 정확한 리듬으로 ‘틱—틱—틱’을 찍어댔고, 에어컨은 사람들의 체온과 말의 온도를 동등하게 냉각하려는 듯 냉소적인 바람을 뿜었다. 테이블 위에는 형광펜과 포스트잇, 작은 물병, 이름표, 그리고 누군가 아침에 흘리고 닦은 커피의 희미한 타원형 자국. 그 타원은, 오늘 여기서 벌어질 ‘둥글게 앉아 네모난 소리를 하는’ 회의의 상징 같았다.

김도진은 메모지 모서리를 90도로 맞추며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도 모으지 않았다. 그는 늘 그랬다. 표정의 플랫폼을 폐쇄한 얼굴. 감정 열차는 이 역에 정차하지 않음을 공지합니다—라는 전광판이 이마에 달린 듯했다.

“준비는 잘 해오신 것 같으니. 다시 협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일단 사회과 세종대왕의 업적에 관한 차시는 정해진 걸로 하시죠. 다만 수업 방법이나 학생 활동에 초점을 맞춰서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윤리부장님 먼저 말씀해주세요.”

고철진은 의자 등받이에 과장되게 기대며 배꼽을 살짝 내밀었다. 눈빛은 평화를 외치고 몸짓은 쇼타임을 선언했다. 그는 말 없는 캐스터였다.

“아 저는 일단 모둠별 조사활동을 하고 발표를 하고, 마무리로 골든벨 활동으로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학부모님들도 계시고 우리 아이가 즐겁게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거 같아서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골든벨 활동은 아이들이 정말 즐겁게 참여하니깐요.”

김도진은 턱을 2밀리미터쯤 끄덕였다.

“네, 그렇죠. 학부모 공개 수업 단골 활동이죠.”

“뭐 단골까지야. 하하.”

고철진의 웃음은 낡은 벨소리처럼 방 안을 한 바퀴 돌다 조용히 천장에 붙었다.

“두분은 의견 없으신가요?”

김도진의 시선이 안수연과 한지온을 향해, 그러나 닿지는 않게, 마치 비행금지구역의 외곽선을 따라가듯 스쳤다. 안수연과 한지온은 서로를 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카드 테이블의 마지막 라운드—둘은 패를 오므린 채 손끝으로만 허공의 습도를 재고 있었다. 어느 쪽이 먼저 패를 보이느냐, 오늘의 승패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저야 뭐 따라 가야죠. 특별히 제가 뭘..”


안수연의 말끝은 유연했고, 말줄임표는 목 없는 미소처럼 테이블 위에 눕혀졌다.

“인물학습으로 먼저 동기유발을 합니다.”

한지온이 말의 손잡이를 낚아채듯 끊었다. 얇은 칼날이 공기를 반으로 접었다. 순간, 안수연의 볼에 기계적으로 혈색이 켜졌다가 사라졌다. 한쪽 입꼬리가 밀리미터 단위로 올라가며 ‘감정은 관리되었음’을 신고했다.

“네 들어보죠.”

김도진의 중립은 여전히 고급 합금. 바람도 스크래치를 못 낸다. 그 한마디에 한지온의 심장이 미세하게 치솟았고, 안수연은 고개만 아주 조금 꺾어 김도진을 보았다. 어이없음과 허탈, 그리고 목구멍 깊숙이 감춰 둔 웃음—표정은 0.5초 만에 원상복구.

한지온은 의도적으로 숨을 복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오늘의 무기는 ‘준비’였다.

“세종대왕과의 가상 인물 인터뷰를 먼저 시작을 합니다. 동기유발이죠. 학생들중에 먼저 세종대왕역을 할 친구를 즉석에서 뽑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이 왕모인 익선관을 씌어주는 거죠.”

그녀의 손이 테이블 아래 상자 속으로 사라졌다가, 마치 마술사의 비둘기처럼 검은 펠트 익선관을 번쩍 꺼냈다. 날개가 형광등의 빛을 흘긋 훔치며 번쩍였다. DIY의 끈기와 입시의 근성이 들어찬 모자.

“이거 뭐야? 이거 만든거야?”

고철진은 의자 바퀴를 밀어 모자 앞으로 굴러왔다. 호기심은 성인 남자의 가장 순수한 장난감이다.

“맞아요. 제가 간단하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어쨌든 이 익선관을 쓴 학생들과 이걸 본 학생들은 좀더 실감나게 역할 놀이를 할 것이에요.”


“그런데 동기유발로 하게 되면 아이들이 인터뷰가 원활하게 잘 될까요? 아마도 말도 정확하지 않은 대답을 하게 될 텐데요?”

고철진이 심판처럼 두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맞아. 조사도 하기 전이라 엉터리로 대답하지 않을까요?”

형사와 보조. 안수연의 질문은 지문 채취처럼 침착했고, 고철진의 맞장구는 현장 보존 테이프처럼 노란 선을 그었다.

“맞아요. 그 점이 중요해요.”

한지온은 즉시 반격했다.

“부족한 부분을 보이는 것이죠. 이걸로 학습 목표를 끌고 오는 겁니다. 우리 세종대왕님이 기억을 잃었나봐요. 우리 세종대왕님의 기억을 찾아 줍시다. 모두가 세종대왕이 되어 자신의 기억을 찾는 활동, ‘나의 업적을 찾아서’ 가 이번 활동명, 그리고 학습 목표는 바로 ‘세종대왕의 업적을 조사하여 인터뷰를 할 수 있다.’입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기가 약간 팽창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풍선을 입 안에서 불어 올리는 것처럼.

“오! 대단한데, 아주 매끄럽고 휼륭한데?”

고철진의 감탄은 사이다와 껌 사이 어딘가의 청량감으로 방을 한 바퀴 돌았다.

“너무 고전적이기도 한데, 나쁘지는 않네요. 그런데..”

안수연이 컵을 내려놓는 소리. 동그란 물자국이 테이블 위에 또 하나 생긴다. 완벽한 원형의 냉소.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지요?”

한지온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던졌다.

“그래서 동기유발시에 질문카드를 미리 준비해놓았고요. 랜덤 룰렛 어플을 사용하여 각 영역에 해당하는 질문카드 수 만큼 5명의 아이들만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음. 준비 잘하셨네요?”

안수연의 칭찬은 유통기한 하루짜리 냅킨 같았다. 쓰면 깨끗해 보이지만 물 닿으면 바로 흐트러지는.

“그래도 동기유발에서는 5분 정도 내외가 좋습니다. 질문 수를 조금 줄이면 좋겠네요.”

김도진은 시간을 칼처럼 얇게 슬라이스했다.

“네, 그렇게 하지요.”

공기의 핀 조명이 자연스레 한지온에게 쏠렸다. ‘한지온 수업 설명회’—이 연구실의 임시 간판이 소리 없이 설치되었다.

“그럼 본격적인 수업 전개 활동은 어떻게 진행될까요?”

안수연의 목소리는 이번엔 더 맑았다. 제안의 껍질을 쓴 검증.

“네, 그래서 이렇게 영역별 지도를 준비했습니다. 화면을 봐주세요.”

프로젝터가 ‘후—’ 하고 숨을 쉬었다. 먼지들이 수직 낙하를 포기하고 빛줄기 속에서 유영했다.

“이렇게 세종대왕의 업적을 인포그라픽으로 도식화하여 6개의 영역으로 나눠 보았습니다. 훈민정음, 과학기술, 유교정치, 문화사업, 법전 정비, 사회정책 으로요. 모둠별로 한가지의 영역으로 정하여 발표자료를 짧게 준비하고 역할 놀이를 통하여 발표를 해보는 것입니다.”

“조사하여 발표하는 형태로 마무리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 같은데.”

안수연의 논리는 유선 마이크처럼 선명했다. 잡음 없이 의심만 증폭되는.

“각 모둠이 4명 기준으로 업적을 알려줄 수 있는 짧은 역할극을 준비하는 것이에요.”

한지온은 또 한 번 끊었다. 오늘 그녀의 문장은 신호등의 노랑을 모르는 빨강과 초록뿐이었다. 안수연의 입술이 1밀리미터 아래로 휘었다. 감정이라기보다 미세한 수평 조정.

“윤리부장님 이것 좀 받아주세요.”

한지온은 상자에서 ‘훈민정음’이라 적힌 얇은 모형 책자를 꺼내 들고, 익선관을 고철진의 정수리에 ‘딱’ 씌웠다. 왕의 탄생은 생각보다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일어났다.

“전하, 백성들이 글을 읽지 못하여 너무나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하옵니다.”

배우 1의 대사 낭독. 그녀는 손가락 두 개로 김도진을 향해 ‘큐’를 보냈다. 바늘같이 얇은 신호.

김도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한 조각 꺼내 입가에 붙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백성들이 쉽게 쓸 수 있는 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즉흥극의 공은 고철진에게 넘어갔다.

한지온은 과장된 ‘큐’ 사인을 날렸다. 감독의 손짓.

“에헴, 그럼 내가 백성들이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우리 조선의 글을 만들어야 겠다. 어서 집현전의 학자들을 모아서 글을 만들도록 하여라.”

고철진은 자신의 존재가 오늘 하루 ‘왕’이라는 사실을 단숨에 받아들였다. 표정은 과잉, 억양은 감초, 마음은 놀이공원.

“이렇게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 위해 만든 글자가 ‘훈민정음’이라고 합니다.”

한지온의 마무리는 매끈했다. 스테이플러가 종이 모서리를 정확히 물어 잠그듯. 고철진은 아이들처럼 박수를 쳤다.

“이야 재미있네, 재미있어. 내가 왕이 된 것 같으네.”

박수는 조금 과했고, 즐거움은 약간 솔직했다.

“그러네요. 짧고 좋네요.”

김도진은 칭찬을 봉투째로 건네되, 봉투는 봉인된 채였다.

“그래도 그 사이에 무임승차하는 친구들이 있지 않을까요?”


안수연. 컵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는 소리 ‘톡’. 그 한 음절이 ‘공정’이라는 단어의 그림자로 길게 늘어졌다.

“개별 조사 개별 발표를 하게 되면 학부모 공개수업에서 오히려 더 부족한 모습이 비춰지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지온의 목소리는 딱딱해졌다. 유리잔의 날카로운 테두리처럼 빛을 반사하며.

공기는 일제히 앉았다. 의자에 앉아 있지 않은 공기까지도.

“그래도 정확하게 내용을 조사하는 수업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네요.”

안수연이 말했다. 정확은 그녀의 세례명이었다.

“네 조사 수업이 아니라 인물 수업이라서요.”

한지온은 어휘로 금을 그었다. 지도 위에 새로운 경계선, 도망갈 곳 없는.

“힘빼지 마시라고 했는데, 많이 빼신거 같아요.”

안수연의 말은 솜사탕처럼 부풀었다가, 안쪽에서 은밀히 끈적했다.

“힘을 뺀게 아니라 힘을 많이 준거죠.”

한지온은 웃지 않았다. 웃음은 지금, 낭비였다.

“왜들 그래, 지금 수업 좋은데 왜, 4반 선생님 그냥 따라 간다며.”

고철진이 팔을 벌렸다. 한 손엔 평화, 다른 손엔 구경.

“따라갈 길이 있고 안 따라갈 길도 있죠.”

안수연의 어조는 네비게이션이었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를 예의 바르게 말해주는 종류.

“이정표 확실하면 따라 가시죠?”

한지온은 이정표를 만들기 위해 오늘 하루 종일 못 박은 사람의 손등을 내밀었다.

“선생님들 그만하시죠. 그럼. 이렇게 하시죠? 두분의 수업을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김도진은 테이블 위 보이지 않는 가위로 공기를 ‘쓱’ 잘랐다. 침묵이 사각이 났다.

“?”

안수연, 한지온의 눈동자가 동시에 동그랗게 말려 올라갔다. 놀람의 표준화.


“가상모의 수업 아시죠? 학생들이 없는 상황에서 하는 모의 수업을 보여주시고 그 걸 보고 선택하겠습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이야?”

고철진의 어조는 ‘평화주의자의 오후’를 잃어버린 어린이의 항의처럼 높아졌다.

“두 분은 그렇게 까지 할 일인 거 같아서요.”

김도진의 문장은 서늘했다. 온도는 낮고 타당성은 높았다. 어른의 방식.

“아니, 무슨..”

안수연의 반문이 막 고개를 들려는 순간,

“네, 하겠습니다.”

한지온이 또 잘랐다. 이번에는 전기톱 소리. 두둥—라는 효과음이 공기 중 어딘가에서 재생되었다. 익선관의 날개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안수연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말하자면 불량한 미소, 그러나 규정 위반은 아니다.

“그러죠. 저도 교직생활하면서 아주 기억에 남겠네요.”

“그러면 시간 장소는 제가 두분께 메시지 드리죠. 잘 준비해주세요.”

김도진이 회의록을 덮었다. 덮개가 내려오자 방 안도 함께 덮였다. 에어컨 바람이 마지막으로 세 번 흔들리고 고요가 자리에 앉았다.

벽시계가 다시 분침을 밀었다. ‘틱’. 바깥 복도에서 청소 도구함의 바퀴가 천천히 굴러왔다 멀어졌다. 어쩌면 방금 이 방에서 굴러간 것은 도구함이 아니라, 누군가의 체면, 누군가의 야심, 누군가의 오기로 만든 둥근 바퀴였을지도 모른다. 그 바퀴는 소리 없이 회전했고, 다음 장면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학부모 공개수업을 위한 가상모의 수업 대결 —이 학교가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대. 오늘의 뜨거운 감자는 손에 들고 있지도 않은데, 다들 조금씩 데인 표정이었다.

웃긴 건, 아무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감자는, 뜨거울수록 더 세게 쥐게 되는 법이니까. 그리고, 뜨겁다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S8 . 수업전야


학교의 오후는 이상하리만치 눅눅했다.

누군가는 방과후 수업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집으로 달려가며, 또 누군가는 싸움의 준비를 한다. 그날, 5학년 복도에는 세 번째 부류의 공기가 흘렀다. 형광등은 미세하게 깜박였고, 바닥의 먼지는 누군가의 감정처럼 구석에 몰려 있었다. 전운의 냄새는 향수처럼 희미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한지온의 교실

칠판 위엔 ‘가상 모의 수업 준비’라는 문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분필 가루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반짝임은 희망보다는 피로에 가까웠다.

책상 앞에는 세 명의 조력자―남도윤, 강아름, 고철진―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그 자리에 있었다. 누군가는 의무로, 누군가는 호기심으로, 누군가는 심심해서.

“제가 맛있는 식사 꼭 대접할게요. 잘 부탁드려요.”

한지온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치아 사이로 새어 나온 호흡엔 피로와 승부욕이 뒤섞여 있었다. 노트북 화면은 전투기의 조종석처럼 반짝였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요?”

강아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세상과 이미 절충한 교사였다. 하지만 이 교실의 공기 속에서는 그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저도 제 수업 준비해야 하는데요. 이건 좀…”

남도윤은 시계를 흘끗 봤다. 말은 합리적이었으나 표정은 지나치게 멀쩡했다. 그는 언제나 ‘참여하되, 빠져나갈 타이밍’을 계산하는 인간이었다.

“난 한 선생님 편이야. 파이팅이야.”

고철진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렸다. 장군처럼, 그러나 지나치게 흥겨웠다. 강아름과 남도윤이 동시에 그를 노려보자 그는 눈치를 챘다.


“이혼 남으로서 전부인은 별로라서… 지금의 사랑이…”

그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말미의 ‘사랑이’는 천장으로 증발했다. 한지온은 눈썹을 아주 살짝 치켜올렸다.

“시작할게요. 자, 여러분. 오늘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네.”

세 사람의 목소리에는 체념과 공포, 그리고 미묘한 동정심이 섞여 있었다.

안수연의 교실

복도 반대편, 또 다른 전장이 열리고 있었다. 안수연의 교실은 깔끔했다. 아니, 지나치게 깔끔했다. 벽에 붙은 포스터는 각이 정확했고, 커튼은 군대 침대 시트처럼 팽팽했다. 그 완벽함은 불안을 감추기 위한 갑옷 같았다.

교탁 앞에는 정수학, 독고철, 강인봉―세 명의 ‘참견의 신들’이 앉아 있었다.

“여러분이 이렇게 자진해서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후배를 잘 가르쳐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준비를 하네요.”

안수연은 목소리 끝에 의무감과 도덕성을 포장지처럼 붙였다. 그녀의 미소는 교장실 사진 속 표정만큼 완벽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나 우리 애기 데리러 가야 하는데, 육아시간이야.”

정수학은 팔짱을 낀 채, 반쯤 일어서 있었다. 의자는 이미 뒤로 밀려 있었고, 가방끈은 어깨에 걸려 있었다.

“바로 옆 건물이라 3분이면 돼요. 집은 5분. 합이 8분.”

독고철이 무심히 시계를 봤다. 숫자를 계산하는 얼굴은 산수보다 진지했다.

“애 둘이야. 큰애도 있어.”

“16분.”

“뭐?”

“합이 16분.”

그들의 대화는 의미 없는 수학문제처럼 공중을 맴돌았다.


“수학 오빠, 30분만 부탁드려요.”

안수연의 목소리는 교무실용 마이크처럼 정제되어 있었다. ‘오빠’라는 단어는 불안을 잠시 포장하는 리본이 되었다.

정수학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듣네, 그 말.”

그때, 강인봉이 손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안 선생님, 저는 왜… 여기 있을까요?”

“교무부장이시잖아요. 선생님들 전체를 항상 잘 돌봐주시니까요.”

그녀의 말은 칭찬처럼 들렸으나 사실상 통보였다. 강인봉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의 눈빛은 ‘감정노동’이라는 단어를 선명히 되새기고 있었다.

“이렇게 자진해서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럼 시작할게요.”

안수연은 PPT 리모컨을 쥐었다. 그 리모컨은 손에 꼭 맞는, 작은 권력이었다.

두 개의 전장

오후 2시 45분. 두 교실은 서로 다른 공간이었지만, 묘하게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심판이 “준비—시작”을 외친 듯했다.

한쪽에선 PPT가 먹통이 됐다. 한지온은 리모컨을 두드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왜 지금이야.’

노트북 화면이 꺼졌다 켜졌다.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번쩍였다.

반대편 교실, 안수연은 출력된 활동지를 펼쳤다. 그러나 페이지 하단은 공백이었다. 인쇄가 반쯤 날아간 것이다.

“하단이 백지네. 철학적이야.”

정수학이 말했다.

그의 말투는 농담이었지만,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래도 구조는 완벽하네요. 내용이 없을 뿐이지.”

독고철의 말에 안수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완벽주의는 지금, 프린터에 의해 모욕당하고 있었다.

강인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전쟁은 보급이 중요하죠.”

그의 발소리는 기묘하게 우아했다.

한지온의 교실에서는 PPT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고철진이 학생 역할을 헷갈렸다.


“전하, 백성들이 글을 읽지 못하여… 그게 왜 문제죠?”

“그건 세종대왕의 업적이…”

“그럼 제가 반성문을 쓰면 되나요?”

그의 즉흥 연기력은 탁월했지만, 방향은 엉뚱했다.

강아름이 중얼거렸다.

“이거 그냥 예능 아니에요?”

남도윤은 팔짱을 끼고 휘파람을 불었다.

“예능이 교양보다 낫죠. 적어도 시청률은 나오잖아요.”

한지온은 웃지 않았다. 그녀의 미간엔 얇은 금이 그어졌다. 그 금은 자존심의 균열이었다.

안수연의 교실에서는 프린터가 삐걱거렸다.

‘용지가 걸렸습니다.’

기계음이 사람보다 인간적이었다. 정수학이 말했다.

“이건 프린터의 저항이야. 시스템의 반란.”

그는 철학자처럼, 퇴근을 기다리는 노동자처럼 말했다.

“3분이면 고칠 수 있어요.”

독고철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5분 줄게요.”

“그럼 합이 8분.”

“큰애까지 치면 16분.”


강인봉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농담도 알고리즘이 됐네.”

안수연은 PPT를 띄웠다.

‘시스템 오류.’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완벽주의가 무너질 때 나는 진동이었다.

교차의 순간

두 교실은 다른 장소였으나 같은 불빛 아래 있었다. 한쪽에서는 교사가 PPT에 몸을 숙이고, 다른 쪽에서는 인쇄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둘 다 허공을 향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이게 왜 지금 이래!”


그 순간, 복도를 가로지르는 메아리가 서로의 교실 벽에 부딪혔다.

이어, 스피커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천천히 TV로 향했다. 푸른 화면에 흰 글자가 떴다.

� 가상 모의 수업 안내

장소: 5-1반 교실

시간: 내일 15:00~

심사: 1, 2, 3, 4학년 부장 및 교감 선생님

공기가 멈췄다.

지금 시간은 오후 2시 58분. 창가로 석양의 주황빛이 들어와, 커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누군가의 심장을 닮은 파동이었다. 이제 그들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전투 전, 갑옷의 끈을 매는 장수들처럼. 복도 어딘가에서 구두굽 소리가 울렸다.

순식간에 하루가 지나버리고, 두 교실의 시계가 동시에 ‘3시’를 가리켰다. 폭풍은, 정확히 시간표에 맞춰 도착했다. “모든 전쟁은 시작되기 전이 가장 조용하다.” 그리고, 학교의 전쟁은 언제나 정시에 시작된다.


S9. 수업자

같은 교과, 같은 단원, 같은 차시, 같은 수업 목표. 하나의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수백 갈래다. 오늘 5-1 교실은 그 진실을 증명하기 위한 무대이다. 교사는 학생의 발달 단계, 학습 수준, 기질, 날씨, 급우 사이의 미묘한 불화까지 포함해 변수를 헤아린다. 최적의 경로를 설계하는 그 행위가 곧 전문성이다. “왜 교사마다 수업이 다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 자체가 질문에 대한 답 자체가 된다. 교실마다 아이들이 다르고 함께하는 교사가 다른 이상, 교사의 수업은 언제나 달라야 옳다.

안수연, 경력 20년. 컨설팅 장학과 수업연구대회, 각종 연구서 발간으로 조밀하게 채운 20·30대. 치열함은 그녀의 장점이자 결핍이었다. 전문성은 빛났고, 사적 삶은 균열났다. 그녀는 수업의 작은 조각까지도 설계하는 치밀한 교사이다.

한지온, 경력 2년. 입학 재수, 임용 재수, 첫해 담임교체 민원, 며칠 전엔 불청객 난입까지. 그리고 오늘, 마음이 기우는 남자의 ‘전 부인’과 같은 무대에 선다. 그녀는 스스로를 말한다. “수업으로 승부한다.”

문이 열리고 교감 한지수가 먼저 들어섰다. 뒤이어 연구부장과 1·2·3학년 부장들이 차례로 자리를 메웠다. 교실의 공기가 고요해졌다. 한지온과 안수연이 동시에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김도진은 교탁 옆에서 간결하게 입을 열었다.

“바쁘신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교감선생님, 그리고 부장님들. 저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진행은 연구부장님께 부탁드립니다.”

전수현 연구부장이 미소를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올렸다.

“오늘은 5학년 공개수업을 앞둔 가상 모의 수업입니다. 승패를 가르는 경쟁이 아니라 서로의 수업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먼저 교감선생님 말씀 듣겠습니다.”

교감은 펜을 곧게 세웠다. 말투엔 오래된 직업의 품위가 배어 있었다.

“서른 여섯 해 교직생활을 하며 이렇게 치열하게 공개수업을 준비하는 학교는 드물었습니다. 과하다는 말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이 과정 자체가 연찬이고, 교사의 전문성이 훈련으로 빛이 나는 순간입니다. 준비하신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오늘 오랜만에 수업의 열정이 타오르네요.”

전수현이 진행을 이었다.

“두 분, 각 10분입니다. 학생은 없지만 있는 것처럼. 시연 내용은 금요일 공개수업 방향 결정의 근거가 됩니다. 먼저 한지온 선생님.”

한지온 ― 강렬한 색채의 수업

한지온은 한 박자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치아로 조금 입술을 눌렀다. 눈을 뜬 순간, 빈 교실은 아이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그녀가 매일 머릿속으로 리허설하던 장면이 무대 위에서 ‘실재’처럼 서 있었다.

“여러분, 오늘 수업 시작해 보겠습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음 높고, 에너지는 두 배였다. 그녀의 손이 교탁 아래 상자로 미끄러졌다가, 검은 펠트의 ‘익선관’을 꺼내 들었다. 움직임은 작지만 빠르고, 설명은 짧지만 명확했다.

동기유발—익선관. 집중 유도—룰렛 앱. 참여 보장—질문카드.

“세종대왕님이 기억을 잃으셨어요. 우리가 찾아드릴 거예요.”

칠판엔 굵기가 1.2mm로 늘어진 분필 선. ‘기억 찾기’라는 단어가 박힌다. 그녀는 태블릿 화면을 탭하며 모둠 배정 앱을 띄웠다. 화면 속 가상의 명단이 ‘딸깍’ 소리를 내며 섞였다.

손의 떨림은 없었다. 대신 어깨가 아주 미세한 진동으로 템포를 탔다. 불안이 아니라 박자였다.

“자, 룰렛—돌아갑니다.”

스마트보드 위 원형이 회전하고, 학생의 이름에 바늘이 멈췄다.

“좋아요. 왕을 맡을 친구 한 명—즉석에서!”

그녀는 눈의 초점을 공간 어딘가에 고정했다. 없는 아이의 손이 올라간 것처럼 시선이 움직였다. 익선관을 허공에 ‘씌워’ 주고, 질문카드 다섯 장을 탁탁탁, 테이블 위로 쳐냈다. 카드는 실제였고, 학생은 가상이었다. 그러나 리듬은 진짜였다.

“첫 질문. ‘왜 그 시대에 새로운 문자가 필요했나요?’”

그녀는 기다렸다. ‘웨이트 타임(Wait-time)’—3초. 4초. 5초. 손목시계의 초침이 내는 무음의 진동만이 그녀의 귀에 크게 들렸다.

“맞아요. 누구나 읽고 쓰도록.”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허공의 아이에게 피드백을 준다. 손바닥이 공기 위에서 ‘좋아’를 그렸다.

“두 번째 질문. ‘새 문자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사람은 없었을까요?’”

관찰자들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교감은 펜을 단단히 쥔 채 빈 칸을 남겼다—기록보다 현장을 보고 있다는 신호. 한지온은 곧바로 모둠별 상황극으로 넘어갔다. 4인 구성, 역할은 ‘왕—학자—양민—양반’.

“각자 입장으로 30초만! 핵심만!”

말끝이 칼처럼 선명했다. 김도진 없이도 그녀는 시간을 능숙히 조절했다.

드릴다운(세부화)—“양반 입장에선 왜 반대했을까요? 두 단어만.”

스캐폴딩(발판 마련)—“왕의 입장에서 한 문장으로 마무리.”

익선관을 쓴 ‘왕’ 역할도 본이 하면서 실제 팔꿈치를 과장되게 구부리고 읍소하는 양민의 대사를 흉내 냈다. 심사 테이블에서 미묘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지온은 웃지 않았다.

“좋아요. 지금은 연기보다 생각이 더 중요합니다. ‘왜’가 들렸어요. 다음 모둠.”

점검은 간단명료했다.

즉시 피드백—“좋아. 근거가 하나 더 필요해.”

인터벌—“다음 모둠은 목소리만 키워요.”

형성평가—“포스트잇에 ‘오늘 배운 것 한 줄’.”

손등에 땀이 맺혔다. 셔츠 소매를 한 번 내리고, 시계를 한 번 눌렀다. 허공의 아이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창밖에서 강아름과 남도윤, 고철진이 엄지를 들어 올렸다—소리 없는 기립 박수.

한지온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며 고개를 숙였다. 몸을 펴 올릴 때, 척추의 곡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안도의 떨림인지, 다음 주자의 입장을 준비하는 긴장의 떨림인지, 그녀 자신도 분간하지 못했다.

전수현이 짧게 정리했다.

“한지온 선생님의 시연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질(質)을 잘 보여주신 같습니다.”

안수연 ― 개념이 분명한 흑백의 수업.

“이제 안수연 선생님 시연 보겠습니다.”

안수연은 교탁 앞에 섰다. 등줄기가 곧았다. 손가락의 각 관절이 정확한 각도를 유지했다. 그녀는 칠판을 향해 천천히 돌아서서 분필을 들었다. 무엇을 할지 명백했다. ‘본질 질문(Essential Question)’.

“여러분, 10월 9일이 무슨 날이죠? 맞아요. 한글날입니다.”

교실은 비어 있었지만, 그녀는 군중 앞에 선 배우처럼 호흡을 쪼갰다.

“오늘 목표는 ‘세종대왕의 마음을 헤아려보기’예요.”

그녀는 준비해 온 ‘백성의 편지’를 들었다. A4 모서리가 딱 맞게 잘려 있었다. 종이를 들어 올리는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긴장이라기보다 계산된 임장감(臨場感) 연출. 관객의 주파수에 맞추기 위한 정밀 진동.

“예를 들어 볼게요.

‘전하, 저희는 글자를 배워서 너무 좋아요. 그런데 숙제가 너무 많아요. 줄여주세요.’”

조용한 웃음이 교실 곳곳에서 피어났다—교감의 펜 끝이 살짝 흔들렸다. 안수연은 그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고 곧바로 되물었다.


“왜 웃는 걸까요? 웃음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은 뭐죠?”

빈 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마치 정말 고개를 갸웃하는 듯 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가상 학생의 눈높이에 정확히 맞춰 내려갔다. 허리 각도 15도, 목의 회전 20도. 전문성은 수치로도 설명 가능하다는 듯, 그녀의 제스처는 품위 있는 통계였다.

“질문 규칙 두 가지.

첫째, 사실 위에 생각이나 의견을 얹어요.

둘째, 나의 생각 위에 이유, 근거, 까닭을 얹어요.

그리고—말할 땐 짧게.”

칠판에는 작은 도식이 생겼다.


사실 → 해석 → 근거.

세 단어가 교사로서의 ‘칼날’처럼 반짝였다.

“자, 모둠. ‘훈민정음’의 의의, 다섯 단어로.”

그녀는 없는 모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의 대답을 즉시 바꿔 말해 주는 리보이스(Revoice)는 정확했다.


“‘쉬움, 평등, 효율, 자주, 저항.’ 좋아요. 다만 ‘저항’은 누구의 관점인지 붙여야 해요.”

형성평가 도구는 따로 없었다. 대신 언어가 도구였다.

즉시 교정—“‘자주’는 외교에선 다른 의미죠. 한 줄만 더 보충.”

오개념 처치—“‘양반도 좋아했다’는 주장은 자료 근거 불충분. 반례 제시.”

말의 높낮이는 낭독처럼 매끄럽고, 질문의 속도는 심장처럼 일정했다. 수업은 색조를 배제한 흑백 사진 같았다. 명암이 분명했고, 구도가 ‘가르침’ 자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마지막 1분. 안수연은 허리 각도를 더 낮춘 채 말을 맺었다.

“오늘 우리가 배운 건, 문자 그 자체가 아니라—문자를 만드는 마음입니다.”

그 문장이 교실의 중앙을 지나 벽에 닿아 되돌아왔다. 전수현은 펜끝을 들어 짧게 표시했다.

“안수연 선생님의 시연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수업은 누구보다 정확한 개념을 지도하는 기본중의 기본적인 수업이었습니다.”

두 수업 사이의 공기는, 색이 달랐다. 한지온의 수업은 색채—아이들의 웃음과 동작, 활동의 리듬이 재즈처럼 흔들렸다. 안수연의 수업은 흑백—문장과 개념, 분석의 선이 클래식처럼 곧았다.

교감은 팔걸이에 가볍게 팔꿈치를 얹었다. 1학년 부장은 ‘참여의 질’, 2학년 부장은 ‘사실-해석-근거’ 도식을 여백에 옮겨 적었다. 3학년 부장은 시계의 분침을, 4학년 부장은 익선관의 날개를 힐끗 보았다—각자 취향과 철학대로 무언가를 가져가고 있었다.

두 교사는 서로를 보지 않았다. 한지온은 물병 뚜껑을 세 번 돌려 닫고, 다시 반 바퀴 풀었다. 손이 하던 습관을 머리가 겨우 따라잡는 중이었다.

안수연은 분필을 가지런히 모아 길이 순으로 포개며, 모서리를 손톱으로 한 번 쓸었다. 긴장이 떠난 자리에 단단함이 남았다.


전수현이 질문을 열었다.

“두 분, 짧게 보완점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공개수업에서 반영할 수 있도록요.”

한지온은 먼저 입을 뗐다.

“참여 학생 수를 늘리기보다 ‘참여의 질’을 더 고르게 분배하겠습니다. 질문카드는 난이도를 층화해서, 도전 과제는 고학습자에게, 확장 과제는 조금 도움이 필요한 학습자에게 역할을 줄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시간은 동기 4분, 전개 5분, 정리 1분으로 잘 진행된 것 같았습니다.”

말끝이 짧고 또렷했다. 그녀는 시선을 관찰자의 눈에서 1초 더 버텼다가 내렸다—‘도망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신호같았다. 안수연이 이어받았다.

“저는 상호작용을 한 단계 더 구체화하겠습니다. 오개념 리스트를 체크리스트화해서 순간 교정의 누락을 줄이겠습니다. 진도 초반엔 참여 구조를, 후반엔 정확 구조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리듬을 설계하겠습니다.”

말은 단단했고, 호흡은 산소처럼 일정했다. 그녀는 마지막에 아주 조심스럽게 한 문장을 덧붙였다.

“그리고—한글날의 의미를 ‘축제’와 ‘사유’ 두 층으로 나눠서, 반별 특성에 맞게 선택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은 서로 다른 길을 가리키며 동시에 같은 정상으로 향했다. 참여의 질—정확의 질. 교감은 펜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깍지 끼었다.

한지수 교감은 크게 한번 숨을 쉬고 자연스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두 분의 수업은 서로 닮지 않았다는 점에서, 교육적으로 훌륭합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춰 모두의 시선이 고르게 모이도록 했다.

“한지온 선생님. 아이들을 ‘활동’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 탁월합니다. 동기와 전환, 즉각 피드백, 그리고 시간 관리—짧지만 살아 있습니다. 다만 공개수업에선 관찰자에게도 학습의 구조가 보이도록, 활동 명칭이나 설명에 대한 판서를 더 붙여 주세요.”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안수연 선생님. 개념의 골격을 세우는 솜씨가 뛰어납니다. 사실-해석-근거, 오개념 처치—흑백의 구도처럼 명료합니다. 다만 공개수업에선 정밀함 속에 최소한의 ‘색’을 하나만 더 얹어 주세요. 아이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숨결—그 한 포인트면 완벽합니다.”

교감은 두 손을 펼쳐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목소리에 온도를 아주 조금 올렸다.

“그리고 두 분께, 부탁이자 격려를 드립니다. 서로의 강점을 존중해 주십시오. 오늘 이 ‘가상 모의 수업’ 과정 자체가 이미 최고의 수업이었습니다. 수업은 결과보다 과정이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전문성과 태도—아이들이 모른 척해도, 교사들은 압니다. 우리는 서로의 수업으로 성장합니다.”

그는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눌렀다.

“흑과 백은 대립이 아니라 명암이고, 두 분이 함께 서면, 교실은 아마 피카소의 작품처럼 위대한 수업이 될 것 같습니다.”

침묵이 잠깐 교실을 덮었다. 가벼운 숨소리와 종이 스치는 소리만 남았다. 1학년 부장이 먼저 박수를 쳤다. 이어서 2·3·4학년 부장, 전수현, 교감—박수의 파동이 원을 그리며 번졌다.

한지온이 익선관을 상자에 곱게 넣었다. 천의 날개를 손톱으로 한 번 쓸며 모서리를 정리했다. 그녀의 눈가에 아주 얇은 미소가 걸렸다—패기가 아니라 안도, 안도가 아니라 결심.

안수연은 분필을 길이대로 포갠 뒤, 마지막 한 토막을 상자 속에 넣었다. 뚜껑을 닫을 때 손바닥으로 살짝 눌렀다—단단함을 확인하는 습관. 눈빛은 차고, 마음은 따뜻했다. 오래된 장인의 체온에 가까웠다.

문이 열렸다. 김도진이 들어왔다.

그는 둘을 번갈아 보았다. 말하려다 멈추고, 고개만 가볍게 숙였다. 그러나 눈동자의 온도는 두 사람에게 똑같이 공평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더 따뜻했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둘은 동시에 미세하게 웃었다. 서로에게, 그리고 서로를 지나 자신에게.

오늘의 교실은 흑과 백으로 나뉘었고, 동시에 하나의 사진이 되었다. 명암은 충돌이 아니라 깊이였다. 바깥 복도에서 종이 카트 바퀴가 ‘또로록’ 굴러갔다. 그 소리는 다음 장면이 준비되고 있음을 알렸다. 문은 닫혔고, 수업의 잔향은 오래 남았다.


S10. 학부모 수업 공개


학교는 아침부터 붐볐다. 정문 앞 도로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부터 차로 가득 찼고, 유리창마다 아이들의 얼굴이 붙어 있었다. 평소엔 조용한 2층 복도에도 낮은 웅성거림이 흘렀다. 오늘은 학부모 공개수업이었다. 일 년 중 가장 정장을 많이 입은 날이자, 선생님들이 가장 평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날이었다.

운동장 한쪽에는 꽃다발을 든 어머니들이 서 있었다. 포장 비닐이 햇빛에 번쩍였고, 바람은 그 빛을 교실 창문까지 실어 나르듯 스쳐갔다. 교실마다 미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아이들은 평소보다 책상 위를 정리했고, 선생님들은 평소보다 목소리를 낮췄다. 고요한데, 어딘가 들떠 있었다.

어느 교실은 발표 시간마다 손이 일제히 올라갔고, 어느 교실은 토론이 끝나자 작은 박수가 터졌다. 음악실에서는 리코더 소리가 삐걱거리며 올라가다가 비틀거렸고, 체육관에서는 학부모 참여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흙냄새와 땀냄새, 향수 냄새가 뒤섞여 공기를 채웠다. 모두가 뭔가를 증명하듯 하루를 치르고 있었다.

어떤 교실에서는 한 아이가 계산 문제를 틀리자 어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웃는 듯, 울먹이는 듯. 옆자리의 또 다른 어머니는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코끝을 눌렀다. 아이가 발표를 마칠 때마다 박수와 한숨이 교차했고, 창밖의 바람이 천천히 그 사이를 지나갔다.

그날 학교는 거대한 심포니 같았다. 6학년의 긴장된 독서 토론이 첼로의 낮은 선율처럼 깔리고, 2학년의 손유희 수업이 피콜로처럼 가볍게 날았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그 합주가 살짝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점심이 끝난 뒤, 공기는 조금 느슨해졌다. 급식을 먹는 교사들의 웃음이 조용히 이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오후 2시, 종이 울리자마자 모든 교사가 직원회의실로 모였다. 교무부장이 사회를 맡았다.

“금일 급히 교장선생님께서 전달사항이 있으셔서 임시 협의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회의실에는 플라스틱 컵에 담긴 커피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교감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늘 공개수업,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짧지 않은 제 경력에서도 이렇게 다채롭고 생생한 공개수업은 처음입니다. 교실마다 다르고, 교사마다 달랐지만 하나같이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여러분의 수업을 보며, 다시 한번 교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꼈습니다.”

교사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누군가는 눈썹을 찡그렸고, 누군가는 작게 웃었다. 그때 교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미는 소리가 조용히 깔렸다.

“제가 할 말을 교감선생님이 다 하셨네요.”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오늘 정말 감동했습니다. 올해는 제 교직 마지막 해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실을 돌며 느꼈습니다. 내가 평생 이 일을 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아이들, 교사, 부모가 한 공간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그 시간. 그게 바로 교육이구나.

모든 교실이 다 달랐습니다. 어떤 교실은 학자들의 연구소 같았고, 어떤 교실은 실험실 같았고, 어떤 교실은 작은 연극 무대 같았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진짜였습니다. 누구 하나 흉내 내지 않았습니다. 그 진심이 저를 울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직접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는 말끝에 박수를 쳤다. 한 명의 박수로 시작된 소리가 이내 전체로 퍼졌다. 회의실은 한순간 따뜻한 소리로 가득 찼다. 교사들은 어색하게 웃었고, 몇몇은 눈을 비볐다. 그날의 박수는 어느 대회나 평가보다 무겁게, 그리고 부드럽게 울렸다.

잠시 뒤, 교무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래서요, 오늘은 특별히 교장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모두 조퇴하시길 바랍니다. 교실 정리만 하시고, 댁으로 빨리 돌아가셔서 공개수업으로 쌓인 피로 푸시라고요.”

잠깐의 정적 뒤에 환호가 터졌다.

“와―!”


누군가는 두 손을 들었고, 누군가는 의자를 밀치며 웃었다. 누군가는 이미 조퇴를 올린 교사도 있있다. 회의실의 공기는 어느새 봄날의 운동장 같았다. 밖으로 나오는 복도에서 정수학은 독고철과 고철진을 만났다. 세 사람의 셔츠에는 여전히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

“정수학 부장님. 교장님이 조퇴하라니까 바로 퇴근할 거야?”

고철진이 웃으며 묻자, 정수학이 대꾸했다.


“그럼 남을 이유가 있냐. 오늘 같은 날은 빨리 사라져야지.”

“어디 가는데?”

“어린이집.”

독고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얼른 애기 데리러 가야지.”

고철진은 픽 웃었다.

“나도 낭만 좀 있어야겠다. 오늘은 맥주 좀 사서 넷플릭다.”

세 사람은 허허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누군가는 진지했고, 누군가는 농담이었고, 누군가는 진담과 농담을 구분하지 않았다. 복도 끝, 창가에선 한지온이 창문을 닫고 있었다. 빛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때 계단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한지온 선생님, 커피 한잔 하실래요?”


고개를 숙이자 안수연이 서 있었다. 햇살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손끝이 가볍게 흔들렸다.

“네, 선배님. 그래요.”

그 말은 아주 짧았지만, 오랜 긴장의 실이 풀리듯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학교는 오후로 넘어가고 있었다.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남긴 물통이 몇 개 굴러다녔다. 교정의 느티나무 잎이 바람에 흩날렸고, 종이컵 하나가 먼지 속을 떠돌았다. 누군가는 교무실 불을 끄며 퇴근했고, 누군가는 교실 문을 닫기 전 잠시 아이들의 의자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잠잠해지자, 남은 건 교실 냄새뿐이었다. 분필, 종이, 사람, 그리고 하루치의 시간. 그 냄새 속에 교사들의 하루가, 한 해의 시간들이, 조용히 스며 있었다. 교사는 매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시 해볼까?’

‘괜찮아요.’

그 말들이 하루치 인생이 되고, 그 하루들이 쌓여 하나의 세상이 된다. 오늘, 그 세상은 잠시 아름다웠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완전했다.

복도 끝에서 정수학이 독고철에게 말했다.

“야, 오늘 수업 어땠냐?”

“좋았지. 교장님 눈에서 눈물 나올 뻔했잖아.”

“오ㅡ 고생했네.”

“그래도 말이야, 그 눈물 흉내도 아무나 못 내.”

고철진이 웃음을 참다 터뜨렸다.

“야, 너희 오늘 조퇴라며 왜 아직도 이러고 있냐?”

정수학이 말했다.

“조퇴는 올렸는데, 아직 뭔가 놓친거 같아서.”

독고철이 대답했다.

“이게 교사의 비극이지. 조퇴를 시켜줘도 못하는.”

셋은 동시에 웃었다. 복도의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그 빛 아래서 그들은 잠시 멈춰 서 있었다. 학교의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소란스러웠고, 진심이었고, 약간은 웃겼다. 그게 바로 교사의 삶이었다. 그날의 학교는 한 편의 영화처럼 지나갔다. 엔딩 크레딧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교감의 말처럼, 오늘의 과정 자체가 이미 수업이었고, 교장의 말처럼, 그 하루가 곧 교육이었다. 교사는 세상을 바꾸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 한 명의 하루를 바꿀 수 있다. 그게 충분히 크다는 걸, 그날 학교는 모두가 알았다.


에필로그

밴드부 동아리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정수학이 베이스를 들고 들어왔다. 문틈으로 오후의 햇빛이 얇게 스며들어 먼지 사이를 부유했다. 드럼 앞에는 윤허담이 앉아 있었고, 기타를 든 독고철은 이미 앰프의 볼륨을 조정하고 있었다. 키보드 자리에 남도윤, 마이크 앞에는 강아름. 익숙하지 않은 조합이었다. 그러나 묘하게 조화로웠다.

정수학이 손뼉을 두 번 쳤다.

“모두 고마워요. 조퇴도 안 하고 이렇게 모여줘서.”

윤허담이 스틱을 굴리며 물었다.

“부장님, 근데... 괜찮을까요?”

“뭐가?”

“저희요. 진짜 공연해요? 이 상태로요?”

정수학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금방 돼.”

강아름이 마이크를 잡은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부장님, 진짜 제가 노래해도 되는 거예요? 김도진 부장님이 계시잖아요.”

정수학이 미소를 지었다.

“도진이는 초등학교 축제엔 안 맞아. 락이 너무 세.

아름샘이 잘 어울리지. 귀엽고 순수하잖아.”

강아름은 작게 웃으며 눈을 피했다.

“좋아하긴... 합니다. 그래도요.”

그 말을 듣고 있던 남도윤이 툭 내뱉었다.

“저는 안 좋아합니다. 아름샘 말고요, 이 상황이요.

전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정수학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동요 칠 줄 안다며. 체르니 100번 했잖아요.”

남도윤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건 피아노고요. 밴드는... 다른 장르입니다.”

그 옆에서 독고철이 기타 줄을 가볍게 튕겼다.

“자, 준비 끝. 바로 해볼까요?”

정수학이 손가락으로 리듬을 세며 말했다.

“어제 독고 부장님이 MR 다 보내줬잖아. 들어봤죠?”

윤허담이 고개를 긁었다.

“네, 들어는 봤는데... 하루 만에 이게 될 리가요.”

정수학은 짧게 웃었다.

“그게 학교잖아요. 뭐든 하루 만에 다 돼야지.”

짧은 정적.

정수학이 손끝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리듬을 잡았다.

“자, 가봅시다. 하나, 둘, 셋, 넷!”

두두둥―

기타가 울리고, 드럼이 터지고, 베이스가 진동했다. 어색한 시작이었지만, 점점 리듬이 맞았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박자를 찾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하나의 합이 만들어졌다. 음이 섞이고, 숨이 맞고, 어느새 음악이 되었다. 곡이 끝났을 때, 동아리실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모두가 한동안 멈춰 있었다.


윤허담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되네요.”

남도윤은 고개를 숙였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난 지금 꿈꾸는 거야.”

강아름은 숨을 고르며 웃음을 참았다.

“부장님, 진짜 하시는 거죠? 축제에서요?”

정수학은 베이스를 세워두고,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당연하지. 매일 수업만 하고 살래?”

창문 밖으로 운동장 건너 교문이 보였다.

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 하나.

‘참결 문화예술 발표회’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