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슬기로운 학교 생활, 본격 초딩 교사 성장 로망 소설
그동안 연재가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 엄청난 행사들이 있어서 일과 가정에 좀 집중했어요. ^^
곧 줄 연재를 할 예정입니다. 이번화는 시퀀스 짜기가 조금 복잡해서 ^^ 전,후로 나눠서 연재합니다.
9월 초, 교무실 옆 회의실.
오전 수업이 끝난 뒤 모여든 학년부장들의 표정에는 피로와 긴장이 묻어 있었다. 교무부장이 자리를 정리하며 회의를 열자, 연구부장 전수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번 9월 학부모 공개수업은 작년과 다르게 진행됩니다. 개별 수업 지도안 제출은 면제합니다.”
회의실 한쪽에서 작은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매년 형식적인 수업안 작성에 시달리던 기억이 다들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전수현은 바로 다음 문장을 던졌다.
“대신, 각 학년별 공동수업 지도 계획안을 작성해 주셔야 합니다. 같은 학년 담임들이 함께 수업 주제와 방법을 논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학부모 공개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입니다.”
회의실에 앉아 있던 학년부장들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지도안 안 쓰는 건 낫지만, 학년별 협의라니… 그게 더 힘든 일이지.’
속으로 중얼거리는 생각이 눈빛에 그대로 배어났다. 누군가는 펜을 탁탁 두드렸고, 누군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체념한 듯 메모를 이어갔다. 전수현은 담담히 마무리했다.
“중요한 건 보여주기식 수업이 아니라 학년 차원의 고민과 협업이라는 점입니다.”
바로 그 순간,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오더니, 문이 덜컥 열렸다.
교장 이태웅이 커다란 체구를 드러내며 들어왔고, 뒤이어 교감 한지수가 바짝 따라 들어왔다.
“수고들 많습니다.” 교장이 낮게 인사를 건넸다.
“공개수업은 학교의 얼굴입니다. 학년부장님들이 서로 도와 잘 이끌어 주셔야겠지요.”
교감의 목소리는 한층 날카로웠다.
“특히 올해는 공동수업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협의 과정도 기록해 두셔야 평가 자료로 쓰일 겁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학년부장들의 표정은 굳고, 긴장한 채 펜을 움직이는 손만 부지런했다.
그때, 회의실 뒷문이 살짝 열리며 한 여교사가 들어섰다. 단정한 옷차림, 침착한 걸음.
교장이 손짓하며 그녀를 앞으로 불렀다.
“오늘 새로 발령받으신 선생님입니다. 5학년 4반 담임을 맡게 된 안수연 선생님이십니다. 베트남 교환교사로 계시다 복직하셨습니다.”
학년부장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안수연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안수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짧은 정적. 그때 교장이 무심히 웃으며 가볍게 던졌다.
“혹시… 김도진 부장님과 두 분은 전에 근무하신적이 있으신가요? 앞으로 같은 학년이니 잘 맞추셔야지요.”
안수연은 짧게 눈을 깜빡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뇨, 잘 모릅니다.”
모두의 시선이 곧장 김도진에게 향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돌처럼 굳어 있었으나, 그 안에 억눌린 무언가가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다. 천천히 숨을 고르더니,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아는 사이 맞습니다.”
회의실이 순간 술렁였다. 그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전 부인입니다.”
정적. 누군가의 펜이 바닥에 떨어지며 ‘탁’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안수연은 고개를 숙인 채 표정이 굳어 있었고, 교장은 당황한 듯 웃으며 손뼉을 두어 번 쳤다.
“자자, 뭐… 다 지난 일이잖아요. 서로 잘 부탁하고, 학교 일에 집중합시다.”
그러나 이미 파문은 잔잔히 퍼지고 있었다.
회의실 안, 교사들의 시선은 서로에게 향하지 못하고 허공만 맴돌았다.
그날의 학년부장 회의는 더 이상 공개수업이 중심이 아니었다.
회의실이 조용히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커피잔을 내려놓았고, 누군가는 허공을 보며 마른기침을 했다.
방금 전의 대화 — “전 부인입니다.” — 그 한마디가 여전히 공기 속에 남아 있었다.
교감 한지수가 서류를 정리하며 둘 사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분이 같은 학년이니, 사적으로도 그렇고… 업무적으로도 잘 협의해서, 민감한 일은 없도록 해주세요.”
말끝은 부드러웠지만, 표정은 냉정했다.
“학교는 작은 사회니까요. 서로가 조금만 배려하면 됩니다.”
김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짧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끝이 가방끈을 꼭 쥐고 있었다. 회의실 문이 닫히자, 복도는 한층 더 차갑고 적막해졌다.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교무실을 향해 느리게 이어졌다. 안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굳이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속이 시원해?”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아래엔 오래 눌러둔 서운함이 스며 있었다.
김도진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천천히 대답했다.
“덜 불편하려고 말한 거야.”
“그게 이유야?”
안수연이 미세하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혀끝에서 흘러나온 냉소에 가까웠다.
“참, 당신다운 이유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멈추지 않고 복도 끝의 창문을 스치며 걸었다. 창밖에는 아이들이 쉬는 시간마다 떠들며 뛰노는 운동장이 보였다. 그 소란스러운 웃음소리가, 이상하게 두 사람의 걸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들이 5학년 연구실로 향하던 중, 맞은편에서 두 사람이 걸어왔다. 과학부장 정수학과 6학년 학년부장 독고철. 둘 다 커피를 들고 담소 중이었는데, 김도진과 안수연을 보는 순간 동시에 멈췄다.
“어?” 정수학이 눈을 크게 떴다.
“수연아… 너 여기로 발령났어?”
안수연의 얼굴이 그제야 환해졌다.
“어, 수학 오빠!”
짧은 순간, 복도에 잠시 밝은 공기가 스쳤다.
독고철이 천천히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독고 선배, 잘 지내셨어요?”
안수연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정수학은 여전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설마, 5학년 4반에 발령났어?”
“맞아요.” 안수연이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해요.”
잠시 공기가 멈췄다.
독고철이 커피를 들고 있다가 무심히 한마디 던졌다.
“도진이가 학년부장인 거 알고 있지?”
안수연의 미소가 순간 흐려졌다.
“전에는 내가 학년부장이었는데요. 뭐.”
짧지만 묵직한 대답이었다.
그 말 속에는 미세한 자존심,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냉소가 함께 섞여 있었다.
정수학은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셋이 여기서 같이 근무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 말을 했구나.”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 아직도 셋이 밴드하고 있겠네? 나중에 또 뵈요.”
그녀는 짧게 웃었지만, 김도진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 얼굴에는 불편함도, 반가움도, 어떤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이제 연구실로 가시죠.”
그의 말이 공기를 단칼에 자른 듯, 세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정수학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반가운 얼굴 보니 좋다~”
그 말조차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복도의 공기가 묘하게 늘어졌다.
정수학과 독고철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수학이 커피잔을 입가로 가져가다 말고, 낮게 중얼거렸다.
“야, 인사담당 장학사가 철이 친구라고 했지? 연통 좀 넣어봐.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봐야겠다.”
독고철이 입을 비틀었다.
“어, 그래 빨리 알아봐야겠어.”
그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 회의실 쪽에서 교무부장 강인봉이 불쑥 나타났다.
서류를 한 아름 안고 있었는데, 두 사람을 보자마자 헛기침을 했다.
“야, 너희들 들었냐? 아까 난리였어.”
정수학이 깜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형님은 좀 기척 좀 하고 나타나세요. 애 떨어질 뻔했잖아요.”
강인봉이 피식 웃었다.
“오, 셋째?”
“그만.” 정수학이 손을 내저었다.
“무슨 난리요?”
독고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교무부장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낮게 말했다.
“도진이 전처입니다. 그 자리에서 딱 그렇게 말했다고.”
정수학이 커피를 거의 쏟을 뻔하며 입을 벌렸다.
“우와, 진짜 미친놈이네. 사람 많은 데서 그걸 그냥 박았다고?”
강인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봤을 땐, 도진이는 그냥 차라리 말하고 가는 게 덜 불편하다고 생각한 거야.”
“그게 더 불편하지.” 정수학이 입술을 깨물었다.
“수연이 성격 알잖아요. 진짜 제대로 빡쳤을 텐데.”
독고철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장학사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철이다. 혹시 인사팀에서 이번에 5학년 4반으로 온 사람 있잖아, 안수연… 그래, 그거. 그게 어떻게 된 거야?”
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급했다.
정수학은 그의 옆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아… 이건 또 무슨 폭풍의 2학기냐.”
복도의 끝,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어왔다.
햇빛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떨어진 낙엽 하나가 천천히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세 사람 — 정수학, 독고철, 교무부장 — 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이 학교, 이제 또 시끄럽겠구나.’
S3. 첫 대면
복도 끝, 5학년 연구실 앞에 멈춰 선 두 사람.
김도진은 손잡이를 잡기 전, 잠시 숨을 고르듯 멈춰 섰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키보드 소리와 프린터 돌아가는 기계음이 이른 오후의 공기 속에 묘하게 또렷했다. 그 작은 진동이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거리를 더욱 드러내는 듯했다.
“들어가시죠.”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낮고 담백했다. 안수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 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밀려들었다가 이내 삼켜졌다. 문이 열리자 에어컨의 냉기가 스르르 새어 나왔다. ㄷ자 모양으로 배치된 책상과 벽면을 가득 채운 각종 안내문, 진도표, 학급 사진들, 그리고 커피와 종이 냄새가 한데 섞여 있었다.
이미 연구실 안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한지온.
그녀는 노트북 화면 앞에서 무언가를 수정하다가 문이 열리자 고개를 들었다. 낯선 얼굴이 보이자 순간 눈동자가 커졌다. 놀람, 당혹, 그리고 어딘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망설임이 한꺼번에 스쳤다. 그녀는 곧 표정을 정돈했지만, 너무 늦었다. 안수연은 그 눈빛을 단번에 읽었다.
‘역시, 벌써 소문이 돌았구나.’
입술이 미세하게 말랐다. 손끝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김도진은 그런 기류를 모른 척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
“이쪽이 5학년 연구실입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안내를 한다기보다 공식적인 절차를 진행하는 행정인의 말투 같았다. 어쩌면 그게 그가 택한 방어였는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아, 들었어? 들었냐고!”
거친 목소리가 연구실을 뒤흔들었다. 고철진이었다. 그는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고, 화면에는 여전히 ‘5학년 단체 대화방’이 켜져 있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는 한지온에게 말했다.
“5학년 4반에 그… 부장님 전 부인이 발령 받았다고 메시지로 내가 지금—”
그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눈앞의 광경이 이미 그 소문의 주인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철진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돌아가자, 안수연이 서 있었다. 그 순간 공기 중의 산소가 절반쯤 사라진 듯했다.
“아… 어, 그게, 그러니까… 아하하하…”
그는 허공에 대고 애써 웃음을 흘렸다.
“좋은 소식을 막 들었다는 뜻이죠. 다들 반가워하더라고요, 하하…”
한지온은 시선을 노트북으로 돌렸고, 김도진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서류를 넘겼다. 그의 손끝이 책상을 두드리며 일정한 리듬을 만들었다. 탁, 탁, 탁— 그 소리가 마치 고철진의 식은땀을 더 두드리는 듯했다.
“5학년 4반 안수연 선생님이 새로 오셨습니다.”
김도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안수연은 입꼬리를 올렸다.
“네, 맞아요. 연구실 들어오기도 전에 제 소개를 다 해주셨나 보네요. 곧 사람들 구경이라도 오겠네요.”
그 말은 부드럽게 들렸지만, 언어의 결을 따라가 보면 분명히 얇은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고철진이 헛기침을 하며 허둥대며 자리에 앉았다.
“하하… 구경이라뇨. 우리 연구실이 원래 활발하잖아요. 하하하.”
그의 웃음은 연구실의 차가운 공기에 닿자 금세 사라졌다.
그때 또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한지온 쌤! 들었어요?”
강아름이었다. 그녀의 뒤로 남도윤이 고개를 내밀었다.
“새로운 선생님이 오셨다면서요!”
두 사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철진이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닫았다.
쾅.
순간, 공기 중의 온도가 2도는 더 떨어진 듯했다.
한지온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수습했다.
“같이 일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안수연의 미소는 단정했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는 한지온의 미소와는 결이 달랐다.
한쪽은 긴장된 예의였고, 다른 한쪽은 냉정한 거리였다.
김도진이 펜을 들었다.
“상황으로 보니 소개는 따로 안 해도 될 것 같네요. 오늘 부장회의 내용을 전달하겠습니다. 9월 학부모 공개수업 준비 관련입니다.”
그는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일단 개별 지도안 작성은 없습니다.”
“오, 좋아, 좋아.”
고철진이 크게 외쳤다.
“이건 정말 혁신이에요. 올해 들어 가장 좋은 소식이네.”
“그래요?”
한지온이 놀라듯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대신에,” 김도진이 말을 이었다.
“공동수업지도로 같은 단원 차시 활동을 함께 계획하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어제 미리 보내드린 진도표와 주간학습 안내 보시면 날짜에 맞는 단원과 차시를 정해보도록 하죠.”
갑자기 회의는 어색한 정적 속에서 흘러갔다. 누군가 키보드를 두드리고, 누군가 펜을 딸깍거리며 시간을 때웠다. 말은 없었지만 각자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저는 오늘 발령을 받아서요.”
안수연이 조심스레 말했다.
“일단 계신 분들이 정하시는 대로 따를게요.”
“편한 대로 하시죠.”
김도진의 대답은 기계적으로 들렸다.
“저는 아직 살펴보질 못했어요.”
한지온이 덧붙였다.
“나야 뭐, 정해지면 정해지는 대로 따라가죠.”
고철진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인생은 흘러가는 거니까.”
그때 안수연이 고개를 돌렸다.
“생각이 참 편안하시네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가 단단히 얼었다.
고철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입가로 어색한 웃음이 번졌다.
“아…하하하. 예. 뭐, 경험이 쌓이면 다 도가 트이죠.”
그의 말은 천장으로 솟았다가 그대로 공중에서 사라졌다.
김도진은 아무 말 없이 회의록을 정리했다. ‘9월 3일, 5학년 공동수업 1차 협의.’ 그는 그 문장을 또박또박 적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도 묵직한 긴장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럼 내일 오후에 다시 만나서 정하도록 하죠. 일단 주지교과 중에서 선택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짧고 정확한 마무리였다.
그가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안수연도 따라 일어났다.
“안수연 선생님, 제가 교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전임 담임이 남겨둔 인수인계 자료도 거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답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문 너머로 멀어지자, 연구실 안에는 조용한 정적이 깔렸다.
고철진이 제일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야… 이건 뭐, 폭풍의 전조네.”
한지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노트북 화면 속 PPT 파일이 멈춰 있었다. 커서가 깜박였다. 그 깜박임이 마치 그녀의 마음속 불안과 질투,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를 반복해서 비추는 듯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연구실의 공기는 묘하게 눅눅하고 무거웠다. 마치 여름 태풍이 오기 전, 그 불안한 고요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까지 눌러버리는 듯했다.
그날의 회의는 그렇게 조용히 끝났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바로 이 순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거대한 저기압이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 날 아침, 학교는 언제나처럼 정돈된 리듬으로 흘러갔다.
종소리가 울리고, 교실마다 아이들의 웃음과 선생님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또 하루의 ‘배움’이 시작되었다. 가르치는 일과 배우는 일은 어쩌면 기계적인 반복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단조로움이야말로 학교가 유지되는 질서였다. 종이 다시 울리고, 아이들이 교실 문을 열고 쏟아져 나와 운동장과 복도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남은 교실 안엔,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는 교사들이 있었다.
오후가 되어 학생들이 모두 귀가하자, 5학년 교사들이 하나둘 연구실로 모였다. 곧 있을 학부모 공개수업 준비를 위한 협의회가 예정된 시간이었다. 어제의 소란은 없던 일처럼, 복도에는 적막한 공기만이 흘렀다.
가장 먼저 연구실에 도착한 사람은 김도진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협의 자료를 각자의 자리에 정돈해두고,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커피잔 네 개를 꺼내놓고, 일정한 리듬으로 커피를 내렸다.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모든 행동은 정제되어 있었고,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일의 순서만 존재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고철진과 한지온이 들어왔다.
“부장님, 커피 향 좋네요.”
“협의회 맞죠?”
고철진이 의자에 앉으며 어깨를 돌렸다. 김도진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곧이어 또 다른 문이 열렸다.
안수연이 들어섰다.
그녀는 어제보다 한결 정돈된 차림이었다. 하얀 블라우스와 짙은 회색 정장 바지, 그리고 단정하게 묶은 머리. 표정은 차분했지만, 눈빛에는 낯선 공간의 공기를 읽는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
김도진이 말을 꺼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오늘은 공개수업 관련 협의회를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교과와 단원에 대한 의견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수연이 손을 들었다.
“어제 급히 진도표를 살펴보고 오늘 아이들 수업을 보니까, 사회 교과로 진행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사 단원 중에서도 조선 초기를 다루는 부분인데, 한글날도 다가오고 있으니 세종대왕의 업적과 조선의 발전을 주제로 하면 어떨까요? 아이들이 이미 친숙한 주제라 학부모 공개수업 때도 자신감 있게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에는 교사로서의 단단한 확신이 묻어 있었다.
고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오, 저도 같은 생각이었는데요. 세종대왕 모르는 애들은 없잖아요. 아이들도 부담 없고 좋죠.”
김도진이 메모를 하며 물었다.
“특별히 구상하신 활동이 있으신가요?”
“네. 간단한 모둠 조사 발표를 해보면 어떨까요? 모둠별로 태블릿이나 노트북을 활용해서 세종대왕의 업적을 분야별로 조사하고, 발표하는 방식이요. 인물학습과 협동학습을 적절히 변형해서 모형화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고철진은 감탄하듯 말했다.
“활동까지 다 생각해 오셨네요. 완벽한데요?”
김도진이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바라봤다.
“한지온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한지온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앉아 있었다. 손가락이 노트북 키보드를 살짝 두드렸다가 멈췄다. 잠시의 정적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은 생각이긴 한데…”
그녀의 말꼬리에 고철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한데?”
안수연의 표정이 그제야 살짝 풀리며, 억지로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네, 저도 들어보고 싶네요.”
한지온이 시선을 곧게 세우며 말을 이었다.
“세종대왕 주제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학생 활동 시간이 충분할지 모르겠어요. 조사하고, 발표 자료를 만들고, 발표까지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구체적인 양이나 기준이 없으면 아이들이 횡설수설하거나, 시간 내에 발표를 마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안수연이 곧바로 받아쳤다.
“그렇죠. 그래서 그 부분을 교사가 적절히 조율해줘야 하죠. 그게 수업 설계잖아요. 혹시 선생님은 다른 방안을 생각하신 게 있을까요?”
그 말의 얇은 친절함 속에는 ‘당신은 설계를 못 한 것 같네요’라는 뉘앙스가 숨어 있었다. 한지온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번졌다.
“저는 인물학습 대신 역할놀이를 접목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세종대왕 역할을 맡은 아이들이 미리 조사해오고, 나머지 친구들이 인터뷰 형식으로 질문을 하는 거예요. 학생 수준에서 자연스럽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스스로 말하면서 반추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죠. 활동 자체가 즐겁고, 흥미도 높을 것 같아요.”
고철진이 박수를 치듯 말했다.
“와, 그거 괜찮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진짜 좋아하겠는데요?”
안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게요. 참 즐겁고 흥미로운 수업이 될 것 같긴 한데.”
고철진은 그녀의 끝말을 다시 확인했다.
“한데?”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학생들이 실제로 학습해야 하는 지식적인 부분이 좀 부족해질 수도 있겠네요. 조사 없는 활동은 결국 비어 있는 경험만 나열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고철진이 눈을 굴렸다.
“오, 이건 오랜만의 교육학적 토론이네.”
한지온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그렇긴 하죠. 하지만 학부모 공개수업이잖아요. 학부모님들이 보러 오는 건 아이들이 조사하는 모습보다, 참여하고 표현하는 모습 아닐까요?”
“맞아요.”
고철진이 얼른 거들었다.
“동료장학이라면 수업기술을 보겠지만, 학부모 공개수업은 내 아이가 즐겁게 배우는 걸 보고 싶어 하니까요.”
안수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죠. 다만 학부모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업이 되어버리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배움의 과정이 가벼워지면, 아무리 활발해도 그건 수업이 아니라 연극이니까요.”
한지온은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얼굴로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활동이 연극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아이들이 살아 있는 배움을 경험한다면 그게 진짜 수업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즐겁게 움직이는 순간이 곧 배움의 증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안수연의 미소가 다시 얇게 다물렸다.
“그런 이상적인 말, 참 좋네요.”
그녀는 노트북을 닫으며 덧붙였다.
“현실에서는 그 즐거움이 학부모 만족으로만 남을 때가 많지만요.”
잠시 침묵.
커피 향이 묘하게 식어가며,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고철진이 두 손을 비비며 눈치를 살폈다.
“그… 저는 두 분 다 좋은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하. 근데 말이죠, 학년 부장님?”
그는 재빨리 김도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김도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는 걸 느끼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는 서류를 천천히 덮고, 한 모금의 커피를 마셨다.
“두 가지 방향 다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담백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차가웠다.
“활동의 깊이와 참여의 폭. 어느 쪽도 버릴 수는 없겠죠.
두 수업의 장점을 살려 균형점을 찾아보죠.”
말은 정중했지만, 결론은 없었다.
중립은 때로 침묵보다 잔인했다.
안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고, 한지온은 아무 말 없이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서로를 향한 인정도, 양보도 없었다.
교양의 외피 아래, 자존심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날의 협의회는 누구의 승리도 없이 끝났다.
그러나 연구실의 공기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잔열이 남아 있었다.
마치 여름 태풍이 지나간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뜨거운 바람처럼,
그 열기는 잠잠한 듯, 다시금 다가올 갈등을 예고하고 있었다.
5학년 1반 교실.
오후의 햇빛이 반쯤 닫힌 블라인드 사이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남겨진 종이컵, 프린트 몇 장, 그리고 켜진 채로 멈춰 있는 컴퓨터 화면.
교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 속에서 단 하나의 소리만이 일정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 김도진의 키보드 타이핑 소리.
탁, 탁, 탁.
기계적인 리듬이 고요를 깼다.
그 맞은편에 독고철과 정수학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묘한 긴장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정수학은 팔짱을 낀 채로 한쪽 발끝을 톡톡 찼고,
독고철은 의자 등받이에 팔꿈치를 얹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괜찮은 거야?”
김도진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괜찮지 뭐. 안 괜찮을 이유가 있어?”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 담담함은,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한 단단한 표면 같았다.
정수학이 씩 웃었다.
“입만 열면 거짓말. 괜찮을 리가 있냐?”
그는 독고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철이가 시교육청에 전화 넣었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봤다고.”
김도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커서만 깜빡였다.
독고철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베트남에서는 이미 작년 3월에 들어왔었대. 그때부터 병휴직이었다고 하더라고. 암 진단 받고 치료받으려고 들어왔었대.”
그 말이 끝나자,
짧은 정적이 교실을 채웠다.
김도진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들썩였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독고철은 그 표정을 읽었다.
“얼마 전에 수술 잘 마치고 복직한 거래.”
김도진은 천천히 키보드에서 손을 떼었다.
여전히 모니터를 향한 시선이었지만, 그 눈빛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뭐하러 알아봤어. 어차피 남인데.”
정수학이 고개를 숙여 한숨을 내쉬었다.
“입만 열면 거짓말. 어떻게 남이냐?
그래도 한동안 한 지붕 아래서, 한 이불 덮고 잤으면서.”
“난 신혼 때부터 각방 썼어.”
그 말은 너무나 단단해서, 웃음이 섞이기도 어려웠다.
정수학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오, 이건 진실 같네.”
김도진은 키보드를 다시 눌렀다.
탁, 탁.
그리고 짧게 말했다.
“알았으니까 얼른 가라. 안 바빠? 지금 연구부장이 공동수업 지도안 짜서 내라고 계속 말 안 해?”
정수학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우린 다 냈는데?”
그 말에 김도진이 잠시 손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정수학은 의자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협의 뭐 금방하지. 그런 거 다들 교육 경력이 몇 년인데. 그냥 착 하면 탁, 하고 나오지. 왜? 아직도? 뭐가 안 맞는 구만.”
독고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이가 또 의견이 세잖아.”
김도진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둘이야.”
“설마?”
정수학의 눈이 커졌다.
“한지온이?”
“새우등 터지겠네.”
독고철이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누가 새운데?” 김도진이 물었다.
“철진이 형이지. 형 등 완전 터졌겠는데?”
정수학이 웃었다.
김도진은 아무 말 없이 다시 타이핑을 시작했다.
정수학은 그를 보며 씩 웃었다.
“맞아. 그리고 왜 한지온이 밥 먹자고 했는데, 거절했어?”
독고철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진짜? 그런 일이 있었어?”
김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커서는 여전히 깜빡였고,
방 안의 공기는 서서히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정수학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나 한지온이랑 친해.
보통 사이가 아니지롱.”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김도진을 연모하는 한지온이 밥 먹자고 했는데, 왜 거절했냐고?”
김도진은 그제야 손을 멈추었다.
“밥은 집에서 각자 먹는 거지.”
“그렇지.”
정수학이 재빨리 받아쳤다.
“집에서 같이 먹는 거지.”
김도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남이잖아. 남.
남이랑 무슨 밥을 먹어. 각자 집에서 먹는 거지.”
정수학이 키득거렸다.
“남이 님이 되고 그러는 거지.”
“안 바빠?”
김도진의 목소리가 낮고 단단해졌다.
“우린 안 바쁘다니까?”
정수학이 싱긋 웃었다.
“좀 가라 좀. 남이사, 정말 남의 일에 자꾸 참견이야.”
“그렇지. 우리도 남이지.”
정수학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스물네 해째 만나는 남이지. 밴드도 이십 년째 하고 있고. 밥도 엄청 같이 먹고.”
“가라 좀.”
김도진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타이핑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탁, 탁, 탁.
그러나 이번에는 그 리듬이 한결 느려져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교실 문이 열렸다.
안수연이었다.
순간, 정수학과 독고철은 동시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일어섰다.
그들의 얼굴에 스친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말보다 빨랐다.
“어— 안녕하-십-니까!”
서둘러 인사한 두 사람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교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교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햇빛의 결이 조금 더 길어졌다.
김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 있나요?”
안수연은 교실 문가에 서서 짧게 숨을 고르고 말했다.
“아니요. 밖에서 들리길래, 곤란해 하는 것 같아서. 내쫓아 준 거예요, 부장님.”
그녀의 말에는 담백한 배려와 약간의 피로가 섞여 있었다.
김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그런데... 수연아. 아팠다면서.”
안수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입가에 얇은 웃음이 번졌다.
“저 오빠들이 뒷조사 해줬구나. 우리 부장님이 그럴 리는 없고.”
“이제 괜찮은 거야?”
“걱정해줘서 고마운데, 이제 남이니까 신경 꺼주세요.”
그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김도진은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말했다.
“알았어. 학년 부장이니까.”
안수연은 짧게 웃었다.
“한지온 선생님? 같이 밥 먹어. 예쁘고 똑똑한 거 같던데. 내 신경 쓰지 말고.”
“걱정해줘서 고마운데. 우리 남이니까 신경 꺼주세요. 4반 선생님.”
안수연의 미소가 얇게 굳었다.
그녀는 천천히 가방을 메며 말했다.
“그럴까요, 부장님? 우리 부장님 많이 변하셨네요. 남 생각 많이 해주시고. 그럼 퇴근 잘 하시고, 내일 뵈어요.”
그녀가 교실 문을 열고 나가자,
바깥 복도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한 줄기 들어왔다.
그 바람과 함께, 한지온의 모습이 문가에 나타났다.
안수연은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짧은 인사와 함께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다정했지만, 묘하게 낯선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한지온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녀는 안수연이 지나가는 어깨를 바라보다가,
교실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은 김도진이 있었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
말 한마디 없었다.
그러나 그 짧은 시선의 교환 속에는
수많은 말들이,
묻히지 못한 감정들이,
그리고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온도가 동시에 존재했다.
“부장님.”
한지온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김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커서가 깜빡였다.
햇빛이 그의 옆얼굴을 스쳤다.
“부장님, 내일 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히 흘렀다.
김도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 떨림이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멈췄다.
그날 교실 안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온도가 남았다.
가라앉은 햇빛, 식은 커피,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천천히 번지는 미묘한 불안.
그건 단순한 과거의 그림자도,
단순한 현재의 감정도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마음.’
그 이름 그대로,
서로 다른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자라나고 있었다.
9화 공개수업 전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