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슬기로운 학교 생활, 본격 초딩 교사 성장 로망 소설
개학. 5학년 연구실.
여름방학의 공기는 이미 지나갔지만, 학교 안에는 아직 축축한 열기와 긴장이 동시에 뒤엉켜 있었다. 8월 3주, 개학식 날 아침. 교문을 통과한 순간부터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 기쁨이 복도 곳곳에 튀었고, 교사들의 발걸음도 바쁘게 오갔다.
5학년 연구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개학날의 어수선한 분위기, 거기에 뜻밖의 소식이 더해져 연구실 공기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5학년 4반 담임이 건강 문제로 갑작스레 병가를 내면서, 임시로 보결 강사 한 명이 투입되기로 한 것이다. 연구실 한쪽, 아직 낯선 ‘최진아’라는 이름표가 붙은 빈 책상은 다른 자리들과는 달리 묘하게 어색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고철진은 커피를 홀짝이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 진짜 올해도 개학부터 심상치 않네. 애들은 애들대로 들떠서 난리고, 담임은 또 결원이 생기고…”
그의 말투는 늘 그렇듯 무겁고 체념조였다. 몇 년 전 교무부장에서 인성부장으로 밀려난 뒤, 말끝마다 아쉬움이 묻어나곤 했다.
김도진은 창가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툭 내뱉었다.
“어차피 임시인데, 괜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냥 굴러가는 대로 굴러가겠죠.”
말끝에는 늘 그렇듯 냉소가 묻어 있었다. 연구실 안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지만, 곧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다들 속으로 ‘또 저렇게 말하네’ 하면서도, 김도진이 결국은 이 학년의 중심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한지온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아이들 명단을 확인하며 김도진 쪽을 곁눈질했다. ‘어차피 임시인데…’라는 그의 말은 마치 사람을 내던지는 듯 차갑게 들렸지만, 한지온은 여름방학 동안 우연히 봤던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펜타포트 무대 위, 마이크 앞에 서서 노래하던 김도진. 그때 그는 연구실에서 보이는 무심한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열정적이고, 눈빛이 살아 있었고, 아이들까지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같은 사람 맞나…?’
한지온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공연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김도진의 냉소적인 말투가 떠올라 괜히 상처받을까 두려웠다.
그때 고철진이 서류 뭉치를 뒤적이며 불평을 이어갔다.
“아, 이게 뭐야. 왜 나한테 또 인성교육 계획안이야? 작년에도 내가 다 했잖아.”
김도진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부장님이 인성부장이잖아요. 이름값 해야죠.”
고철진이 투덜대자, 김도진은 슬쩍 비웃으며 덧붙였다.
“아이들한테 인성 지도하라고 맡긴 자리예요. 잔소리 말고 그냥 하세요. 아니면 차라리 자리 바꿀래요?”
고철진은 입술을 달싹이며 아무 말도 못 했다. 늘 그렇듯 김도진의 직설 앞에선 할 말이 막히곤 했다. 그러나 잠시 뒤, 김도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저기요, 고철진 부장님. 3반 애들 조회 준비했어요? 애들 대충 놔두면 또 복도에서 뛰어다닐 텐데.”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고철진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알아서 굴러가라’ 던 사람이 아닌가. 그가 먼저 복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전형적인 김도진의 ‘츤데레’였다. 무심한 척하지만, 결국 가장 먼저 움직이는 사람.
한지온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엔 더 큰 혼란이 일었다. 공연 때의 뜨거운 김도진, 연구실에서의 냉소적인 김도진, 그리고 아이들을 챙기는 츤데레 김도진. 도대체 어떤 얼굴이 진짜일까?
“선생님, 뭐 그렇게 멍하니 봐요?”
갑자기 김도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한지온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 아니에요. 그냥… 오늘 정신이 없네요.”
김도진은 피식 웃으며 팔짱을 풀었다.
“정신없는 건 늘 똑같아요. 다만 티 내느냐 안 내느냐 차이죠.”
말은 여전히 차갑지만, 그 순간 한지온은 묘하게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점심시간, 복도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급식을 마친 아이들이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이, 한지온은 서류철을 끌어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4학년 3반 교실 앞에 다다르자 발걸음이 멈췄다. 문 위에 붙은 이름표에는 ‘정수학’ 세 글자가 선명했다.
‘가야지…’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손은 쉽게 문고리에 닿지 않았다. 정수학은 이 학교에서 오래 버텨온 베테랑 교사였다. 허술해 보이는 말투와 무심한 태도로 유명했지만, 아이들과 일할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럽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한지온은 심호흡을 하고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교실 안에는 급식 냄새가 채 빠지지 않은 따뜻한 공기가 남아 있었다. 교탁 위에는 정리되지 않은 실험 도구와 수업 계획안이 뒤섞여 있었고, 의자에 앉아 서류를 보던 정수학이 고개를 들며 손짓했다.
“어, 한 선생. 무슨 일이에요?”
한지온은 두 손에 쥔 서류철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부장님, 2학기 나이스 입력 때문에요. 제가 잘 몰라서… 혹시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정수학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컴퓨터를 켰다.
“앉아요. 나이스는 처음엔 다 헤매오. 나도 지금도 헷갈릴 때 많아. 근데 몇 번만 해보면 금방 익숙해져요.”
한지온은 의자에 앉아 수첩을 꺼냈다. 화면에 복잡한 표와 숫자들이 펼쳐지자, 정수학이 마우스로 몇몇 항목을 짚어 가며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 학적 관리 탭 들어가서 반 배정 다시 확인하고, 전입생 있으면 수정해요. 제일 많이 실수하는 게 저장 안 누르고 그냥 닫아버리는 거. 그럼 다시 다 입력해야 돼요. 이건 꼭 잊지 말아요.”
“아… 저장…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받아 적었다.
정수학은 잠시 그녀의 수첩을 흘깃 보더니 피식 웃었다.
“메모 참 꼼꼼하게 하네. 내가 저 나이 땐 대충 듣고 다 까먹었는데.”
“저는… 못 믿겠어서요. 틀리면 큰일 나잖아요.”
“큰일까진 뭐. 다들 틀려요. 틀리면 고치면 되지. 학교 일은 생각보다 단순해요.”
말투는 무심했지만,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긴장이 조금 풀린 한지온이 작게 웃자, 정수학은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 뒤, 정수학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문득 말을 꺼냈다.
“난 한 선생님 봤는데? 미모가 반짝여서 그런지 객석에서 바로 보이더구먼. 옆에 윤허담, 강아름 선생님도 같이 있었잖아요. 우리 무대 다 봤잖아요.”
한지온의 손이 순간 굳었다.
“…네? 부장님이 저를 보셨어요?”
“당연하지. 눈에 띄던데 뭘. 공연은 어땠어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한지온은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네. 멋있었어요. 정말.”
정수학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도진이 원래 밴드 보컬이었어요. 대학 때부터 잘한다고 소문났고, 무대만 올라가면 완전히 딴 사람이지. 솔직히 5학년 부장이 혼자 산 지 꽤 됐는데도 아직까지 열정이 있더라고. 열정이. 돌싱들이 역시, 기운이 남다르긴 해.”
장난처럼 툭 던진 말이었지만, 묘하게 김도진을 인정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정수학은 한숨을 내쉬듯 의자에 기댔다가, 담담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5학년 부장님은 한번 갔다 왔어요. 뭐 요즘 시대에 놀랄 건 아니고… 꽤 됐죠. 근데 도진이 성격 알잖아요. 남들이 힘들 거라 생각하는 것도,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굴려요. 대충 얼버무리면서도 자기 할 일은 다 하고. 그런 사람이에요.”
말은 무심하게 흘렸지만, 한지온의 가슴은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냉소적인 얼굴 뒤에 이혼이라는 개인적 아픔을 안고도 흔들리지 않는 듯 살아가는 사람. 공연 무대 위의 눈부심과 연구실에서의 차가움이 겹쳐져,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아.”
그녀는 애써 짧게 대답을 흘렸다.
정수학은 다시 컴퓨터 화면을 가리켰다.
“자, 이건 여기까지. 나머지는 천천히 하면 돼요.”
그러나 한지온은 더 이상 화면을 볼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다른 울림이 퍼지고 있었다. 단순히 ‘무심한 부장님’이라고만 생각했던 김도진. 그의 뒤에 숨은 또 다른 얼굴에, 한지온은 알 수 없는 호기심과 묘한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문을 닫고 복도에 서자, 한지온은 한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흘러왔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밴드 보컬… 열정… 그리고, 이혼.’
정수학의 말들이 파편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겉으로는 무심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그 뒤에는 분명 아픔과 열정이 함께 뒤엉켜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학교에 앉아 있을 수 있을까. 그녀는 수첩을 꼭 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김도진 부장님은…?’
그 질문은 곧 호기심으로,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작은 떨림으로 바뀌어 그녀의 마음 한편에 깊게 자리 잡았다.
여름방학이 끝난 학교는 언제나 조금 들떠 있다. 가을로 막 넘어가는 공기, 아직 남아 있는 한낮의 열기, 복도를 메우는 아이들의 목소리—모든 것이 약간씩 과장되어 들린다. 개학식이 끝난 첫 주의 오후. 5학년 2반 과학 시간이었다.
한지온은 교실 문턱에서 잠깐 숨을 고르고 출석부를 가슴 앞에 바짝 끌어안았다. ‘산과 염기’ 단원을 지능형 과학실에서 시작하는 날. 계획대로라면, 오늘 아이들은 산성과 염기성의 차이를 직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시약의 색 변화, 입체 영상 자료, 간단한 실험 키트. 완성된 수업 구성은 그녀에게 작은 방패였다. 실수의 기억이 뒤통수를 찌를 때마다, 준비물 목록과 흐름표를 떠올리면 마음이 조금 진정되곤 했다.
“얘들아, 줄 맞춰. 앞사람 어깨 보면서 천천히 간다.”
복도는 이미 다른 반 아이들로 북적였다. 한지온의 아이들은 방학 동안 자란 키만큼 목소리도 자라나 있었다. 누군가는 운동장에서 본 반 친구의 새 신발을 칭찬했고, 누군가는 여름방학 숙제를 미처 끝내지 못한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았다. 놀림과 웃음이 뒤섞인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쌤! 오늘 과학실에서 불 실험해요?”
“불은 아니고, 색깔 바뀌는 거 보여줄 거야.”
“우와—!”
“줄! 말 줄이고, 발 줄 맞추고.”
겉으로는 다그치는 목소리, 속으로는 엷은 긴장. 아이들이 복도에서 뛰어내려 가다가 미끄러질까, 장난치다 다칠까—그런 장면이 눈앞에서 몇 번이고 번쩍였다. 그녀는 그 상상들을, 종종 현실이 되는 ‘나쁜 상상’들을 목 안쪽으로 꿀꺽 삼켰다. 교사란 결국,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도하는 직업일지 모른다. 아이들을 열 줄로 나누어 세우고, 왼쪽으로 붙이고, 오른쪽을 비워 안전거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사고가 줄어든다고, 누군가 한 번은 말했었다.
지능형 과학실 앞에 닿았을 때, 그녀는 안도와 피곤이 동시에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문을 열고 조도를 한 단계 낮추자 화면에 최적화된 은은한 빛이 퍼졌다. 하얀 실험대와 투명한 비커들이 반들거리며 아이들을 맞았다. 여름의 잔열이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실내 공기—에어컨은 돌아가고 있었지만, 뜨겁게 달구어진 복도의 열기까지 즉시 식힐 수는 없었다.
“각자 자리 앉고, 가방 의자 뒤에 걸어. 실험대 위엔 아무것도 올리지 말고.”
아이들이 둔탁한 의자 소리를 내며 앉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 책상 표면에 손바닥을 내리치는 소리, 웃음이 빠르게 번지는 소리. 모두가 그녀를 향해 집중하는 순간은 짤막한 번개 같았다가, 이내 다시 흩어진다. 그 짧은 찰나를 붙잡는 일이 수업의 기술이었다.
한지온은 교탁 뒤로 돌아가 컴퓨터 전원을 눌렀다. 오늘 보여줄 입체 영상은 산과 염기, 지시약, 중화 반응의 원리를 차근차근 보여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건 언제나 ‘바뀌는 것’이었다. 색이 바뀌고, 모양이 바뀌고, 표정이 바뀌고. 아이들은 변화를 향해 본능처럼 고개를 든다. ‘오늘은 변화를 보여주자.’ 그녀가 계획을 세울 때 가장 먼저 쓴 문장이었다. 모니터가 깨어나고, 프로젝터가 눈을 뜨듯 하얀빛을 퍼뜨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화면 한가운데에 차갑고 무심한 문장이 떠올랐다.
신호 없음
잠깐, 그녀는 그 단어의 무표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호 없음. ‘없음’이라는 단어는 가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왜 없는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 쪽에서 ‘헉—’하는 탄식이 흘렀다. 누군가 ‘쌤, 꺼졌어요’라고 알리는 순간, 그녀는 이미 키보드를 다시 눌러보고, 케이블을 훑어보고, 포트 연결을 확인하고 있었다.
마우스 포인터는 매끄럽게 움직였고, 소리의 레벨바도 흔들렸다. 문제는 연결. ‘케이블… 포트… 아까 확인했는데.’ 그녀는 무릎을 굽혔다. 치마 자락을 단정히 쓸어 올리고, 교탁 아래로 상체를 숙였다. 본체의 전원은 들어와 있었다. 숨을 들이마신 순간, 무엇인가가, 눈에 걸렸다.
거기에—사람이 있었다.
어둠 속, 책상 밑의 빈 공간. 컴퓨터 본체 뒤로 몸을 웅크린 남자가 있었다. 허름한 반소매 티셔츠, 무릎이 늘어난 트레이닝 바지. 오른팔에는 하얀 캐스트가 칭칭 감겨 있었다. 머리는 몇 날 며칠 감지 않은 듯 떡져 이마에 붙어 있었고, 그는 두 귀를 틀어막고 흔들흔들 몸을 기울였다. 철판에 가늘게 긁히는 호흡. 불규칙하고, 숨이 막힌 동물의 것처럼.
그의 왼손에, 금속이 번쩍였다. 작은 칼날? 드라이버? 모서리가 날카로운, 그 자체로 ‘가능성’을 품은 물건. 찌를 수 있고, 베일 수 있고, 던질 수도 있는—그런 가능성.
한지온의 심장은, 그 가능성에 먼저 반응했다. 쾅— 가슴 뒤에서 둔탁한 타격이 일어났고, 손끝으로 혈액이 급히 몰려나갔다. 손바닥이 미끄러워졌다. 순간 귀에서 ‘삐—’하는 얇은 피드백이 울렸다. 얼굴 속 근육들이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이럴 때, 인간의 표정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부서지면 안 됐다.
‘아이들 앞에서 자극하면 안 돼.’
생각은 놀랍도록 명료했다. 공포와 함께 달려오는 이성—그것이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그녀는 천천히, 정말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절대로 놀란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사람의 표정, 흠칫 놀란 웃음을 억지로 미소로 바꾸는 얼굴.
“얘들아.”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목소리에 의도적으로 숨을 섞었다.
“과학실에… 벌레가 있네. 우리 다시 교실로 가자.”
“에이, 벌레가 뭐라고요!”
“제가 잡을게요, 쌤. 저 벌레 잘 잡아요.”
“귀엽잖아요, 벌레.”
몇 명이 킥킥거렸고, 몇 명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교탁 쪽을 기울여 보았다. 그녀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좀 커. 위험할 수 있어. 실험은 차라리 다음 시간에 하자. 지금은—조용히, 가방 챙기고. 말없이.”
조용히, 말없이. 그 단어들은 아이들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키워드였다. ‘시끄럽게’와 ‘같이’는 불을 켜고, ‘조용히’와 ‘말없이’는 불을 끈다. 아이들이 가방을 끌어당기는 소리가 파도처럼 번졌다. 이때가 기회였다. 그녀는 반장을 가볍게 불렀다.
“민하야.”
회장 아이가 다가왔다.
“옆 반에 있는 김도진 부장님께—지금—좀 와 달라고 말씀드릴래? 아무 말하지 말고, 그냥 지금.”
민하는 상황을 단번에 읽었다. 초롱해진 눈, 입술을 다문 얼굴.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문쪽으로 뛰었다. 한지온은 그 뒷모습이 문틈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다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여기 남아 있는 아이가 한 명도 없어야 한다. 마지막 줄의 아이 두 명이 서로 떠들다가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아이들은 이내 입술을 다물고 허겁지겁 일어났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멀고 가까이서 계속 들려왔다. 아이들이 나가는 순서는 엉성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아이들이 모두 나갔다. 마지막 아이의 머리칼이 문틈을 빠져나가자, 교실은 급격히 조용해졌다—가 아니라, 더 크게 조용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소음이 사라지면, 자신이 만든 자기 소음만 남는다. 심장 박동, 숨이 쉬어지는 소리, 위장 속에서 굴러가는 공포.
그때, 문이 열렸다.
김도진이 들어왔다. 회색 셔츠의 소매를 한 단 접고, 여느 때처럼 약간 귀찮은 표정. 그는 상황을 둘러보는 데 1초, 한지온의 얼굴을 스캔하는 데 1초, 그리고 그 표정을 읽는 데 1초를 썼다. 눈빛이 아주 조금,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팔짱을 천천히 풀었다.
“벌레가 어디 있는데요?”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놀랍도록 건조해서, 안심하게 만드는 위험한 톤. 아이들이 있었더라면 킥킥거렸을 테지만, 지금은 그녀 혼자였다. 한지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손가락으로 책상 밑을 가리켰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김도진은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굽혔다. 어둠에 눈이 적응하기 전에, 그는 이미 ‘그것’을 보았다. 더벅머리, 캐스트, 웅크린 몸, 그리고 반짝이는 금속의 윤곽. 그는 아주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 들숨은 소리가 나지 않았으나, 그의 어깨선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는 일어났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 단정하게 말한다.
“아이들 데리고 빨리 교실로 가세요. 정수학 부장에게도 연락하시고.”
문장엔 알맹이만 있었다. 왜, 어떻게, 무엇을—전혀 없이 해야 할 일만 있었다. 그의 어조는 평소의 냉소를 벗어던지고 ‘결정’만 남긴 어조였다. 한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꿈치가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느낌. 그래도 움직였다. 문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문턱을 넘기 직전, 뒤에서 금속이 아주 작게 ‘딸깍’ 울렸다. 아니, 딸칵—문고리였다. 그녀가 돌아보기도 전에, 문 안쪽에서 철컥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잠금.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김도진이 문손잡이 위에 손을 얹은 채, 여전히 문 안쪽에 서 있었다.
“부장님… 지금 뭐 하시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빛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 눈빛엔 설명이 필요 없었다. 차갑고 단단한 결의와, 아주 얇은 막처럼 깔린 애절함. 내가 남겠다. 당신은 가라. 그의 시선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저절로 떨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극히 짧은 순간, 그녀는 무모하게도 ‘가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할까? 고개를 저을 것이다. 부정할 틈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웃을지도 모른다. 그의 특유의, 남의 마음 따위에 어느 정도의 애정을 보태지 않는 쓴웃음. 그녀는 그 웃음을 상상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웠다.
김도진의 입술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가세요.”
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입모양만으로도 충분히 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문 밖으로 한 걸음 내딛자, 문은 부드럽게 닫혔다. 그리고 다시 철컥. 두 번째 잠금이 그녀의 등 뒤에서 무겁게 내려앉았다.
복도 공기가 달라졌다. 교실과 교실 사이의 길고 좁은 복도. 잠시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하던 아이들의 소리가 멀리서만 파편처럼 흘렀다. 한지온은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대피시킨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그 경계는 애매하게 흔들렸다. 교사란, 때로는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해야 버틸 수 있는 존재였다.
그녀는 아이들을 본반으로 밀어 넣었다. 의자에 앉히고, 창문을 닫고, 커튼을 조금 내려 외부 시야를 차단하고, 문을 잠갔다. 말없이. 아이들의 눈이 그녀를 따라왔다. ‘벌레’라는 단어 하나로 이 상황을 버티게 만들 수 있을까? 아이들 중 몇 명은 진지한 얼굴로, 몇 명은 장난기가 아직 남은 얼굴로, 몇 명은 눈동자에 물기가 어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려는데, 손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화면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터치가 엉뚱한 아이콘을 건드렸다.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바지 주머니 안쪽에 잠깐 꾹 눌렀다. 손끝의 감각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호흡을 세었다. 하나, 둘, 셋. 화면을 탭 했다. 1-1-2.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 머릿속에 참혹한 문장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초등학교 인질극… 교사 사망.”
그 뉴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 퇴근길 카페의 TV에서 봤던 속보였다. 화면 아래 빨간 바가 흐르고, 앵커의 목소리는 비현실적으로 낮았다. 경찰차 파란 불빛, 교실 창에 비친 사람 그림자. 총과 방패를 든 경찰이 층계를 뛰어올랐고, 그 사이로 기자의 벼락처럼 빠른 멘트가 섞였다.
“괴한은 3시간 동안 아이들을 교실에 가둔 채 흉기를 들고 위협했습니다. 담임교사는 아이들을 보호하려다 괴한의 흉기에… (잠시 끊김) … 사망했습니다.”
그날, 그녀는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교사’라는 단어가 단 한 번의 동정도 없이 차갑게 잘려나가 화면 아래 자막으로 미끄러지는 걸 보았다. 그 자막은 너무 가벼워서, 너무 쉽게 흘러가서, 믿기지 않았다. 단지 ‘일’이었다. 누군가의 생과 죽음이, ‘사건’으로 불리고, ‘대책’이라는 단어 아래 조심스럽게 묻히는 일.
지금, 그 뉴스가 그녀의 귓속에서 다시 재생되었다. 고막을 긁는 듯한 앵커의 톤. “예고 없는 공포.” “안전 사각지대.” “정신질환 병력.” 뭉툭한 단어들이 기계처럼 반복되었다. 그녀는 목 뒤를 문질렀다. 손끝에 닿는 땀의 촉. ‘여기가 아니어야 한다.’ ‘오늘이 아니어야 한다.’ ‘나여선 안 된다.’ 그런데—‘지금’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는 벽에 등을 붙이고 천천히 바닥에 미끄러졌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이 여전히 떨렸다. 등 뒤로 콘크리트의 차가움이 전해졌다. 거기—과학실 문 너머에 남아 있는 한 사람. 여기—문 안에서 떨고 있는 또 한 사람. 책상 밑의 어두운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림자가 길게 벽에 드리워지고, 무언가 차갑게 빛나는 게 번쩍인다.
한지온은 더는 다리를 버티지 못했다. 차갑고 단단한 나무 문짝이 그녀의 등을 받쳐 주었지만, 심장은 그 어떤 벽도 막아낼 수 없을 만큼 요동쳤다. 아이들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놀란 눈빛, 숨죽여 그녀를 바라보던 작은 얼굴들,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는 고요함.
“어떡하지… 김도진 부장님이…”
목 안쪽이 타들어 가는 듯 아팠다. 눈물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솟구쳤다. 그러나 주저앉아 울어버릴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본능처럼 발길을 돌렸다. 과학실 근처의 유일한 믿을 만한 사람. 정수학. 그의 교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거의 쓰러질 듯 문을 두드렸다. 주먹이 나무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부장님…! 김도진 부장님이… 과학실에… 지금 위험해요. 저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저 때문에…!”
목소리는 거의 울음에 가까웠다. 문 안에서 수업하던 아이들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고, 곧이어 문이 벌컥 열렸다. 정수학의 얼굴이 눈앞에 드러났다. 그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잠시 멈추는 듯했으나 곧바로 표정이 굳어졌다. 눈동자가 번쩍이며 상황을 이미 결론지었다.
“얘들아, 조용히 자습하고 있어!”
탁— 책상이 뒤로 밀리듯 움직였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손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번호를 누르는 동작이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고 정확했다.
“철아.”
숨소리마저 날카롭게 잘라냈다.
“과학실로 빨리 와. 지금 바로. 도진이 위험해.”
단 세 마디. 군더더기 없는 명령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정수학은 교실 문을 확 열고 나섰다. 순간, 교실 안의 아이들이 웅성거렸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발소리가 복도에 쾅, 쾅 울렸다. 마치 단단한 북소리처럼 학교 전체에 메아리쳤다.
한지온은 그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머리가 하얘졌다. 그녀는 주저앉을 뻔하며 벽에 손을 짚었다. 그러나 정수학은 돌아보지도 않고 달렸다. 그의 걸음은 이미 다른 세계에 있었다.
잠시 후, 반대편 복도 끝에서 또 다른 발걸음이 쏟아져 나왔다. 독고철이었다. 6학년 연구실 문을 박차고 나온 듯, 얼굴에는 놀람과 결연이 동시에 얹혀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정수학의 짧은 대답.
“과학실이다. 도진이가 안에 있다.”
그 두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속도를 올렸다. 땀방울이 이마에 맺히기도 전에, 그들의 발걸음은 이미 번개처럼 바닥을 치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붙잡은 한지온은 정수학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남아 있는 것을 떠올렸다.
“경찰 불러요. 빨리!”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켰다. 화면이 미세하게 흔들려, 잠금 해제조차 몇 번을 시도해야 했다. 겨우 112를 눌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112입니다.”
“여기… 참결초등학교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며 튀었다.
“과학실에… 누가 숨어 있어요. 지금… 지금 너무 무섭고… 제, 제 때문인 것 같아서… 제발 빨리 와주세요!”
숨이 끊어질 듯 쏟아졌다. 전화를 받은 경찰은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그녀는 이미 귀로 제대로 듣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목에서 흐느낌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순간, 머릿속에서 아이들의 얼굴이 다시 번쩍였다. 의자에 앉아 그녀만 바라보던 눈동자. ‘괜찮다’라고 말해 주길 기다리는 작은 얼굴들. 그 시선들이 그녀의 등을 다시 밀었다. 한지온은 이를 악물었다. 울음을 삼키며 벽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던 다리에 다시 힘을 싣자, 구두 굽이 바닥에 단단히 닿았다.
“끝까지 해야 해.”
그녀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아이들 지켜야지.”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발걸음은 똑바로 교무실을 향했다. 전력 질주하듯 달리면서도, 어깨너머 복도를 흘끗 보았다. 멀리서 두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수학과 독고철. 굳건한 두 어깨가 복도를 가르며 과학실로 향하고 있었다. 한지온은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은, 뒤에서라도 그 멈추지 않는 걸음을 이어 줘야 했다.
정수학과 독고철의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쾅, 쾅— 헐떡이는 숨소리가 쫓아왔다. 긴장으로 숨이 가빠졌지만, 입은 멈추지 않았다. 정수학이 이를 악물고 먼저 말을 뱉었다.
“철아, 네가 먼저 들어가라. 형은 윤이, 율이 아빠다. 내가 잘못되면… 우리 애들, 애비 없는 자식 만들 수는 없잖아?”
독고철이 황당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형, 그게 말이에요 막걸리예요? 난 애가 없잖아.”
“그래! 그러니까 니가 먼저 들어가야지.”
정수학이 팔을 내저으며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내가 잘못되면 우리 집은 와이프 혼자 남잖아요. 형은 그래도 늠름한 아들 둘이 형수님 지켜 주잖아.”
독고철의 목소리는 헐떡임 속에서도 억지가 가득했다. 정수학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형 요즘 갱년기라 체력도 떨어졌다. 힘도 읎어. 그러니까 네가 먼저 가. 넌 새벽마다 헬스에 수영까지 하잖아. 20대 때보다 몸도 훨씬 좋고.”
독고철이 흘끗 째려봤다.
“그래 봤자지 뭐. 형님 아직도 몸만 보면 마네킹이구만.”
“맞아, 마네킹처럼 뻣뻣해. 아무것도 못 피해.”
정수학이 씩 웃으며 받아쳤다. 독고철도 잠시 킥 하고 웃으며 말했다.
“맞아. 형은 옛날부터 싸움만 나면 그렇게 맞았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렇지!”
정수학이 발끈했다.
“맞다 형, 예전에 마취도 안 하고 꿰맸잖아. 내가 깜짝 놀랐다니까. 관우인 줄 알았어. ‘이 술이 식기 전에 머리를 다 꿰매 주세요’ 하던 그 대사 아직도 안 잊혀.”
“그건 의사가 술을 마셔서 마취를 못하니깐 그냥 꿰맨 거잖아.”
두 사람은 숨을 몰아쉬며 달렸지만, 입만은 싸움처럼 붙어 있었다. 그러다 어느덧—과학실 앞에 도착했다. 쾅, 쾅— 두 사람은 동시에 멈춰 섰다. 문 앞에서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가 먼저!”
아니 형이 먼저!”
손이 공중에서 부딪치며, 마치 무술 대련이라도 하는 듯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됐다. 긴장과 코미디가 뒤섞인 이 실랑이에, 두 사람은 순간 서로 얼굴을 보더니 미친놈들처럼 실소를 터뜨렸다.
그때였다.
안에서 쾅!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웃음은 단칼에 잘려 나갔다.
정수학이 숨을 고르며 낮게 말했다.
“가자.”
독고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문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하나… 둘… 셋!”
발이 문을 차는 순간, 와장창!
두꺼운 유리문이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며 바닥에 흩어졌다. 조각들이 바닥에서 날카로운 빛을 반사했다.
안으로 뛰어든 두 사람.
“도진아!”
거친 외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돌아온 건, 낮고 단호하며 짜증 난 목소리였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김도진의 목소리였다.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직후, 문이 닫히며 철컥— 하는 잠금 소리가 공간 전체를 가득 메웠다.
숨소리조차 멎는 듯한 정적.
김도진은 교탁 옆에 서서 짧게 숨을 골랐다. 가슴이 크게 들썩이지 않도록, 마치 자신에게조차 들키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러운 호흡.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다. 교사로서 무대 위에 섰을 때처럼, 감정을 봉인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책상 밑에서 스르륵, 검은 그림자가 기어 나왔다. 마치 오래된 서랍에서 먼지가 흘러나오듯, 느릿하게,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속도로.
남자는 키 180쯤. 덩치는 컸으나, 힘의 크기가 아니라 비대한 살집으로 채워진 체형이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씻지 않아 기름에 눌린 더벅머리가 눈을 가렸고, 피부에는 땀이 번들거렸다. 오른쪽 팔에는 하얗게 칭칭 감긴 캐스트. 손아귀에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달그락거렸다. 가까이서 보니—자동차 키였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 검은 링에 차곡차곡 꿰여 흔들릴 때마다 차가운 금속성이 공간을 긁었다.
김도진은 단숨에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곧 자신을 다잡았다. 목소리를 최대한 낮고 침착하게 눌렀다.
“누구시죠?”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딘가에 매달린 듯한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제가 안 했어요.”
그 한마디.
김도진은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이 남자의 상태가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 있음을. 문장은 단순했으나, 어딘가 맞지 않았다. 상황과 문맥이 끊겨 있었다. 김도진은 두 팔을 천천히 들었다. 손바닥을 펴, “나 아무것도 없다”는 몸짓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안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천천히, 정수기 쪽으로 움직였다. 뒤를 보이지 않으려 교탁을 타고 돌며, 시선을 결코 떼지 않은 채 발을 옮겼다. 컵에 물을 따라 건네며 말했다.
“물 한 잔 하시면서 숨 좀 고르세요.”
남자는 그 말에 잽싸게 손을 뻗어 컵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의외로 단정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김도진은 순간, 낯선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방금 전까지 웅크려 있던 모습과 달리, 태도는 지나치게 예의 바르다. 팔이 캐스트로 묶여 불편해 보이는 손짓은 진짜 같았다.
그는 최대한 평온하게 목소리를 유지했다.
“자리에 앉아서 좀 쉬시는 게 어때요? 몸도 힘들어 보이시고.”
그가 시간을 벌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몇 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심장은 이미 체감하고 있었다. 불과 3분이 지났을 뿐인데, 1시간을 버틴 듯했다.
그 순간, 남자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빨리 가라고! 뭐 하는 거야! 여기 있으면 그놈들한테 잡힌다고!”
머리를 부르르 떨며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금속 키들이 바닥에 달그락거리며 부딪혔다.
그러다—또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건 나쁜 짓이야. 제발 하지 말자.”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분명 달랐다. 두 사람의 대화처럼, 아이들이 싸우듯 부딪히는 이중음성.
김도진의 눈빛이 단번에 매서워졌다.
“… 조현병.”
그는 속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말로만 듣던 그 증상이, 지금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 혹시 거기 누가 있나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침입자는 갑자기 싸늘한 눈빛으로 김도진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팔을 치켜들었다.
“아저씨, 우리 나가게 해 줘요! 빨리!”
그 순간, 김도진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번뜩였다. ‘우리?’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듯 건조했으나, 그는 침착하게 물었다.
“… 애야, 너 몇 살이니?”
남자의 목소리는 갑자기 굵고 낮게 바뀌었다.
“죄송해요. 제가 자꾸 귀에 이상한 말이 들려서요. 너무 괴롭네요.”
김도진은 그제야 한숨처럼 짧게 내쉬었다.
“아… 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남자는 고개를 푹 떨군 채 흐느끼듯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정신 차려보니 여기 있었어요.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흑흑.”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깨가 들썩이며 오열하는 모습은, 순간적으로 평범한 사람의 고통처럼 보였다. 김도진의 마음이 찰나에 흔들렸다. 딱하다… 그런 감정이 스쳤다.
그러나—
쾅!
과학실 유리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수백 개의 유리 파편이 터지듯 쏟아져 들어왔다. 외부의 빛이 파편 사이로 날카롭게 번쩍이며, 순간적으로 교실 안을 하얗게 물들였다. 김도진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다. 침입자의 눈이 커졌다. 키 뭉치가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새로운 긴장이 시작되었다.
쾅!
과학실 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정수학과 독고철이 동시에 몸을 날려 안으로 들어왔다. 숨은 목구멍까지 차올라 헐떡였지만, 두 눈은 곧장 교탁 앞으로 향했다.
“도진아!”
“김도진, 괜찮아?”
교탁 옆에 서 있던 김도진이 두 눈을 치켜뜨며 입술을 우스꽝스럽게 크게 움직였다.
‘뭐 하는 거야?’
손가락까지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보내자, 두 사람은 멈칫하며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정수학이 어깨를 으쓱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구하러 왔는데, 뭐가 문제야? 독고철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순간, 교탁 아래 웅크리고 있던 침입자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두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때리지 마세요!”
목이 터져라 울부짖는 소리가 과학실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반짝이던 자동차 키 뭉치가 덜컥 떨어져 바닥으로 굴렀다. 달그락거리는 쇳소리가 유리 파편 위로 메아리쳤다.
“이거… 이거 드릴게요!”
그는 두 손으로 키를 떠받들어 내밀며 목이 메인 소리를 질렀다.
“벤츠도 있고, 아우디도 있고… 다 드릴게요! 제발, 저 용서해 주세요. 두 번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정수학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내가 지금… 차키 협상을 하고 있는 건가? 독고철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형, 이거… 코미디 아니야?”
김도진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쥔 채,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제발 좀…”
그러나 침입자는 멈추지 않았다.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와 세 사람 발밑에 이마를 박으며 손을 비볐다.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이 바닥 유리 파편 위로 덮이며 반짝였다.
“살려주세요!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엄마가 아파요! 제가… 제가 잠깐만 훔친 거예요. 돈이 필요해서… 제발, 제발 때리지 마세요.”
정수학과 독고철은 동시에 뒷걸음질을 치며 서로 등을 밀어댔다.
“야, 네가 더 가까워.”
“아니, 형이 더 앞서 있었잖아.”
말은 다투듯 이어졌지만, 두 사람 모두 발은 문 쪽으로만 움직였다. 김도진은 그 광경을 보며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이게 뭐 하는 코미디야, 진짜…”
그때였다. 뒤쪽 문이 덜컥 열리며 경찰 두 명이 뛰어 들어왔다. 앞에는 젊은 순경, 뒤에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형사였다.
“움직이지 마!”
짧은 명령이 과학실에 울려 퍼졌다. 형사가 상황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 무단 침입한 분이 누구죠?”
세 부장은 동시에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저 사람입니다.”
형사가 눈썹을 찌푸렸다.
“근데… 지금 상황이?”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무릎을 꿇고 울부짖는 침입자가 있었다. 침입자는 경찰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무서워요! 때리지 마세요!”
형사의 표정이 더더욱 복잡해졌다. 그는 잠시 세 부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선생님들이… 때리신 건 아니죠?”
“예???”
정수학이 목청을 돋우며 말했다.
“아니라고요! 저희가 왜 때립니까!”
독고철도 양손을 내저었다.
“우린 그냥… 문을 열고 들어온 거예요. 아니, 문이 잠겨 있어서 발로—”
그러다 부서진 문짝을 보고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아, 이건 좀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김도진은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허공을 바라봤다.
“… 진짜 미치겠다.”
형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 분도 같이 가주시죠.”
“예?? 아니라니까요!”
세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복도 끝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교장이 미묘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입술은 파르르 떨고 있었지만, 억지로 태연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다녀오세요. 세 분, 부장님.”
순간, 과학실 안은 고요에 잠겼다. 정수학은 허탈하게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고, 독고철은 바닥의 차키를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김도진은 고개를 들어 경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정말, 다시 방학하고 싶다.”
과학실 안에는 긴장과 황당함,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코미디가 한데 뒤섞여 흘러갔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교무실 창가로 붉은빛이 스며들었다. 하루 종일 학교가 뒤집힌 사건이 마무리되고, 남아 있던 부장 교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신병자였대.”
교무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심각한 조현병이라던데?”
옆에 앉아 있던 연구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하… 진짜 큰일 날 뻔했네요. 흉기라도 들고 휘둘렀으면 어쩔 뻔했어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3학년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참 대단하시네, 부장님들. 이런 일 있을 땐 남자들이 있어서 든든하잖아요.”
4학년 부장은 팔짱을 끼며 툴툴거렸다.
“난 갑자기 3반 봐 달라 그래서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경찰이 오르고 내리고… 내려올 땐 다 잡혀가길래, 무슨 한판 붙은 줄 알았다니까.”
교무부장이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경찰서로 그 사람 가족들이 와서 선처해 달라고 난리였다더라. 원래 자꾸 물건 훔치는 습관이 있대. 그 차 키들 있잖아, 전부 민원 보러 온 사람들이 맡겼던 거라던데? 직원인 척 받아선 차 몰고 도망가고. 경찰도 원래 찾고 있었는데, 설마 여기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근데 또 집은 엄청 부자래. 벤츠, 아우디 키에다 집 열쇠까지 몽땅 들고 있었다잖아.”
2학년 부장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거들었다.
“그래도 김도진 부장이 진짜 잘했대요. 조용히 타이르고 시간 끌고. 그런데 갑자기 과학부장이랑 6학년 부장이 문을 발로 차고 부쉈다던데요?”
1학년 부장이 혀를 찼다.
“하여간 과학부장, 일은 잘하는데 사고도 잘 쳐. 그냥 열면 되지, 왜 차.”
체육부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세 분이 워낙 친하니까 그랬겠죠. 괜히 당할까 걱정돼서.”
정보부장은 계산기 두드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문 수리비가 꽤 나올 텐데요.”
2학년 부장이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씀을. 애들한테 사고 안 난 게 천만다행이죠. 우리 선생님들도 무사하고.”
1학년 부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이번에도 한지온 선생님 반이었다면서요? 그 선생님은 참… 손이 많이 가. 작년에도 큰일 치더니, 올해도 또.”
그 순간, 교무실 문이 덜컥 열렸다.
정수학, 김도진, 독고철 세 사람이 나란히 들어섰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표정만큼은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정수학이 먼저 입을 열었다.
“팔자죠, 뭐. 팔자를 어떻게 가르쳐요? 무당도 아니고.”
김도진은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걸터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한지온 선생님이 정말 기지 있게 잘했잖아요. 침입자 자극하지 않고 조용히 불러서, 아이들 안전하게 대피시킨 건 대단했죠. 작년에 많이 힘들었을 텐데, 이번엔 확실히 성장한 것 같네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덧붙였다.
“… 부장님이 잘 가르쳐서 보내셔서 그런 거겠죠.”
칭찬 같지만 묘하게 따끔한 말투였다. 교무실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바로 그때, 문이 다시 열리며 교감 한지수가 들어왔다. 얼굴은 긴장으로 붉게 상기돼 있었다.
“뭐, 어쨌든 잘 처리된 것 같습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정말 다행이에요. 학교 홈페이지에 안전 안내문 빨리 올려야겠네요. 인성부장, 체육부장, 바로 처리 부탁드려요.”
교감은 곧장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 분 부장님, 경찰서까지 가서 조사받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힘드셨을 텐데, 조퇴하시고 들어가서 쉬세요.”
정수학, 김도진, 독고철은 잠시 서로를 보았다. 그러나 말은 없었다. 정수학이 낮게 중얼거렸다.
“… 저희 과학실 치우러 가야죠. 문도 그렇고.”
김도진이 곧바로 맞받았다.
“난 아니에요. 둘이 찼잖아. 교감 선생님, 저 먼저 조퇴 올리겠습니다.”
교무실 안에 씁쓸한 웃음과 길게 늘어진 한숨이 동시에 흘렀다. 긴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교장실, 혼쭐나는 세 부장. 교장실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교장의 책상 위에는 아침에 갓 닦은 듯 반짝이는 유리컵과, 손에 쥔 스마트폰이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문은 왜 부숴! 노크하면 되잖아, 노크!”
교장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정수학이 허둥대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도진이가 혹시 당했을까 봐… 긴박했습니다.”
김도진은 무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분과 저는 침착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독고철은 손을 흔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저는 발이 닿지 않았습니다. 정수학 부장님 발이 더 빨랐습니다.”
정수학이 곧장 반박했다.
“제가 요새 체력이 많이 약해져서요. 독고철 부장은 요새 마라톤도 10킬로씩 뛴다잖아요. 하체 힘이 어마어마합니다.”
“아니, 그건 근지구력이지 순간 폭발력이 아니잖아요. 절대 제 힘이 아닙니다.” 독고철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건 전적으로 정수학 부장의…”
교장이 책상을 탁 치며 소리를 질렀다.
“셋 다 주의야!”
정수학은 마지막으로 한마디 얹었다.
“교장선생님, 저 진짜 목숨 걸고—”
“학생을 지켰습니다.”
김도진이 빠르게 덧붙였다. 독고철은 괜히 입술만 씹었다. 교장이 다시 손사래를 쳤다.
“말로만 주의야! 담부터는 똑똑똑, 노크를 하고 쓱, 문을 여는 거야. 기물 파손은 어쩔 수 없어. 수리비는 실장님이 청구할 거다. 셋이 똑같이 나눠 내. 그리고…”
그는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 록페스티벌에서 공연했어?”
세 사람은 동시에 굳어졌다.
“아닙니다.” 정수학이 단칼에 잘랐다.
“그럴 리가요.” 김도진이 시선을 피했다.
“… 실력이…” 독고철이 중얼거렸다.
교장이 화면을 내밀었다.
“이 사진은 뭐야? 신나 보이는데?”
독고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저흰 문신도 없습니다.”
“진짜 경고 준다.”
교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김도진이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고백했다.
“맞습니다. 제가 그 무대에서 30분간 공연했습니다.”
정수학이 다급히 말을 받았다.
“근데 저희, 돈 한 푼 안 받았습니다. 전부 기부 차원에서 한 거고… 신고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인맥으로 섭외된 겁니다.”
교장은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너네들 돈 주고 세울 리 없으니까… 제발 좀 조심 좀 해라. 너희들 때문에 내가 진짜… 특히 정수학, 너 그만 좀 해라. 아휴—”
김도진이 슬쩍 교장의 스마트폰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 사진은 누가… 혹시 교장선생님, 직접 오셔서—”
“헛소리하지 말고 나가!”
교장이 버럭 소리쳤다.
세 사람은 동시에 목소리를 모았다.
“네!”
쫓기듯 교장실 문을 나서는 세 부장의 뒷모습엔 왠지 모를 연대감과 허탈함이 묻어 있었다. 세 부장은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고, 뒤에서는 묵묵한 시선이 따라왔다.
잠시 뒤, 다른 부장들이 하나둘 흩어져 각자의 교실로 돌아갔다. 연구실로 향하던 김도진의 어깨에 톡, 가벼운 손길이 닿았다. 그는 돌아보았다. 한지온이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과 피곤이 묻어 있었지만, 눈빛은 전에 없이 단단했다.
“부장님.”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했다.
“오늘… 너무 감사합니다.”
김도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많이 놀랐죠? 괜찮아요?”
한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정말 감사해요.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죄송해요.”
“뭐, 어쩔 수 없죠.”
김도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얼른 퇴근하고 쉬세요. 교감 선생님도 조퇴하라고 하셨잖아요.”
잠시 머뭇거리던 한지온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근데 공연, 너무 멋있었어요.”
김도진이 순간 당황스레 눈을 깜빡였다.
“공연? 아… 봤어요?”
“네, 우연히. 오늘도 너무 멋있으셨고, 무대도요.”
김도진은 머쓱하게 웃다가, 곧 눈빛을 진지하게 바꿨다.
“선생님. 공연보다도 오늘은… 과학실에서 정말 잘 대처했어요. 침착하게 저 불러주고, 아이들 안전하게 대피시킨 거 덕분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멋진 선생님이었어요.”
순간, 한지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얼굴이 붉게 물들며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 부장님, 우리… 밥 먹어요. 같이.”
김도진은 눈을 크게 뜨며 잠시 말을 잃었다.
“…”
복도의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리며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여름의 끝자락, 가을로 이어지는 시간 사이에 새로운 무언가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