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If you're thinking without writing, you only think your're thinking." (Leslie Lamport)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인데, 정작 내용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얼마 전 사석에서 여러 명이 모여 AI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분이 아주 오래된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요즘 다들 데이터, 데이터 말을 하지만 그건 새로운 철학이 아니야.
오래전 빌게이츠는 『생각의 속도』라는 책에서 이미
데이터와 정보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기업의 성패를 가를 거라고 말을 해왔어."
그 말 자체는 새롭지 않았지만 반가웠다.
20여년 전에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 이름이 문득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생각의 속도』
사회 초년생 시절에 난 그 책을 읽으며,
세상을 앞으로 굴리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는지 엿보았고
그의 깊은 사고와 생각의 스케일에 감동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책을 감명깊게 읽었다는 기억, 그 빛바랜 책이 책꽂이에 꽂혀있다는 기억이 날 뿐
정작 내용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그 책에서 데이터 이야기를 했다는 말은 정말 생경했다.
집에 돌아와서 먼지를 털고 오랜만에 그 책을 다시 펼쳐 보았다.
당시에는 데이터라는 말보다는 '수치적 정보'라는 말을 썼지만 정말 그 말이 있었다.
한 챕터를 온통 할애하여 정보의 수집, 처리, 활용을 강조하고 있었다.
1999년에 말이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책을 읽은 것일까, 읽지 않은 것일까?
분명 감명 깊게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과 나는 무엇이 다른 걸까?'
나는 밑줄을 그으며 그 낡은 책을 다시 정독하기 시작했다.
버진그룹의 회장 리처드 브랜슨은 포브스(Forbes)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맥주잔 받침 위의 메모가 천억 원의 투자가 되었고, 3년 뒤 3조 원의 회사가 되었다."
그는 엉뚱한 아이디가 넘치는 몽상가이기도 했지만 메모광이기도 했다.
그는 '집에 가서 적어야지' 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회사 가서 떠올려야지' 하지 않았다.
그냥 생각이 든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급히 펜을 꺼내 몇 줄 휘갈겨 썼고
그 것이 훗 날 조 단위 사업을 만드는 씨앗이 되었다고 했다.
생각은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허무하다.
머릿속에서 반짝이는 순간에는 세상을 바꿀 듯 거대해 보이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뭐였더라?' 하다가,
나중엔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는다.
그러면 이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던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생각했다고 생각했을 뿐, 진정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언젠가부터는 글을 끄적이는 게 습관이 되었다.
문득 떠오르는 걸 적어 남긴다.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아침에 눈을 뜰 때, 샤워 중에 문득 떠오르는 것들을
정제하지 않고 날 것으로 끄적끄적 남긴다.
책을 읽을 때도 가급적 빌려 읽지 않고 사서 읽는다. 밑줄을 긋기 때문이다.
핵심은 그 다음이다.
수시로 내가 쓴 글들과 메모들을 넘겨보고
틈 날 때마다 그 책들을 꺼내 밑줄친 구절을 반복해서 읽는다.
범죄 현장을 다시 찾아오는 범인처럼, 반복해서 다시 찾아야 그 때 완성이 된다.
한 다섯 번쯤 그렇게 하면 머리에 남는다. 이제 비로소 내 생각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머리 속에 남은 생각들을 점들로 이어
계속 연결하고 연결하면 그게 결국 나만의 '관점'이 되고 '철학'이 된다.
열매 맺지 못한 생각은 생각이 아니다.
글 속에 붙잡아 두어야 생각이 된다.
그리고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그제야
생각이 입으로 나와서 내 철학이 되며, 행동으로 나와서 내 삶이 된다.
아무리 빛나도 문득 떠오른 생각은 내 것이 아니다.
무정차로 지나치는 역처럼, 우리 시간을 스쳐가는 먼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