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The job you seek isn't out there in some job description. It's already inside you, aching to get out.” (John Tarnoff)
교만이라는 게 얼마나 사소하게 찾아오는지 깨닫게 되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후 한국에 돌아와 병역특례로 삼성전기에 들어갔다.
기술총괄 조직의 무선통신팀에 배치되었다.
Wi-Fi 무선랜 카드를 동작시키는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를 맡았다.
하드웨어를 동작시키는 소프트웨어 개발은 비교적 단순했다.
Chip 회사가 준 Spec. 책을 공부한 후 거기 쓰여있는 대로 코딩을 하면 하드웨어가 동작헸다.
다음 Spec. 책이 도착하면 또 그걸 읽으며 다음 프로그램을 짜고...
몇 번이 반복되면서 '이걸 언제까지 해야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님을 보니 40대 중반이 되어서도 똑같은 업무를 계속하고 계셨다. 내 미래가 보였다.
개발 업무가 싫지는 않았지만
세상 변화의 언저리에서 내가 기여하는 부분이 너무 작고 미미하게 느껴졌다.
이걸 반복하며 내 커리어를 다 쓴다고 생각하니 답답했다.
이런 일을 계속 '직접' 반복하기보다는
더 큰 관점에서 필요한 전략을 짜서 실행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업무를 하고 싶었다.
그게 세상에 더 큰 Impact를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병역특례 5년이 끝난 후 LG전자로 이동하였고 전략기획 업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당시 내가 배치되었던 CTO 기술전략팀은 핵심 부서였다.
LG전자의 모든 선행기술들을 책임지고 있어서 미래 트렌드와 다양한 신기술들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처음엔 기획이 뭔지 잘 몰랐지만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열심히 발로 뛰었다.
신사업을 하라고 해서 새로운 분야들을 밤낮없이 공부하고 전문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큰 그림을 그리고, 분석을 하고, 논리적으로 정리를 하고,
어떻게 하면 더 설득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고, 반복 연습을 하고, 발표를 하고...
그렇게 결국 원하던 '시키는' 업무를 하게 되었다.
재미있었다.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느낀 건 '한계'.
큰 관점에서 문제를 정의하고 전략을 짜는 것이 중요한 건 맞는데,
그리고 더 큰 Impact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맞는데,
마지막에 진정한 가치를 만드는 것은 결국 그걸 직접 '해내는' 사람이더라는 것.
아무리 내가 멋진 전략을 수립하더라도
누군가가 실제로 구현해서 고객들에게 전달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흔한 종이 문서일 뿐이더라는 것.
그래서 다시 난 뭔가를 직접 '해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사업 업무로 이동하려 노력하였다.
CTO부분 조직책임자 중 거의 유일하게 사업가 트랙을 타서 교육을 받았다.
Tone+ 헤드셋 사업을 하는 사업부에 배치되어 사업을 해보기도 하고
LG그룹의 시니어케어 사업을 직접 해보겠다고 그걸 구체화하기도 했다.
그러다 오픈이노베이션을 총괄하는 스테프 조직으로 배치가 되었는데
몇년을 그렇게 스태프 역할을 하다가
고민 끝에 다시 직접 사업을 해볼 수 있는 현대글로비스 신사업 본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현대차 그룹에는 아무 연고나 아는 사람들도 없었지만
"여기 할 일 많으니 빨리 와서 사업해봐라" 하신 사장님의 말씀에 용기를 냈다.
인생의 큰 모험이었다.
다행히도 지난 3년간 매출 4천억 원 사업부의 책임자로서 사업을 리드해 볼 수 있었고
다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독특한 경험과 소중한 사람들을 얻을 수 있었다.
지난 20여년간의 커리어를 돌아보니 웃음이 났다.
그 때는 매우 간절했고 조급하기도 했는데, 돌아보니 모든 게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개발은 개발대로, 전략은 전략대로, 사업은 사업대로
각각 만들어 내는 가치가 따로 있고
그것들이 모여 세상을 굴러가게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 때 꼭 필요했던 고민들을 하며 그 시기를 지나왔다는 게 다행이었다.
당연한 사실을 먼 길로 돌아오며 체득한 느낌.
그 후 주니어 분들과 이야기를 할 때 본인들의 미래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곤 했다.
"상무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이렇게 스태프 역할만 해서 나중에 정말 경쟁력이 있을까요?"
"상무님, 저도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요즘은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애들도 이제 커가는데 어떻게 해야 더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을지...
해외로 나가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는 게 좋을까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과거에 커리어를 바꾸며 했던 고민들이 떠올랐다.
'그럴 수 있지. 한참 고민이 많을 때네.
Been there, done that. 나도 비슷한 시기를 다 지나왔어.
조금만 기다려 봐.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 금세 생각이 또 바뀔 거야...'
순간 놀랐다.
좋게 말해서 공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가 먼저 그와 비슷한 고민을 겪어 왔다는 이유만으로
무의식 중에 그 고민들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교만이라는 게 얼마나 사소하게 갑자기 찾아오는지...
공감과 교만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창피했다.
들키기 싫어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딘가에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깨달음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게 성숙함의 정도도 아니고 인사이트의 크기도 아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우리가 진짜 얻어야 하는 건
이미 다 안다는듯한 교만이 아니라 내 부족함에 대한 자각이다.
세상의 일부를 경험하고 세상을 다 아는 냥 건방을 떠는 건 스스로 애송이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삶의 경험은 누구나 다르다. 저마다의 계절이 있고 시간이 있다.
내가 똑같은 경험을 해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맞닥뜨렸는가에 따라 깨달음이 다른데
어찌 타인의 삶과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헤아릴 수도 없다.
겸손하자. 친절하자. 수 없이 다짐하고 되뇐다.
좋은 커리어는 최고의 도착지가 아니라 최선의 과정이다.
결국 중요한 건
그래서 '뭔가 의미있는 걸 해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행복했는가'이다.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엔 결국 그 두 가지만 남는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조바심 내지 않으며
내가 중요하다 믿는 걸 하나씩 완수해서 지워나가고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게
최고의 삶이고 최고의 커리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