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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my Park Jun 25. 2024

059 Been there, Done that

Jailbreak

“The job you seek isn't out there in some job description. It's already inside you, aching to get out.” (John Tarnoff)


교만이라는 게 얼마나 사소하게 찾아오는지 깨닫게 되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후 한국에 돌아와 삼성전기에 들어갔다.

대기업들이 미국에 와서 리쿠르팅 행사를 할 때 참여했다가 운이 좋아서

병역특례 입사를 미리 약속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술총괄 조직의 무선통신팀에 배치되었다.

Wi-Fi 무선랜 카드를 동작시키는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를 맡았다.

하드웨어를 동작시키는 소프트웨어 개발은 일반 앱을 개발하는 것과는 달랐다.

Chip을 개발하는 회사가 만든 큰 Spec. 책을 공부한 후

거기 쓰여있는 대로 코딩을 하면 무선랜 카드가 동작하게 되는 원리였다.

두꺼운 Spec. 책이 도착하면 숙지한 후 프로그램을 짜고

다음 책이 도착하면 또 그걸 읽으며 다음 프로그램을 짜고...

몇 번이 반복되면서 '이걸 언제까지 해야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님을 보니 40대 중반이 되어서도 똑같은 업무를 계속하고 계셨다.

내 미래가 보였다.

개발 업무가 싫지는 않았지만
세상 변화의 언저리에서 내가 기여하는 부분이 너무 작고 미미하게 느껴졌다.

이걸 반복하며 내 커리어를 다 쓴다고 생각하니 답답했다.

이런 일을 계속 '직접' 반복하기보다는

더 큰 관점에서 세상의 흐름을 보고 필요한 전략을 짜서

개발은 그걸 더 잘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시키는' 업무를 하고 싶었다.

그게 세상에 더 큰 Impact를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병역특례 5년이 끝난 후 LG전자로 이동하였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전략, 기획 업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미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LG전자 CTO 기술전략팀에 다니고 있었는데

개인적인 일로 퇴사를 하면서 후임으로 나를 소개해 준 것이었다.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당시 CTO 기술전략팀은 핵심 부서였다.

LG전자의 모든 사업부가 하는 기술들의 선행을 책임지고 있어서

미래 트렌드와 다양한 기술들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처음엔 기획이 뭔지 잘 몰랐지만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열심히 발로 뛰었다.

신사업을 하라고 해서 새로운 분야들을 밤낮없이 공부하고 전문가를 만났다.

큰 그림을 그리고, 분석을 하고, 논리적으로 정리를 하고,
어떻게 하면 더 설득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고,
반복적으로 연습을 하고, 발표를 하고...
그렇게 결국 원하던 '시키는' 업무를 하게 되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느낀 건
한계.
큰 관점에서 문제를 정의하고 전략을 짜는 것이 중요한 건 맞는데,
그리고 더 큰 Impact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맞는데,
마지막에 진정한 가치를 만드는 것은
결국 그걸 직접 '해내는' 사람이더라는 것.
아무리 내가 멋진 전략을 수립하더라도
누군가가 그걸 실제로 구현해서 고객들에게 전달하기 전까지는
그냥 세상에 흔하디 흔한 종이 문서일 뿐이더라는 것.

그래서 다시 난
뭔가를 직접 '해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사업 업무로 이동하려 노력하였다.
CTO부분 조직책임자 중 거의 유일하게 사업가 트랙을 타서 교육을 받았다.
Tone+ 헤드셋 사업을 하는 사업부에 배치되어
생산도 챙기고, 직접 발로 뛰며 마케팅에 영업도 하고...
마지막엔 우여곡절 끝에 수포로 돌아가긴 했지만
LG그룹의 시니어케어 사업을 직접 해보겠다고 그걸 구체화하기도 했다.
그러다 오픈이노베이션을 총괄하는 스테프 조직으로 배치가 되자
고민 끝에 몇 년 후 현대글로비스의 신사업 본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현대차 그룹에는 아무 네트워크가 없었지만
여기 할 일 많다고, 빨리 와서 사업해 보라고 하는 사장님의 말씀에 용기를 냈다.
직접 사업을 해내고 싶었다. 인생의 모험이었다.
아무 핑계도 대지 않고 오롯이 내가 고객과 마주하여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인정받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3년간
매출 4천억 원 사업부의 책임자로서 사업을 리드해 볼 수 있었고
다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독특한 경험과 소중한 사람들을 얻게 되었다.

지난 커리어를 돌아보니
그때는 간절했는데 이제는 웃음이 났다.
주어진 상황에서 뭔가 성취하려고 바쁘게 뛴 적도 있었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여 없던 길을 만들어 보려고도 한 적도 있었으며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뭔가 이루고 싶어서 조급해한 적도 있었다.
돌아보니
내가 겪어온 모든 게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개발은 개발대로, 전략은 전략대로, 사업은 사업대로
각각 만들어 내는 가치가 따로 있고
그것들이 모여 세상을 굴러가게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 때 꼭 필요했던 고민들을 하며 그 시기를 지나왔다는 게 다행이었다.
당연한 사실을 먼 길로 돌아오며 체득한 느낌.

그 후 대기업의 주니어 분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는데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은 분일수록
본인의 커리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내게 털어놓곤 했다.

"상무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이렇게 회사의 스태프 역할만 해서 나중에 정말 경쟁력이 있을까요?"

"상무님, 저도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요즘은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애들도 이제 커가는데 어떻게 해야 회사에서 더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을지...
해외로 나가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는 게 좋을까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과거에 커리어를 바꾸며 했던 고민들이 떠올랐다.

'그럴 수 있지. 한참 고민이 많을 때네.

Been there, done that.  나도 이미 다 지나왔어.

한때 나도 그렇게 느낀 적이 있었지만 조금만 기다려 봐.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 금세 생각이 또 바뀔 거야...'


순간 놀랐다.

좋게 말해서 공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가 먼저 그와 비슷한 고민을 겪어 왔다는 이유만으로

무의식 중에 그 고민들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교만이라는 게 얼마나 사소하게 갑자기 찾아오는지...

공감과 교만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창피했다.

들키기 싫어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딘가에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깨달음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게 성숙함의 정도도 아니고 인사이트의 크기도 아니다.

경험이 다양하고 그 과정에서 많이 깨달았다는 건 복된 거지만

그 경험을 통해 우리가 진짜 얻어야 하는 건

이미 안다는듯한 교만이 아니라 부족함에 대한 자각이다.

누구에게든 배우고 새롭게 바꿔보겠다는 겸손이다.

세상의 일부를 경험하고 마치 세상을 다 아는 냥 건방을 떠는 건
스스로 애송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삶의 경험은 누구나 다르다.

저마다의 계절이 있고 시간이 있다.

내가 똑같은 경험을 해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맞닥뜨렸는가에 따라 깨달음이 다른데

어찌 내가 타인의 삶과 경험을 폄하할 수 있겠는가? 헤아릴 수도 없다.

겸손하자. 친절하자.

수 없이 다짐하고 되뇐다.


내 커리어 여정에서 수 많은 고민의 밤을 거치며 깨달은 것.
전략을 잘 짜서 다른 누구를 시키든,

아니면 내가 직접 해내든

좋은 커리어는
최고의 도착지가 아니라 최선의 과정이라는 것.


각자의 길이 있다. 저마다의 삶이 있다.

결국 중요한 건
그래서 뭔가 의미있는 걸 해냈는가...이고
그 과정에서 행복했는가...이다.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엔 결국 그 두 가지만 남는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고
혹시 나만 뒤처지는 게 아닐까 조바심도 내지 않으며
내가 중요하다 믿는 걸 하나씩 완수해서 지워나가고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게
최고의 삶이고
최고의 커리어다.
 

(Career Talk, Powered by DALL.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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