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lbreak
"Done is better than perfect." (Sheryl Sandberg)
사실은 삼성전자보다 삼성전기가 훨씬 더 알짜 회사라고 했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 좋았던 것 중 하나는 대기업 분들이 채용을 위해 직접 와 주신다는 것이다.
회사는 글로벌 인재를 선점하겠다는 의도가 있었겠으나
유학생들에게는 고급 호텔에서 비싼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도 그렇게 호텔에 갔다가 삼성 임원분들을 만났다.
병역특례를 해주신다는 말에 덜컥 삼성전자 입사를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았다.
귀국해서 연락하니 HR담당자가 곤란한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뭔가 착오가 있었는지 삼성전자는 병역특례 TO가 모두 소진되었네요.
그룹사 중 삼성전기에 TO가 남아 있는데 거기서 일해보시는 것은 어떠세요?
삼성 그룹의 전자 부품 전문 회사인데 완전 알짜 회사입니다.
부서도 요즘 뜨는 무선랜 제품을 삼성전자와 공동개발하는 조직이에요.
나쁘지 않으실 거예요.”
말은 죄송하다고 운을 뗐지만 일방적인 통보였다.
“아, 그래요? 저도 좀 찾아보고 생각해 본 뒤에 말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말은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병역특례가 중요했다.
그렇게 난 수원의 삼성전기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입사하자마자 삼성전자가 중도에 손 털고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공동개발로 시작했지만 삼성전자에게는 매력이 없는 너무 작은 비즈니스였다.
결국 무선랜은 삼성전기에 남게 되었다.
입사 전 HR 담당자의 말이 더 사탕발림같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선랜은 우리가 개발부터 사업까지 모두 도맡게 되었다.
삼성전기는 부품 회사라서 전자회사 대상 B2B 영업은 잘했지만
완제품을 직접 사업화해본 적은 없었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MLCC, 인덕터 등과 같은 일반 부품명이 아닌 상품명이 필요했다.
당시 삼성전자 상품들의 이름을 보니 앞에 Magic을 붙이는 게 유행이었다.
MagicLAN이 우리 제품의 이름이 되었다. 그럴듯했다.
난 우리가 만든 제품을 고객이 샀다고 가정하고 구매하는 과정을 따라가 봤다.
하드웨어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일단 제품을 담을 박스가 필요했다. 박스 디자인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박스 속에 함께 제공할 설치 CD가 필요했다.
사소한 것 하나도 누가 대신 해주지 않았다. 오롯이 우리가 해야 했다.
고민을 하다가 그룹장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룹장님, 이거 고객에게 팔려면 CD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윈도우용 Driver들과 Configuration Utility도 설치파일로 넣어 줘야 하고요."
"아, 그래? 그럼 박대리가 공부해서 한번 만들어 봐."
"네? 제가요?"
"응.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하는데 박대리가 감각 있잖아. 잘할 것 같은데 내 생각엔..."
"네.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좀 황당했다.
고객에게 팔아야 하는데 공부해서 한번 만들어 보라니...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만든다고? 삼성인데?
숙제를 받은 이상 방법을 찾아야 했다.
먼저 설치 파일 만드는 방법을 찾아봤다. Installshield라는 게 있었다.
바로 라이선스를 구매하고 설치했다.
후배 한 명과 그 프로그램을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열심히 스터디했다.
만들고 테스트하고, 만들고 테스트하고...
수없이 반복했다. 어떻게든 되게 만들어야 했다.
고객이 CD를 넣었을 때 바로 실행이 되는 설치 프로그램도 만들어야 했다.
일단 전체 틀은 Visual C++로 만들긴 했는데
더 세련되게 인터랙티브 한 동영상을 만들려고 하니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학부 때 홈페이지 만들면서 Adobe Premier를 써봤던 게 기억이 났다.
그룹장님을 설득하여 프로그램을 한 카피 구매했다.
그리고 다시 독학을 시작했다.
몇 주에 걸쳐 최대한 감각을 동원하여 동영상으로 만들었다.
클릭에 따라 동영상이 재생되며 프로그램이 깔리기도 하고 설명서가 뜨기도 했다.
판매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다음엔 고객에게 제공할 물리적인 CD가 필요했다.
팀원 중 하나가 공 CD 위에 프린트가 가능한 CD 프린터를 찾아냈다.
즉시 프린터를 구매했다.
테스트를 해보려고 하니 CD위에 프린트할 디자인이 필요했다.
다시 Adobe 프로그램을 써서 맨땅에 헤딩하듯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삼성 로고도 따와서 넣고, MagicLAN 로고도 넣었다.
CD 표면에 삼성 블루로 디자인을 넣고 두 개의 로고를 양쪽에 추가했다. 너무 심심했다.
디자인을 계속 바꿔 보다가 MagicLAN 로고를 살짝 사선으로 틀어 보았다.
언발란스하면서도 CD 회전을 감안하면 훨씬 세련된 것 같았다.
Ryan 선배도 그걸 어떻게 그렇게 틀 생각을 했냐고,
그거 살짝 틀었더니 훨씬 혁신적인 이미지로 보인다고 칭찬했다.
마음에 쏙 들었다.
상무님께 가져갔더니 로고가 삐뚤어졌다며 일자로 맞추라고 하셨다.
모범생스러운 일자 디자인으로 바로 원복 되었다.
마음 아팠다. 그래도 괜찮았다.
대세엔 지장이 없었다. 완료가 중요했다.
이제 팔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첫 상품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오래전 미국에서 삼성이라는 국내 최고 대기업에 입사하기로 결정했을 때
뭔가 거대한 시스템 하에서 체계적으로 일을 배우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마주친 건 "니가 한번 해봐라."였다.
그래도 삼성 로고를 달고 파는 건데, 이게 맞나?
처음엔 불안했다.
하지만 수 많았던 고민의 밤과 맨땅에 헤딩하던 시간이 흐른 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방금 해낸 것이 사업이라는 것을.
세상의 모든 기업은 처음에 다 이렇게 시작했다는 것을.
삼성 이름을 달고는 있었지만 우리도 스타트업처럼 첫 상품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한 번도 제대로 준비된 적은 없었다.
상황에 몰려 용기를 낸 적이 있을 뿐이다.
때로 세상은 기를 쓰고 용기 낸 자의 손을 들어준다.
개발이든, 디자인이든, 영상제작이든, 작명이든, 마케팅이든, 판매든...
고객이 필요로 하는 건 뭐든 내가 그냥 하면 된다.
방법을 모르면 직접 배우든 찾아서 시키든 어떻게든 해내면 된다.
항상 돈 내는 고객부터 시작이다.
성공하면 사업이 되고
실패하면 경험이 된다.
고급 호텔에서 공짜로 비싼 밥 얻어먹고 병역특례라는 말에 어리바리 들어온 삼성에서
사업의 본질을 배웠다.
전문연구요원이었지만, 이때부터 난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