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하는 그 여인으로부터,
3번째 책리뷰_
정세랑 - 《시선으로부터,》 / 문학동네
우리가 사랑하는 그 여인으로부터,
이 소설은 특이한 이력의 여성 예술가이자 운동가인 “심시선”과 그로부터 뻗어나온 일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일가는 모계 중심의 다소 독특한 가족으로, 심시선의 십 주기를 맞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와이에서 그의 제사를 치른다. 평범한 방식의 제사는 아니고, 심시선 가족이 각자 화와이를 여행하면서 가장 기쁘고 인상 깊은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을 가져와 제사상을 꾸민다. 소설은 심시선의 삶과 가족들이 화와이를 여행하는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이 작품은 여성 서사다. 시선이 여성 예술가로서 겪었던 삶과 심시선 일가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페미니즘, 퀴어, 생태주의, 반제국주의 등 이 소설은 많은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 애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든 점은 문장 그 자체였다. 밀도 있고 힘 있는 문장이 매끄럽게 이어져 책장이 쉽게 넘어갔다. 특히 매 장마다 앞에 나오는 심시선의 말과 글이 가장 인상 깊었다. 비록 가상의 인물이지만, 읽으면서 나도 이렇게 생명력 넘치는 언어를 사용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자는 이 소설을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아픈 삶을 살아내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인으로부터 뻗어나온 사랑이 확산되는, 그리고 그 사랑이 그 여인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인상깊었던 구절✏
다 포기하고 싶은 날들이 내게도 있습니다. 아무것에도 애착을 가질 수 없는 날들이.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죽음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내 안의 나선 경사로를 어떻게든 피해야겠다고. 구부러진 스프링을 어떻게든 펴야겠다고. 스스로의 비틀린 부분을 수정하는 것, 그것이 좋은 예술가가 되는 길인지는 몰라도 살아 있는 예술가가 되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매혹적으로 보이는 비틀림일수록 그 곁에 어린 환상들을 걷어내십시오. 직선으로 느리게 걷는 것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택해야 하는 어려운 길입니다. -p. 29~30
할머니에게 그 점을 짚어 알려주고 싶었다.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기억을 애써 메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p. 111
어쨌든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평생 공격성이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공격성이 발현되든 말든 살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기분좋게 취했던 이가 돌변하기 직전의 순간을 알았고, 발을 밟힌 이가 미처 내뱉지 못한 욕설을 들었고, 겸손을 가장한 복수심을 감지했다.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나는 단단히 마음먹고선, 어찌 살아남았나 싶을 정도로 공격성이 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 첫번째 남편도 두번째 남편도 친구들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p. 125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날은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태어나길 잘했다 싶고, 어떤 날은 묵은 괴로움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런 고민을 하겠지요. -p. 280~281
“그 점은 나도 싫은데 외부의 충격에 영향받지 않는 인생이 어딨겠어? 그렇지만 내가 그 날 이후로 곱씹고 있는 건 내 불행, 내 상처가 아니야. 스스로가 가엽고 불쌍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보다는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p. 305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p.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