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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의 나는 인종차별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편견 속에서 허우적 되기

by 연필


니하오, 씨에씨에, 곤니치와



영국 곳곳의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영어 대신에 중국어와 일본어로 인사를 받곤 한다.



나를 그 나라 사람으로 생각했는지, 인사말을 말하고는 뿌듯해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묘하게 미워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냥 니하오가 아니라, 문법이 완벽한 “니하오마?(你好吗)”라니. 행인은 중국어의 의문문 문법을 완벽하게 구사하고는 얄밉게 지나가 버렸다.


속으로는 정정해 달라고 따끔하게 말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통쾌함은 상상 속 나의 모습뿐. 영어가 아닌 인사말을 자주 들어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다.


장난 식으로 말을 걸어도 되는 사람은 여기서는 동양인이다. 영어가 아닌 중국어로 혹은 일본어로 인사말을 건네는 행위를 보고 어떤 이는 친근감의 표시라고 말하기도, 어떤 이는 인종차별이라 말하기도 한다. 논쟁의 지점이 있지만, 기분 나빠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는 그 모습을 보며, 동양인에게 자리 잡힌 고정관념을 떠올린다.


“이 사람들은 자기주장이 없고 화를 낼 줄 몰라". 아시아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이 잘못 잡혀도 단단히 잘못 잡혔다.




차별은 편견에서부터 나오고, 편견은 고정관념에서부터 나온다. 외국인으로서 또 소수자로서의 '나'는 인종차별에서 무해하지 않았다. 영국에 지내면서도 나는 오히려 스스로에게 내재된 편견들을 찾아냈다. 편견 속에서 허우적 되는 사람들을 그렇게 욕하면서도 고정관념에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너도 나도, 우리는 모두 그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한민족'이라는 타이틀을 버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 '한국'에서 갓 영국에 도착한 나는 다민족 국가가 익숙하지 않았다. 다양한 인종이 섞인 영국에서 6개월을 지내며, '고정관념'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유난히도 생각을 많이 했다. 인종차별을 당하는 것을 억울해하지만, 세상 누구보다 편견이 가득했던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방탄소년단 지민처럼 되고 싶다는 영국의 인플루언서


검색을 자주 하면 유튜브에서 자동으로 영상을 추천해 준다. 알고리즘은 자신의 관심분야와 현재의 고민을 그대로 드러낸다.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누구에게도 드러내기 민망한 종류였다.


"독일인의 어쩌고 저쩌고"...”영국인의 인간관계 특징"


타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면서 그 나라 사람들의 특징을 분석한 영상은 명쾌하지만 한편 폭력적이었다. 댓글들은 자신이 피해를 봤던 일명 '썰'을 풀며 해당 국가 사람들을 욕하기 급급했다.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만 봐도 내가 얼마나 국가별 혹은 인종별 스테레오타입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스테레오타입은 사람들의 특징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전체 집단을 이해한다면 각 개인을 조금 더 잘 이해하겠지라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외국에서 만난 독일인, 스페인 사람, 영국 사람은 전부 한 번도 겪어보지 않는 퍼즐과 같았다. 한국 사람과는 약간 다른 듯한 속내,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마음들이 어렵기만 했다. 그 퍼즐을 풀어보고자 편견을 학습했다.


'독일인은 한정적인 인간관계를 가진다'. 혹은 '독일인들은 연락을 잘하지를 않는다. 기대하지 말아라'


단정적으로 써 놓은 커뮤니티 속 문장은, 마치 제품 설명서를 읽는 듯한 명쾌함을 선물해 주었다. 제품설명서만 가진다면 사람을 해체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머리가 덜 아팠고 마음이 편했다. 친구가 스테레오타입대로 행동하면 오케이였고, 그러지 않는 경우를 들으면 그 아이는 예외로 치부했다. 편견은 점차 견고해졌다.


다양한 인종적 배경을 가진 나의 플랫메이트들. 그리고 도넛 파티!


그럼에도 영국 기숙사 생활을 두 달 남짓 했던 때, 변화가 찾아왔다. 그런 종류의 편리함은 버리기로 다짐한 것이다.


제품 설명서와 같은 편견에서 스스로 고생한 후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프로젝트에서 만난 팀원으로부터 인종으로서 이해되고 해체되는 경험은 최악이었다. “동양인이니까 말수가 적고 반대의견을 잘 못 내겠지." 한 명의 스테리오타입적 생각으로 인해 수업 내내 주눅이 들었고, 돌덩이가 든 마음은 묵직했다.


복잡한 문제와 달리 해결책은 제법 간단한 경우가 많다. 이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집단이 아닌, 인종이 아닌, 혹은 국가 아닌 '개인'만을 생각하면 되었다. 독일인 친구는 독일인이 아니라 Iva라는 이름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또, 스페인 친구는 스페인인이 아니라 Ana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엄마와 나, 가장 절친한 친구와 나, 둘의 말소리와 숨소리가 다르듯이, 우리의 다름은 그런 종류의 개별적 다름이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는 퍼즐은 차근차근 그림을 맞추어보는 놀이이다. 정답지가 있는 퍼즐은 재미가 없고, 무엇보다 게임의 의미가 없어진다. 제품 설명서와 같은 정답지는 때로는 필요가 없다. 특히나 인간관계에서 말이다.


타국의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 걸리지만 오래가는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그들의 인종을 애써 잊었다. 1000만 원이 든 교환학생은 마법 같은 영어 실력을 선물해주지는 못했지만, 사람을 그들의 배경이 아닌 '사람' 그 자체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만큼은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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