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희랍어 시간』

희미해진 형체 속 회생

by 류진우

한강의 글을 읽었던 첫 시점부터, 작가의 책 속 활자들이 어딘가 메말라 있다고 생각해 왔다. 종이 위 떠다니는 이야기가 곧 으스러져 먼지가 되어 버릴 만큼. 하지만 오묘하게도 그것들이 소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기력에 적응된 문장들이 그 무엇보다 길고 벅찬 수행을 마친 듯 어딘가 납작하게 지쳐있는, 고요함 속 메마른 격렬함이 한강 소설의 특징이라 느껴왔다. 이러한 과거의 감상을 바탕으로, 나는 『희랍어 시간』을 읽었다. 남자는 형태를 잃었고, 여자는 외침을 잃었다. 두 사람의 공통된 고요함을 헤집는 건 과거의 아둔한 기억이다. 느린 속도로 어둑한 실명을 향해 다가가는 남자가 생생한 색감과 빛의 강렬함을 구분할 수 있던 그 시절. 침묵 속에 숨어야만 언어의 고도를 체감할 수 있는 여자가 교단 앞에 선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에 가르침을 고할 수 있던 그 시절. 표면상으론 아득한 침묵을 자아내는 두 사람은 서슬 퍼런 과거의 기억 속에서 격렬하게 분투 중이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시선으로써 마주할 수 있던 독일의 열일곱 살 무렵, 남자는 수첩 속 필담으로 서로의 온전한 시간을 나누던 어린 시절 그녀의 심장 위로 평생 지워낼 수 없는 얼룩을 만들어낸다. 열병의 대가로 청력을 바친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미래의 자신이 두려웠기에. 겁을 먹은 남자는 그녀에게 목소리를 요구한다. 세상의 견디기 버거운 소음의 한 조각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에게. 독순술 수업에서 배운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자신에게 해달라는 부탁을 기어코 전하고야 만다. 이십 년의 세월이 흘러, 그토록 두려워하던 미래의 자신이 된 남자는 그녀의 목소리를 여태까지 닳도록 어루만지고 있다. 자책을 풍기는 회상 속에서도, 여동생에게 보내는 회고의 편지 속에서도.


어리석고 어린 남자의 사랑에 비해, 말을 토해내는 법을 잃은 여자의 이야기는 불명확하고 모호하다. 양육권 소송에서 패배해 아홉 살 난 아들을 빼앗기고, 홀로 세상을 거닐던 어머니를 잃은 것이 병의 요인일 것이라고 나불대는 심리 치료사를 보며 여자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속절없이 내뱉어져 상처를 내고, 악취를 풍겨 고뇌를 만들어내는 말들에 환멸을 느꼈다는 여자. 아빠의 집에 가는 것이 싫다며 눈물을 흘리는 아들의 어깨를 붙잡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함께 멀리 도망가자는 한마디의 사랑을 끝끝내 내뱉을 수 없었던 여자. 여자는 화해하는 법을 모르기에, 섣부르고 가벼운 폭력이 밴 위로의 말을 눌러낼 줄 모르기에 언어의 버거움을 견뎌내지 못한다.


책 속 남자가 강의하는 희랍어의 특징은, 능동태와 수동태 이외에 중간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해치다’라는 동사에 중간태를 입히면, 무언가를 상처입혀낸 나의 행위가 다시 나에게 어떠한 균열을 일으켰다는 뜻으로 사용이 가능해진다. 나에게는 이러한 희랍어의 중간태가, 운명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주술처럼 느껴졌다.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표현”하는 중간태처럼, 절망을 느끼며 살아가던 두 사람의 발자국이 결국은 서로를 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희랍어 시간』 속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약하고 연한 부분을 통해 서로를 구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 후퇴하는 퇴락의 세계에서 자신의 손바닥 위로 개화하는 여자의 언어를 느끼며 남자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여자를 진실로 이해한다. 언어의 거룩함 속 구원의 흔적조차 없는 두 생애의 소통에서 나는 ‘사랑’에 대한 말소리를 읽어내고 싶었다. 무지하던 과거의 열렬한 성애, 자라나는 아이에 대한 숭고한 모성애, 점차 부각 되는 침묵 속 서로를 온전히 체험하는 인간애. 동이 떠오르지만, 결국엔 암흑에서 살아가야 할 남자와 기척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여자. 두 사람의 만남은 얼핏 보면 무척 어긋나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에 서로에게 구원의 주춧돌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절망이 나를 잡아 먹어가는 현실에서 남자가 마주한 여자의 존재는 한 줄기의 빛과 같았을 거라 예감해본다. 어둠 속 차가운 콘크리트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피를 흘리는 한 마리의 새와 다를 바 없던 그 억겁의 시간에, 밝음과 어둠의 구별 없이 어둑해진 시간 속 찡그렸던 미간을 곧게 펼 수 있게 해준 존재의 중요성이 나에게 아득하게 다가왔다. 바람도, 빛도 한 줄기의 소음도 없는 무언의 방에서 서로에게 맞닿은 두 사람이 느낀 그 미세한 안도감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균형과 안정이라는 것을 누릴 기회는 사라졌지만, 남자는 어둠에 귀를 기울여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여자는 쉴 새 없이 늘어지는 말과 고요히 공생할 기회를 얻었다. 기회를 얻은 두 사람의 후일담이 소설에 드러나진 않지만, 두 생애의 끝마무리가 그렇게 허무하고 가볍진 않을 거라는 판단이 든다면 조금 비약일까.


고요함 속 메마른 격렬함이라는 나의 감상에 변화는 없다. 나에게 한강의 책은 여전히 깊고 심오한 웅덩이 같고, 그 속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격렬하게 파헤쳐 나가는 잉어처럼 느껴진다. 떠나간 것을 되찾고 싶다는 열렬함이 없어도 인간은 살아간다. 묵묵히 시간을 견디고, 그것으로 반짝임을 얻는다. 바닥에 곤두박질쳐 충돌하는 한이 있더라도. 송곳에 찔린 생살이 안간힘을 써 새로운 가죽을 올려내는 것처럼. 『희랍어 시간』을 통해 한강이 전하고자 했던 바는, 인간 강인함의 근저를 이루는 것이 모순되게도 단단한 살갗이 아닌 깊은 자아 아래 고여있는 약하고 불완전한 영혼 한구석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야기 속 두 사람의 인생 안쪽을 여행하면서, 만약 살아가며 자연히 잃어가는 것들을 무어라 정의할 수 있다면 이윽고 나의 삶을 다시 조율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결국엔 나를 일으켜 세워 줄 것, 언젠가 헤어질 때 열렬히 손 흔들며 인사하고 싶은 것, 이라 칭하고 싶다는 가볍고도 이상한 소망이 생겨났다. 그렇기에 나는 누군가가 『희랍어 시간』을 통해 무얼 얻어냈냐 묻는다면, 멸망이 아우르는 세계에서 시선에 반사되지 않는 빛을 찾는 방법과 혹여나 모든 것이 아스러진다 해도 맞닿았던 위로를 기억해내는 방식을 익혔다, 하고 말할 것이다.





한강 『희랍어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