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 없는 날 탁구 치기
아무런 일정이 없는 날은 정말 편안하다는 느낌이 든다. 여기서 일정이라고 해봤자 지인을 만나러 나가거나 근처 헬스장에서 운동하거나 정원에서 밀린 농사나 화단 가꾸기 작업을 하는 정도이니 사실 일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해야 될 것들이 있는 날은 아무래도 미리 준비도 해야 하고 실제로 힘을 사용하거나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들이지만 오늘처럼 아무런 일정이 없으면 그야말로 숨만 쉬면 되는 날은 참으로 편안함이 느껴진다. 약간 허기짐과 무언가를 쏟아낸 뒤의 허탈감 같은 편안함이다. 적당한 공복으로 누워있는 나른함 같은 편안함이다.
그냥 밥만 챙겨 먹고 하루 종일 책이나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올해 마지막 잔디도 엊그제 이미 깎았고 이제는 잡초도 더 이상 자라지도 않는다. 틀밭의 오이와 가지를 철수해야 하지만 서리가 내릴 때까지는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감나무 잎이 떨어져도 감은 그대로 달려있을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다만 홍시가 되어서 달아지면 까치 같은 새들이 단맛을 알고 달려들어서 쪼아 먹는 경우가 있다. 엊그제도 한 개의 감을 쪼아 먹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 부리로 쫀 부분만 제외하면 먹을 만한 부분들이 많아서 얼른 주워다가 냉장고에 두었는데 오늘 살짝 씻어서 홍시로 먹을 수도 있다. 벌레나 새들이 먹던 과일이 더 달고 맛있다.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상태가 행복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직까지 특별히 죄책감이 드는 일도 없고 의무나 채무를 이행해야 할 것도 없으니 심적으로 부담이 없고 급하거나 당황할 것도 없다. 배가 고프면 밥 해 먹고, 부족한 운동은 산책을 하거나 탁구장에 나가서 탁구를 치면 된다.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성공이란 것이 없겠지만 실패도 또한 없다.
목적지가 있으면 그를 향해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하지만 딱히 가야 할 목적지가 없으니 그냥 노를 젓다가 적당한데 도착하면 배에서 내리면 된다. 파도가 심한 곳은 가지 않으면 되고 파도가 없으니 열심히 노를 젓지 않아도 된다. 그냥 물결에, 바람에 맡겨두어도 된다. 노를 걷어서 뱃전에 올려두고 누워서 하늘을 보며 지그시 눈을 감고 있으면 된다. 태양이 따갑거나 눈부시면 손으로 살짝 가리거나 옆으로 돌아누워도 된다.
여기서는 남의 눈에 뜨일 일도 별로 없다. 탁구장에 나가서도 직업을 묻는 이가 있지만 그냥 은퇴한 노인이라고 하면 된다. 예전에 무엇을 하였냐고 묻는 이가 있으나 그냥 가만히 있으면 더 이상 캐묻지 않는다. 예전에 무엇을 하였는지가 탁구장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탁구장에서는 탁구 잘 치는 이가 최고이므로 탁구 이야기만 하면 된다. 늦게 시작한 탁구가 잘 되지는 않지만 그냥 하수들 공을 받아넘길 수 있을 정도이니 남들이 그렇게 무시하지는 않는다. 가끔 나타나는 고수에게는 게임도 안되지만 그 고수가 맨날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한 번씩 지는 것도 불쾌하지가 않다. 나는 더 이상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일 것이라는 것을 안다. 타고난 운동신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체력이나 순발력이 엄청 뛰어난 것도 아니니 그냥 60대가 할 수 있는 정도만 하면 된다. 70대, 80대 할아버지도 열심히 탁구장에 나오고 있는 것을 보니 아직 한참은 더 탁구장을 더 다닐 수도 있을 것 같고 내 정도 실력이면 그냥 그냥 계속 버틸만하다.
오늘은 탁구장 아래에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깎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