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어떤 사람은 책에서 꿈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영화에서 꿈을 줍는다고 한다. 나는 텔레비젼 위 장식장 유리틀 사이에 끼워진 빛바랜 사진 한 장에서 꿈을 만났다. 누렇게 바랜 그 사진 속에서, 스무 살 청년이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청년은 긴 소총을 옆에 세우고 철모 턱끈을 풀어 늘어뜨린 채 어깨에 힘을 주고 서 있었다. 이름 모를 야산을 배경으로 전우들과 나란히 선 그 모습이 어린 내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으로 보였다.
그 청년이 나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28사단에서 군생활을 복무하셨다. GOP 근무를 자원했지만 처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셨고, 월남전 참전 지원도 같은 이유로 무산되었다고 하셨다. 형과 누나를 낳고 뒤늦게 입대하신 탓에 동기들 사이에서 아버지의 별명은 '늙은이'였다.
밤이면 아버지는 가끔 군대 이야기를 해주셨다. 행군하다 발에 물집이 잡혀 걷지 못하는 전우를 업고 걸었던 이야기, 영하 20도 철원 들판에서 보초를 서며 별을 세던 이야기. 나는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아버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 속에서 총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군화 밟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동네 어른들은 골목을 뛰어다니는 나를 보며 "이 녀석은 장군감일세."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 같은 군인. 아니 아버지보다 더 멋진 군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봄날이었다. 수업 중에 갑자기 창문이 덜컹거리더니 교실 전체가 흔들렸다. 아이들이 창문으로 달려갔다. 운동장 한가운데로 군용 헬리콥터가 내려앉고 있었다. 모래바람이 휘몰아치고, 굉음이 귀를 찢었다. 프로펠러가 멈추자 문이 열리고 군인이 내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53사단장이셨을 것이다. 그때는 계급이 뭔지도 몰랐다. 그냥 가슴이 뛰었다. 저렇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때 처음 생각했다.
아버지의 낡은 사진첩에는 故박정희 대통령 사진이 한 장 끼워져 있었다. 서거 당시 신문을 오려 붙여놓으신 것이었다. 사진첩을 넘길 때마다 나는 물었다. "아버지, 이 분 누구예요?" 아버지는 늘 같은 대답을 하셨다.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해주신 분이다. 군인이었는데, 대통령이 되셨지."
군인이 되면 대통령도 될 수 있고, 헬리콥터도 탈 수 있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구나. 열한살 시골 초등학생의 머릿속에 그런 공식이 새겨졌다.
우리 가족은 내가 6살때 부산 광안리에서 울산 서생면으로 이사했다. 갑자기 아버지가 농사를 짓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서생면 명산리 마을에는 한옥뿐이었는데 아버지가 처음으로 양옥집을 지으셨다. 집 주변에 논과 밭고 사고 완전 시골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야산을 개간해 배나무를 심었다. 어린 묘목들이 자라는 동안 우리 가족의 행복도 함께 자랐다.
하지만 배나무는 열매를 맺기까지 7년이 걸렸다. 기다리는 동안 밭과 논을 팔아 생활비로 사용했다. 결국 매일 땀 흘려 가꾸던 과수원마저 남의 손에 넘겨야 했다.
태풍이 지나간 해 겨울이 가장 힘들었다. 연탄을 외상으로 넣어야 했다. 석유 살 돈이 없어 곤로를 사용하지 못해 연탄불에 밥을 해야 했다. 겨울철 산과 들에서 놀며 손등 터서 갈라져 피가 맺히면 어머니가 냄비에 물을 끓여 그 물에 손을 담가 때를 밀어주었다. 따뜻한 물에 손을 넣으면 갈라진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따가웠지만, 어머니 손이 내 손을 감싸고 있어서 울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부엌에서 한참을 우셨다. 옆집에 돈을 빌리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신 날이었다. "빌려줄 돈이 없다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그 몇 걸음이 얼마나 길던지." 어머니는 그 말만 하시고 또 우셨다. 나는 부엌 문 앞에 서서 어머니 등을 바라보았다. 좁은 등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등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세상이 달랐다. 아이들은 르카프, 프로스펙스,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나는 그런 상표가 있는 줄도 몰랐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내 발을 가리키며 웃었다. "야, 너 사디다스 신었네." 아디다스 줄무늬가 세 개가 아니라 네 개인 짝퉁이라는 뜻이었다. 주변 아이들이 낄낄거렸다. 나는 웃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께 울면서 말씀드렸다. 나도 제대로 된 운동화를 신고 싶다고. 어머니는 아무 말씀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그 주 일요일 어머니는 새벽같이 나를 깨우셨다. 울산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르카프 대리점 앞에 섰을 때 어머니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만 원이면 살 수 있는 신발을, 3만 원 주고 사야 했다. 어머니는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 계셨다. 나는 가장 싼 신발을 가리키며 "어머니, 저거면 돼요."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여실 때, 나는 어머니 눈가가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새 신발을 들고 버스를 탔다. 창밖으로 울산 시내가 지나갔다. 나는 신발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생각했다.
군인이 되면 군복만 입으면 된다. 전투화만 신으면 된다. 신발 때문에 친구들한테 놀림당할 일도 없고, 어머니한테 이런 부탁을 드릴 일도 없다.
그날, 나는 꼭 군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꿈은 거창한 곳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장식장에 끼워진 아버지 사진 한 장, 운동장에 내려앉은 헬리콥터 굉음, 부엌에서 울고 계시던 어머니의 뒷모습, 르카프 매장에서 붉어지던 어머니 눈가. 그런 것들이 모여 하나의 꿈이 되었다.
군인이 되면 어머니를 울리지 않아도 된다. 군인이 되면 아무도 나를 비웃지 못한다. 어쩌면 그건 꿈이 아니라 도피였는지도 모른다. 가난에서, 부끄러움에서, 어머니 눈물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도피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가끔 눈을 감으면 그 사진이 보인다.
철모를 비스듬히 쓰고 소총을 옆에 세운 스무 살의 아버지. 이름 모를 야산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청년. 그는 알았을까. 자신의 막내아들이 사진 속 자신처럼 군인이 될 줄. 그리고 직업 군인의 길을 걷게 될 줄.
꿈은 꾸는 게 아니라 이루는 것이라 했다. 그 말이 맞다면, 나는 이제 그 꿈의 끝자락에서 처음을 돌아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