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건빵에 대한 추억이 있는가?
대한민국 남자 중 군대에 갔다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건빵에 대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논산훈련소에서의 배고픔을 달래주고, 아버지 세대는 눈물 젖은 건빵이라며 잊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 건빵은 조금 다른 의미였다. 그것은 내가 군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복선이자, 가난했던 소년에게 찾아온 첫 번째 위로였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여름 주말이었다. 우리 동네는 행정구역상 울산이지만, 조금만 걸어가면 부산이었다. 점이지대라고 해도 무방하다. 친구들과 걸어서 부산 방향으로 2킬로 정도 가면 고리원자력발전소 사택이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나름 중산층의 아이들이 많이 살았다. 그 단지 옆을 지나면 긴 철조망 울타리가 나오고 그 끝에는 위병소가 있었다. 군인 아저씨들이 보초 근무를 하고 있는 모습을 버스를 타고 다니며 보았다. 오늘은 버스가 아닌 걸어가면서 그 모습을 보았다. 철모를 비스듬히 쓰고 M16 소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아버지 사진 속 군인과 닮았다.
그날은 친구들과 함께 월래반점에 짜장면을 먹으러 걸어갔는데 군인 아저씨가 손짓을 했다. 무서움과 설레임이 교차했다. 겁먹은 얼굴로 다가가니 푸른색 군복 바지주머니에서 무엇인가 찾는 듯하더니 이내 뭔가를 꺼냈다. 모두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큼지막한 주먹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게 건빵인데, 전쟁 나면 이걸 식량으로 먹는다. 군인에게는 엄청 중요한 거니까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준다."
우리는 두 손을 모아 손바닥을 넓게 폈지만 달랑 건빵 한 개만 올려주었다. 직사각형 모양에 가운데 작은 구멍이 여섯 개, 두 줄로 나란히 나 있었다. 어떤 맛일까 궁금해서 감사합니다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입에 넣었다. 맛도 없고, 향도 없고, 식감도 별로였다. 그런데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미각을 깨웠다.
하나 더 달라고 했더니 다음에 라면 사오면 한 봉지 주겠다고 했다. 며칠 뒤 친구들과 봉지라면 한 개씩을 들고 가서 건빵 한 봉지와 교환했다. 친구랑 나눠 먹으며 도로를 따라 걸어오는데, 봉지 안에 작은 비닐봉지가 하나 더 있었다. 생긴게 꼭 가시가 있는 성개를 닮았다. 그리고 작은 글씨로 '별사탕'이라고 적혀 있었다. 건빵에 왠 별사탕이 있을까? 그땐 후식으로 먹는 줄 알았지만, 건조한 건빵을 먹으면 목이 메이는데, 별사탕이 침샘을 자극해서 목 넘김을 돕는다는 사실은 군인이 되고서야 알게되었다. 그땐 건빵과 별사탕을 함께 먹으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간식이 되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아버지가 해안방어 부대 대대장으로 부임해서 부산에서 전학을 오게된 아이였다. 등하교는 짚차로 하고, 도시락은 군인들이 먹는 짬밥이고, 장군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점심시간에 우리의 관심사는 전학온 아이의 도시락에 무엇을 들어 있을까였다. 전학생 주변으로 몰려든 친구들 때문에 그 친구는 끝내 도시락을 열지 못했다.
한 달 정도 지나자 그 친구는 비닐봉지에 건빵을 가득 담아왔다. 내가 처음 보았던 건빵과 달랐다. 조금 더 짙은 갈색에 설탕이 뿌려져 있었다. 나중에 군 생활을 해보니 그건 건빵을 식용유에 튀겨 설탕을 묻힌 군인아저씨용 특별 간식이었다. 별사탕 없이도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건빵을 그 친구 덕분에 건빵의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군인 아버지를 둔 친구가 부러웠다. 짚차를 타고 등교하는 것도, 설탕 묻은 건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도. 그때 생각했다. 나도 군인이 되면 저런 건빵을 실컷 먹을 수 있겠구나. 어쩌면 그게 군인을 꿈꾸게 된 가장 솔직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건빵에는 희노애락이 모두 들어 있다.
희(喜): 아무것도 먹을 게 없는 환경에서 건빵 한 봉지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안도감.
노(怒): 별사탕만 골라 먹는 후임 때문에 다투는 선임들. 고참 것은 안 만들어주고 후임끼리만 먹으면 터지는 분노.
애(哀): 행군 중 도로변에 주저앉아 아픈 다리를 만지며 건빵을 씹는 전우들. 비 오는 날 그 모습을 보면 더 짠했다.
락(樂): 건빵 푸딩, 버터에 구운 건빵. 모두가 힘들어하는 시간에 웃음을 선물하는 작은 즐거움.
훗날 육군3사관학교 기초군사훈련을 받을 때였다. 힘들어 지쳐서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던 어느 날 밤, 선배 한 분이 생활관에 들어와 내 입에 건빵 하나를 넣어주고 나갔다. 입안에서 침이 건빵표면에 닿아 살살 녹으며 부드럽게 입안 가득히 펴졌다. 그 고소함이 말초신경을 타고 전두엽을 자극하며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그만두고 싶었던 복잡한 감정들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정리되었다.
이게 바로 건빵의 힘이었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란 소년에게 건빵은 단순한 간식거리가 아니었다. 군인이라는 꿈을 품게 해준 첫 번째 계기였고, 힘들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작은 위로였다.
전역 후 먹어본 적은 없지만, 지금도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리면 그 맛과 향이 기억 저편에서 살아나 나를 즐겁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