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학교를 꿈꾸던 소년

by 설계자K

군인이 되려면 사관학교를 가야 한다. 장군이 되려면 사관학교를 나와야 한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들이다. 나는 그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사관학교가 아니면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사관학교만 바라보고 달렸다. 아버지 사진 속 멋진 군인, 운동장에 내려앉던 헬리콥터, 동네 어른들의 "이 놈은 장군감일세"라는 말. 그 모든 것이 사관학교라는 네 글자로 수렴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성적표는 나의 간절함을 외면했다. 원하는 만큼 오르지 않았다. 내신은 별볼일 없었고, 사관학교 합격선은 저 멀리 구름 위에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나는 가족들 앞에서 선언했다.

"자퇴하겠습니다. 이대로는 내신이 안 나와요.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수능을 다시 준비할게요."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고, 어머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부모님은 아들의 자퇴 결심을 받아들일 수 없으셨던 것 같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날 밤 어머니께서 얼마나 속상해하셨는지. 그때는 몰랐다. 내 눈에는 사관학교라는 네 글자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며칠 뒤,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따로 부르셨다.

"상호야, 잠깐 앉아봐."

선생님은 창밖을 바라보시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사관학교 못 가도 군인이 될 수 있는 길은 있어. 체육선생님은 ROTC 나오셨고, 교련선생님은 학사장교셨어."

순간 머리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사관학교가 아니어도 장교가 될 수 있다니. 그 단순한 사실을 나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사관학교라는 네 글자에 갇혀서 다른 문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한번 틀어진 마음을 정리하기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한마디가 닫혀 있던 문을 열어주었다. 그날 이후로 체육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학군사관(ROTC), 학사사관. 대학에 가서 장교가 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새로운 목표를 품었다.

나는 집은 울산이지만 경남 양산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면 친구들과 학교 옥상에 올라갔다. 양산 시내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하늘의 수많은 별들과 달을 올려다보며, 우리는 꿈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참 많이도 떠들었다. 그때도 나는 항상 말했다. 군인이 되겠다고.

지금도 졸업 사진만 봐도 열여덟 살의 내가 떠오른다. 질풍노도의 시기. 친구가 제일 좋았고, 열심히 공부했고, 낭만을 찾았던 추억이 있다. 그곳에는 아직까지 내가 잘 살아가게 도와주신 은사님이 계신다. 그때 나의 자퇴 선언에 동의해 주셨으면 나는 아마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시간은 흘러 고3이 되었고, 대입이라는 큰 산 앞에 섰다. 지금의 고3과는 조금 다른 생활이었다. 과외도 없었고, 고3의 스트레스를 가족 모두가 짊어져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오직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인생의 관문이었다.

고3 여름방학, 보충수업 대신 절친과 경북 상주의 작은 사찰로 들어갔다. 한 달간 매일 15시간 이상 공부했다. 새벽 4시, 주지스님께서 기도 올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저녁 10시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직 책과 씨름하는 시간이었다.

가끔 사찰 아래 저수지에 나가 돌을 던졌다. 수면 위로 동심원이 퍼져나갔다. 친구는 부산대 국어국문학과에 가서 국어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다. 나는 여전히 군인이 꿈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힘을 주고 응원했다.

"넌 꼭 될 거야."

친구의 말이 저녁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 말이 진심이길 바랐다. 지금 그 친구는 가업을 이어받아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들었다. 꿈꾸던 삶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그때 저수지에서 나눈 대화는 아직도 선명하다.

결과는 냉혹했다. 사관학교는커녕, 서울의 4년제 대학도 가지 못했다. 학군사관의 길도 막혔다. 좌절감에 재수를 생각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께 재수하겠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부산에 있는 전문대학에 입학했다. 매일 울산에서 기차를 타고 부전역에 내렸다. 부전역. 어머니와 배를 팔러 자주 왔던 곳이라 낯설지 않았다. 새벽 기차를 타고 와서 시장 한편에 자리를 잡고 좌판에 배를 깔아놓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1997년 당시 부산병무청이 부전역 앞에 있었다. 역에서 학교가는 버스 승강장까지 가려면 병무청 앞을 지나야 했다. 나는 매일 아침 그 게시판 앞에 섰다. 등굣길에 병무청 게시판을 읽는 것이 나의 하루 시작이었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 보급률이 높지 않았다. 관공서 홈페이지보다 게시판에 더 많은 정보가 있던 시절이었다. 군 모집 관련 자료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그중 나의 눈을 끄는 포스터가 있었다. 육군사관학교, 육군3사관학교. 생도들이 입고 있는 제복은 비슷해 보였다. 같은 그림 중 틀린 곳 찾기처럼 두 포스터를 번갈아 바라봤다.

가슴이 아렸다. 저기 서 있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쌓였다. 그리고 현재 내가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사실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매일 아침, 같은 길. 매일 아침, 같은 게시판. 매일 아침, 조금씩 커지는 무언가.


그때는 그게 미련인 줄 알았다. 놓지 못하는 집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건 버리지 못한 질문이었다. 정말 이 길밖에 없는 걸까. 정말 여기서 끝인 걸까.

그 질문이 5년을 버티게 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나는 육군3사관학교 사관생도가 되었다. 길은 곧게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간 시간은 실패가 아니었다. 5년은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이전 03화건빵이 좋았던 진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