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입대의 갈림길
꿈과 돈 사이에서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마음은 한쪽을 가리키는데 현실은 다른 쪽을 밀어붙일 때.
스무 살의 나는 그 갈림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당장 급한 건 돈이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문구는 '현금 5천만 원'.
대학교 1학기가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집으로 가는 무궁화호를 타기 위해 부전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기말고사도 준비해야 하고, 군대도 가야 하고, 머리가 복잡했다.
당시 누나와 같이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께 학비 문제로 경제적 부담을 드리고 있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
내가 먼저 군대에 가면 누나가 졸업할 수 있고, 내가 돌아왔을 때 다시 대학을 다니면 부담을 덜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계산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버스에서 내려 부전역으로 걸어가는 내내 군대 생각뿐이었다.
그때 무심코 고개를 든 시선이 병무청 게시판에 멈췄다.
알루미늄 샤시에 녹색 부직포로 배경을 깔아놓은 전형적인 행정기관의 게시판이었다.
빛바랜 모집 공고들 사이에서 유독 선명한 A4 용지 한 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정보요원 모집."
5년 복무 후 전역 시 현금 5천만 원 지급, 무도 단증과 위험물 자격증 등 각종 자격 취득 가능.
나머지 글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 뇌리에 각인된 건 단 하나, '현금 5천만 원'이었다.
어둡던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내가 가야 할 곳이 바로 여기다.
병무청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면에는 해병대 모집, 공수특전하사관 모집이라는 자리가 있었다.
정보요원 모집이라고 쓴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으니 근무복을 입은 여성분이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정보요원 지원하러 왔습니다."
말할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눈빛으로 무언가를 전해주셨다.
잠시 후 전화를 받고 나타난 사람은 왜소하고 조용한 남자였다.
첫 번째 질문이 이거였다.
"혹시 정보요원이 뭐 하는 사람인 줄 아세요?"
솔직히 해군, 공군도 낯설고 잘 모르는데 태어나서 처음 듣는 정보요원이 뭘 하는지 알 리 만무했다.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정보를 관리하는 군인 아닌가요?"
그가 웃었다.
육체적으로 힘들다.
휴가는 잘 나올 수 없다.
위험하다.
여러 가지 말을 했지만, 이미 현금 5천만 원이 뇌에 각인된 나에게 그런 말은 들리지 않았다.
지원서를 작성하고 필요 서류 목록을 받아 들었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행복했다.
5년 후 5천만 원을 받아서 뭘 할지, 머릿속으로 사용 설명서를 쓰고 또 썼다.
어머니께 빨리 이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집에 도착해 용기를 냈다.
"어머니, 일반 병사로는 안 갑니다.
제가 원하는 부대에 가서 군 생활을 하겠습니다.
정보요원에 지원했는데, 5년 복무하면 전역할 때 현금 5천만 원을 줍니다."
어머니께서 물으셨다.
"어떤 곳인데 돈을 5천만 원씩 주냐?"
차마 모병관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류를 준비해 접수를 마치고 신체검사와 체력검정 일정을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께서 먼저 알아보셨다.
문중 어른 중 부산 군수사령부에서 대령으로 근무하시는 분에게 전화를 하셨다고 했다.
며칠 후 어머니께서 눈물을 보이셨다.
"니가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정보요원 하면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단다.
북에 갔다 와야 하고, 죽어도 너는 우리나라가 모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 말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돈 계산을 멈췄다.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 현금 5천만 원의 행복한 사용 설명서는 찢어졌다.
나는 정보요원 지원을 포기했다.
훗날 특전사에 입대한 뒤에야 정보요원이 돼지부대, 또는 HID로 불리는 부대의 근무 요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만류가 아니었으면, 나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정보요원을 포기한 뒤에도 병무청 앞을 지나야 했다.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때 병무청 옥상에 걸린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안되면 되게하라, 공수특전하사관 모집.'
소문으로만 듣던 공수부대였다.
학교에 돌아가 하루 종일 고민했다.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선배들에게도 물어봤지만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동네 친구들에게 들었던 옛날 친구 형님께서 공수부대에 갔다왔다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이 정도라면 어머니께서 또 반대하실 게 뻔했다.
이번에는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병무청에 다시 들어갔다.
이번에도 반겨준 사람은 해병대 모병관이었다.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해병대 지원하러 왔구나."
해병대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일반 육군과 다른 군복이 솔깃하기도 했다.
그러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공수부대 모병관을 보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흑복을 입고 검은 베레모를 쓴 그 모습은 한마디로 일품이었다.
훤칠한 키에 벌어진 어깨. 일어선 모습에 압도당했다.
정신을 차리고 모병관에게 다가갔다.
"저, 공수부대 지원하러 왔습니다."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소파에 앉으라고 했다.
지원서를 내 앞에 놓으며 말했다.
"공수부대,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힘들다고 하면 아무도 오지 않으니 달래서 지원시키는 분위기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누런 종이 위에 이름과 주소, 주민번호를 적어 넣었다.
작성을 마치자 다 잡은 고기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신체검사 안 오시면 병역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도 있습니다."
일종의 가두리치기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뒤였다.
내 관심은 하나. 공수부대에 가면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느냐.
모병관은 하사 때 100만 원, 중사 때 150만 원 정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머릿속으로 암산했다.
봉급을 전부 모으면 5천만 원이 넘었다.
이 정도면 내가 계획한 대로 충분했다.
그런데 모병관이 내 꿈을 물었다.
군인이 되고 싶다고 했더니,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빛이 났다.
사관학교에 가지 못해도, 4년제 대학을 나오지 못해도, 특전사 부사관으로 복무하면서 장교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육군3사관학교, 간부사관후보생 제도였다.
나의 현실을 정확히 짚고 꿈을 이룰 수 있는 대안을 제시했다.
우연한 곳에서, 우연한 사람을 만나 인생이 바뀌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경우가 될 줄은 몰랐다.
군대를 두 번 지원해 보며 깨달은 게 있다.
내가 원하는 군대에 가는 것보다, 내 청춘을 받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입대할 무렵 집안의 경제 상황은 심각했다.
꿈은 마음속에 있었지만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 몰랐다.
군인이 되려면 장교가 되어야 하는데, 사관학교에 가지 못했고 학군사관에 갈 수 있는 4년제 대학에도 가지 못했다.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병무청 게시판 앞에 설 때마다 더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의 돈은 사치가 아니라 유예였다.
꿈을 접지 않기 위해,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보요원 모집 공고 앞에서 현금 5천만 원에 눈이 멀었던 스무 살의 내가 부끄럽지는 않다.
오히려 그 절박함이 나를 움직이게 한 힘이었다.
꿈만으로는 밥을 먹을 수 없고, 돈만으로는 가슴이 뛰지 않는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한 자리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이 아니었다면 나는 정보요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바꿔준 것은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눈물, 모병관의 한마디. 그런 사소해 보이는 순간들이 모여 운명이 되었다.
우연한 곳에서, 우연한 사람을 만나 세상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
특전사 모병관이 나의 인생을 바꿔준 첫 번째 사람이 아닐까.
부사관이면 어떻고 장교면 어떨까. 나의 꿈, 군인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입대 3일 전,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공수부대라고 하니 또다시 눈물을 보이셨다.
"합격해서 이제 안 가면 병역법 위반으로 영창 가요"
어머니는 내 등을 한 대 때리시며 말씀하셨다. 그렇게 힘든 군대에 가서 어떻게 하누.
1997년 11월 17일, 나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특수전학교로 향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한 번도 같은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