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전부사관 신병교육
대한민국에서 병역의 의무를 가진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군인'이 되는 걸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일까, 입대 서류에 도장을 찍는 순간일까, 군복을 처음 입는 순간일까.
아니면 두려움을 삼키고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첫 번째 밤을 버텨낸 순간일까.
1997년 겨울, 스무 살의 나는 그 답을 몸으로 직접 찾기로 결심했다.
1997년 11월 14일, 경기도 광주시 특전사령부 예하 특수전학교에서 시작했다.
부모님의 눈물, 친구들의 격려, 애인의 사랑을 뒤로하고 강당에 모여 교육대장의 인사말을 듣고 제대가 편성되었다.
이름의 가나다 순, 나는 1구대 39번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들 사이에서 느끼는 서먹함이란 게, 설레기보다는 어색하고 재미없는 쪽에 가까웠다.
내무실은 출입문 두 개에 가운데 벽을 일부 개방한 구조였고, 양쪽으로 사물함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각 사물함 위에는 개인 이름이 붙어 있었고, 그 앞에 매트리스 한 장, 모포 두 장, 베개 하나가 각을 잡고 놓여 있었다.
38번은 포항 동기였고, 40번은 경북 안강에서 온 동기였다.
가까운 사람끼리 먼저 통성명을 하는 게 한국 스타일이듯 나는 바로 좌우 동기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잠시 후, '조교'라는 글자가 새겨진 헬멧을 깊게 눌러쓰고 전투복 날을 세운 건장한 두 사람이 들어왔다.
키는 작지만 다부지고, 깡이 있어 보이는 사람은 자신을 조교라고 소개하며 앞으로 지시에 잘 따라 줄 것을 당부하듯 지시했다.
"입고 온 사복을 벗어 비닐봉지에 넣고, 사물함 아래 큰 서랍에 넣은 후 군복으로 환복합니다."
목소리가 까랑까랑하고 위엄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스무 해 동안 입어온 나의 옷이 비닐봉지에 들어가고, 모두가 같은 색 같은 모양의 옷을 입는 순간, 나라는 개인은 사라지고 '훈련병'이 되는 것이라는 걸.
달콤한 첫 주말이 지나고, 본격적인 신병교육훈련이 시작되었다.
특전사 대원을 양성하기 위해 선발된 교관과 조교들은 육군훈련소나 사단 신병교육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교관들은 각 여단에서 가장 뛰어난 최정예 대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조교들 또한 육군훈련소에서 선발된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관들의 눈은 처다볼 수 없을 만큼 강한 눈빛을 가졌고 그들의 첫마디는 늘 같았다.
"나약한 자는 지금 당장 집으로 가라. 특전사는 나약한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그 말이 협박인지 배려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다만 그 한마디가 떨어지면 강당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졌고,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제식, 총검술, 수류탄, 사격, 체력단련.
교육 내용만 보면 어느 신병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기른다는 명목의 얼차려는 끝이 없었다.
하루 종일 선착순을 한 날도 있었고, 학과 출장 시간을 맞추지 못해 오리걸음으로 몇 킬로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돈 날도 있었다.
1997년 겨울은 유독 추웠다.
큰 내무실에 달랑 하나 있는 온수 라디에이터는 따뜻함을 주기보다 얼어 죽지 않게 해주는 수준이었다.
얇은 모포 두 장으로는 겨울 새벽 한기를 버틸 수 없었다. 피곤함에 지쳐 눈을 감아도 새벽이면 추위로 어김없이 눈을 띄게 되었다.
나는 옆 동기와 궁리 끝에 하나의 방법을 찾았다.
모포 한 장을 같이 깔고, 나머지 세 장을 겹쳐 덮는 것이었다.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겨울을 버텼다.
그때 함께 모포를 나눈 동기는 지금도 연락하는 평생의 전우가 되었다.
식당 청소와 식기 세척으로 젖은 손을 마릴 시간도 없었다. 젖은 손은 겨울의 추위에 노출되어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져 피가 났다.
갈라진 틈 사이로 차가운 물이 스며들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아파서 해야 할 일을 못 하면 퇴교당할 수도 있었다.
특전사는 내가 자원해서 온 곳이다.
내가 포기하면 언제든지 서랍 속 비닐봉지에서 사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간다고 국방의 의무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유는 단순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추위와 싸우고, 조교들의 얼차려를 견디고, 서러운 날들이 쌓여갈수록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는 이 상황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 철봉과 외줄 오르기, 팔굽혀펴기를 반복하면서 없던 근육이 생겼다.
복부에 王자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어리버리했던 눈에는 광채가 돌기 시작했다.
조교보다 체력이 좋아지자 얼차려도 웃으면서 받았다. 영화 "실미도"의 한 장면처럼, 오합지졸이었던 우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교를 능가하는 체력을 갖게 되었다.
동기들과 밤마다 검은 베레모를 받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자며 말 대신 침묵으로 다짐했다.
6주 동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어머니었다.
매일 수양록에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가 마지막 문장이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훈련과 보고싶음을 품고 나는 새끼 독수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1997년 12월 마지막 주 금요일.
수료식 날 아침, 첫눈이 내렸다.
연병장에 집합한 우리 앞으로 부모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똑같은 군복, 똑같은 모자를 쓴 아들을 부모님들은 어떻게 단번에 찾아내는 걸까.
어머니는 바로 나를 찾아오셨다.
울산에서 첫 버스를 타고, 아들 먹이려고 불고기와 맛난 반찬을 해서 그 먼 길을 오신 것이다.
어머니를 끌어안는 순간, 참으려 했던 눈물이 터졌다.
전날 구대장이 눈물 보이는 놈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냥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은 시간이었다.
1분 1초가 아까워 어머니의 손을 놓지 못했다.
통제 간부들이 나타나고, 잡음 섞인 스피커가 헤어짐을 알렸다.
여기저기서 "건강해라, 사랑한다"는 말이 들렸고, 그 화답으로 "단결!" 소리가 요란했다.
달콤한 시간은 거기까지였다.
가족과 헤어진 우리가 연병장에 다시 모이자, 구대장과 조교들은 헤이해진 마음을 다시 무장시켰다.
저녁까지 이어진 선착순과 얼차려로, 배불리 먹었던 음식들을 연병장에 반납했다.
몰래 숨겨왔던 간식들은 여기저기 주인을 잃고 연병장에 떨어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기억만은 선명하다.
지옥이라고 했다.
맞았다.
하지만 그 지옥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를 벗어나는 경험을 했다.
혼자서는 버틸 수 없었던 추위를 동기의 체온으로 이겼고, 혼자서는 삼킬 수 없었던 서러움을 전우의 눈빛으로 녹였다.
군인이 되는 건, 총을 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었다.
나를 내려놓고 옆 사람을 믿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배운 '옆 사람을 믿는 법'이 나중에 얼마나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믿음이 복종이 되고, 복종이 당연해지는 순간이 올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