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으로 탈출하라
요즘 왜 이렇듯 몸과 마음이 무거울까? 업무가 많아서일까, 아니면 잠이 부족해서일까? 환경은 예전보다 좋아졌는데, 마음은 불편하다. 이유는 하나다. 인생을 살면서 알게 모르게 당신을 남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SNS를 열면 당신만 빼고 다 행복해 보인다. TV 드라마마저 영웅이나 신데렐라뿐이다. 누구는 승진하고, 누구는 고급 아파트로 이사하고, 누구는 해외여행 중이다. 그때 독처럼 퍼지는 생각 하나, "나는 왜 아직 여기 있지? 나는 실패한 건가?"
'비교'는 조용히 당신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충분히 잘 살고 있는 당신을 낙오자로 만든다. 그것이 비교의 잔인함이다.
성경에는 이 비교의 프레임을 완전히 바꾸는 장면이 나온다. 사무엘이 신의 명령을 받고 이스라엘의 새 왕을 찾으러 이새의 집을 방문했을 때다. 사무엘은 첫째 아들 엘리압의 훤칠한 키와 외모를 보고 '이 사람이다!' 확신했다. 그때 신은 사무엘의 생각을 깨부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 신은 결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직언이다. 결국, 사무엘이 왕으로 기름 부은 자는 화려한 스펙을 가진 형들이 아니라, 들판에서 양을 치던 막내 다윗이었다.
이것은 종교적 위로가 아니다. 인생은 '상대평가'가 아니라 '존재 가치로 사는 것'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선언이다. 세상살이에서 비교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교에 흔들리지 않는 법은 훈련할 수 있다.
1. 기준을 순위에서 '사명'으로 바꿔라
비교는 언제나 묻는다. "나는 몇 등인가?" 사명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오늘 내가 맡은 역할을 다했는가?" 오케스트라 무대에서 주목받는 것은 언제나 바이올린과 피아노 연주자다. 관객의 박수도, 언론의 조명도 대부분 그들에게 쏠린다. 하지만 튜바 연주자는 알고 있다. 자기의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 연주는 무너진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자리지만 가장 정확한 박자를 지켜내어, 음악을 완성한다.
비교는 옆 사람을 보게 만든다. 사명은 당신 자신의 방향을 점검하게 한다. 방향이 분명하면 속도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2. 비교의 '환경'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라
비교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환경의 문제다. 보지 않으면 흔들릴 일이 줄어든다. 예수조차도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물러났다. 사람들 한가운데 계속 머물며 흔들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산에 사는 자연인들,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환경을 철저히 차단한 결과, 나름 자기다움으로 잘 살아간다.
SNS를 줄여라. 당신을 자극하고 위축시키는 정보로부터 거리를 두라. 비교의 환경에 노출돼 있으면서 비교에 흔들리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모순이다. 환경을 관리하지 않으면 마음도 관리되지 않는다.
3. 이미 충분하다는 '정체성'을 붙들라
비교는 끊임없이 속삭인다. "너는 아직 부족하다." 비교는 더 가져도 부족하고, 다 이뤄도 모자란다. 비교의 언어는 결코 만족을 허락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음성은 다르다. "너는 내 것이며, 너 자체로 충분하다."
비교를 이기는 힘은 남보다 낫다는 확신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미 '하늘의 사랑으로 충분하다'라는 정체성에서 나온다. 이 사실을 느끼려 애쓸 필요는 없다. 그저 인지하라.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살이에서 비교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명, 환경, 정체성을 바로 세우면 비교는 더 이상 당신을 좌지우지 못 한다.
남의 겉모습과 나의 속마음을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멈추라. 비교하며 남의 인생을 사느라고 당신의 오늘을 낭비하지 말라. 비교가 사라진 자리에 생기는 '나다움'과 '지치지 않는 생명력'을 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