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각성의 초상
— 절망과 각성의 초상
1960년대의 서울은 산업화의 빛과 그늘이 공존하던 시대였다. 김승옥의 단편 **〈서울, 1964년 겨울〉**은 그 시대의 황량한 공기 속에서 길을 잃은 인간들의 초상을 그린 작품이다.
이름조차 뚜렷이 제시되지 않은 ‘나’, ‘안’, 그리고 ‘사내’의 하룻밤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도시의 익명성과 인간 존재의 허무를 탐색한다.
이 작품은 한국 현대문학에서 ‘도시적 감수성’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김승옥 특유의 냉정하고 투명한 문체 속에 삶과 죽음, 소통과 단절, 죄의식과 속죄가 교차한다.
작품은 낯선 세 남자가 한 선술집에 모여 소주를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파리를 사랑합니까?”라는 엉뚱한 질문은 곧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모티프가 된다.
날 수 있지만 언제든 잡힐 수 있는 ‘파리’는 인간 존재의 이중성을 은유한다. 자유를 갈망하지만 현실에 묶여 살아야 하는 인간의 모순, 그것이 이 대화 속에 응축되어 있다.
구운 참새를 안주로 한 이 대화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씁쓸하다.
김승옥은 이런 일상의 풍경 속에서 인간 실존의 밑바닥을 응시한다.
‘꿈틀거리는 것’에 대한 언급은 생명력에 대한 희미한 의지를 보여주지만, 그 생명력조차
곧 허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장면에서 이미 작가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조용히 던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집으로 자리를 옮긴 세 사람 중 사내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장면은 작품의 전환점이다.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다는 담담한 고백은 독자를 전율하게 만든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랑하는 이를 거래해야 했던 사내의 현실은 1960년대 한국 사회의 가난과 비인간화를 상징한다.
사내는 죄의식과 체념이 뒤섞인 어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지만, 그의 말에는 구원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미 절망의 끝에 서 있으며, 그 고백은 자기 파멸을 향한 예언이 된다.
이때부터 독자는 그의 존재를 단순한 개인이 아닌, 시대의 비극을 떠안은 상징으로 보게 된다.
“택시! 저 소방차 뒤를 따라 갑시다.”
이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세 인물의 밤은 초현실의 장으로 옮겨간다.
불이 난 현장을 향한 그들의 질주는 단순한 구경이 아니라, 내면의 불길을 향한 무의식적 도피이다.
안은 지루함을 느끼고, 나는 무관심하며, 사내는 환각에 빠진다.
이 차이는 곧 각자의 삶의 태도이자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이다.
김승옥은 이 장면에서 불을 ‘파괴’와 ‘정화’의 이중적 상징으로 사용한다. 사내에게 불은 죄책감을 태워 없애려는 마지막 희망이자, 동시에 그 자신을 집어삼키는 절망의 불꽃이다.
사내가 손수건에 싼 돈을 불길 속으로 던져버리는 장면은 작품의 절정이다.
그것은 단순한 물질의 소각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마지막 항거이자 속죄의 몸짓이다.
돈은 죽은 아내의 시체값이며, 그 불태움은 세속적 가치의 거부이다.
이 행위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남는다.
불길과 돈, 절망과 정화가 동시에 폭발하는 그 순간, 사내는 자신의 삶을 불 속에 내던진다.
그러나 그 속죄는 결코 구원을 가져오지 않는다.
남는 것은 오직 허무뿐이다.
이 장면은 인간이 절망 속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스스로를 태워버릴 뿐이라는 비극적 진실을 드러낸다.
다음 날 아침, 사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나’와 ‘안’은 황급히 여관을 떠난다.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죽음의 그림자를 전신으로 느낀다.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냐”는 대사는 단 하루 밤의 사건이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상징한다.
이 말은 육체의 노화가 아니라, 실존적 각성을 의미한다.
그들은 사내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자기 안의 공허와 두려움을 본다.
김승옥은 마지막까지 설명을 절제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도록 만든다.
열린 결말 속에서 남는 것은 침묵이며, 그 침묵이야말로 이 작품의 진정한 울림이다.
〈서울, 1964년 겨울〉은 겨울의 냉기처럼 차갑고 투명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인간의 외로움, 죄책감, 그리고 구원의 욕망이 숨어 있다.
김승옥은 시대의 가난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인간의 본질적 고독을 그려냈다.
결국 이 작품은 1960년대의 이야기이면서도 오늘의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서울’ 속을 걸으며, 어쩌면 그 사내처럼 속죄와 구원을 동시에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백조히프(김재민), 독일 경영학 박사, 전 경성대학교 교수
‘인문학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글’을 쓰며,
경제 경영·문학·역사·철학·예술교양을 넘나드는 사유의 지평을 탐구합니다.
현재 브런치에서 《세계명작 단상 시리즈》를 연재 중이며,
크몽에서는 『러시아 문학』, 『독일 문학』, 『프랑스 문학』,『영미 문학』, 『한국 문학』 등
e-Book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네요.
언제나 인간의 내면을 통해 시대를 읽고, 시대를 통해 인간을 해석한다는 신념으로 글을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