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은 무엇을 좇는가
문학은 인생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사유의 흔적을 담아내는 예술이다. 이문열의 중편 『금시조』는 바로 그런 경계의 한복판에서 스승과 제자가 서로 다른 예술관을 붙들고 씨름하는 이야기이다. 매화와 대나무, 글씨와 정신, 아름다움과 도덕 사이를 오가며 충돌하는 두 사람의 사유는 오늘의 독자에게도 여전히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겨울날 매화를 그리던 석담과 이를 바라보던 고죽 사이에 벌어진 매죽 논쟁은 작품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는 중심 장면이다.
석담에게 매화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추위 속에서 피어나는 절개와 기상의 상징이다.
따라서 매화를 그린다는 것은 꽃잎의 형태를 모사하는 일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신적 의미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이었다.
그는 예술을 인격의 발현으로 보았고,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덕과 도를 깨닫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맞선 고죽의 반론은 단호하다.
“매화는 그저 아름다운 꽃일 뿐이며, 그 자체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이미 완결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을 도덕의 수단이 아닌, 하나의 독립적 세계로 바라보았다.
이 짧은 언쟁은 단순한 미적 관점의 차이를 넘어, 두 사람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얼마나 다르게
짜여 있는지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면이다.
석담은 예술을 도(道)의 구현으로, 고죽은 예술을 자유로운 정신의 발현으로 본다.
두 길은 마치 나란히 가듯 보이나 서로를 결코 완전히 포용하지 못한다.
매죽 논쟁이 구체적 소재를 둘러싼 실전이었다면, 예도 논쟁은 예술의 존재 이유 그 자체를 겨냥한다.
청년기에 접어든 고죽이 스승의 교훈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이 대화는 작품의
철학적 핵심이라 할 만하다.
석담은 예술가를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도덕적 교화자, 즉 사람들의 마음을 바르게 이끄는 존재로 보았다.
그림 한 점, 글씨 한 획에도 인격이 드러나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전통적 사유의 연장선상에 있다.
반면 고죽은 서구 사조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예술관을 받아들인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예술은 인간의 정신을 얽매지 않는 자율적 세계라는 것이다.
둘의 논쟁은 며칠 밤을 새워 이어졌으나 누구도 상대를 설득하지 못한다.
스승에게는 제자의 패기가 안타깝고, 제자에게는 스승의 고집이 애틋하다.
그들의 간극은 좁혀지지 못한 채 점점 더 깊어지며, 결국 필연적인 결별을 향해 나아간다.
고죽이 스승을 떠나는 장면은 작품의 감정적 정점이다.
이는 단순한 독립 선언이 아니라, 자신을 키워준 스승과의 관계를 끊어내야 하는 애증의 순간이다.
떠나는 날, 고죽은 석담의 방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린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싶지만, 실망한 스승의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그는 결국 긴 침묵 끝에 편지 한 통만 남기고 집을 떠난다.
“제가 스승님을 배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 마음 속의 길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을 뿐입니다.”
편지를 읽은 석담은 하루 종일 말을 잃는다.
그는 고죽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평생 붙들어온 가치가 제자에게 부정당한 듯한 상처를 받는다.
이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애틋한 균열을 남긴 채 갈라진다.
말년의 고죽이 기르던 금시조가 죽는 장면은 작품 전체에서 가장 상징적이다.
황금빛 깃털과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지닌 금시조는 고죽이 추구하던 순수한 아름다움의 화신이었다.
스승을 떠난 이후 평생 붙들어온 ‘자유로운 예술혼’이 바로 그 새에 투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시조의 죽음은 그 아름다움조차 결국 덧없음의 세계에 속한다는 현실을 고죽에게 직면하게 한다.
그는 생의 황혼에서 스스로 묻는다.
“내가 좇아온 아름다움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금시조의 죽음은 고죽이 살아온 예술적 여정의 한계이자, 그가 스승의 가르침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죽음을 앞둔 고죽은 평생의 예술적 편력을 되돌아보며 조용히 깨닫는다.
자신과 스승이 걸어온 길은 다르게 보였으나, 결국은 한 점에서 만나는 길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름다움과 도덕, 순수예술과 예도(藝道)는 서로 대립하는 듯하지만, 궁극에는 인간의 정신이 도달해야 할
동일한 경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죽은 늦은 나이에야 스승과의 갈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고, 마음속에서 비로소 화해가 이루어진다.
『금시조』는 예술이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묻는 작품이다.
스승과 제자의 논쟁은 오래된 질문처럼 보이지만, 오늘의 예술과 창작을 둘러싼 논의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주제이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완전한가, 혹은 도덕적 이상을 담아야 온전해지는가.
정답은 아마 어느 한쪽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은 분명히 말한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도, 진지하게 예술을 좇는 마음은 결국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는 것을.
백조히프(김재민), 독일 경영학 박사, 전 경성대학교 교수
‘인문학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글’을 쓰며,
경제 경영·문학·역사·철학·예술교양을 넘나드는 사유의 지평을 탐구합니다.
현재 브런치에서 《국내외 명작 단상 시리즈》를 연재 중이며,
크몽에서는 『러시아 문학』, 『독일 문학』, 『프랑스 문학』,『영미 문학』, 『한국 문학』 등
e-Book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네요.
언제나 인간의 내면을 통해 시대를 읽고, 시대를 통해 인간을 해석한다는 신념으로 글을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