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외피 속 내면적 강인함
어떤 사랑은 다가오지 않는 대신, 멀리서 오래 머문다. 서영은의 단편 『먼 그대』는 바로 그런 사랑을 품고 살아낸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초라한 현실과 고된 일상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만의 생을 일구어가는 주인공 문자의 세계는 소박하지만, 그 소박함 안에 놀라운 강인함이 깃들어 있다. 이 글은 작품 속 장면들을 따라 문자가 걸어간 고독한 길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단상이다.
문자는 마흔을 앞둔 노처녀로, 아동도서 전문 H출판사에서 십 년째 말단 교정 일을 한다.
동료들은 그녀의 초라한 옷차림과 답답한 처지를 비웃고, 점심시간마다 무리에서 그녀를 제외한다.
그러나 문자는 그 어떤 멸시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누구의 눈에도 초라한 여인이지만, 그녀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작은 기쁨을 가꾸며 살아간다.
퇴근길, 뒷담화에 가까운 수군거림을 들으면서도 문자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다.
마치 이런 고독이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몫임을 아는 듯, 조용히 보리차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랜다.
‘등 뒤에서 시린 바람이 회오리친다’고 묘사된 그녀의 모습은 차갑고 고단한 현실을 온전히 감수해내는
문자의 내적 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자의 삶은 한수를 만난 뒤부터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문도 모른 채 한수에게 빠져들고, 그에게 헌신하는 동안 문자는 사랑을 통해 삶의 무게를 견딜
새로운 이유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에게 가정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녀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 서게 된다.
문자는 그렇다고 한수를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묵직한 결의로 변한다.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을 나는 철저히 그를 사랑함으로써 복수할 테다.”
이 대사는 문자의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녀에게 사랑은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품고 버티게 하는 실존적 의지이다.
문자는 미움이나 집착이 아닌, 더 깊고 고독한 형태의 헌신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한수는 광업소 소장이 되어 부유해지지만, 문자를 향한 태도는 여전히 무정하다.
때때로 방문하여 잠시 머물고, 돈을 던져주듯 두고 가는 그의 모습은 문자를 더욱 외롭게 만든다.
그러나 이제 문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한수의 무심함도, 자신에게 몰아치는 가난도 더는 자신을 부수지 못하게 허락하지 않는다.
문자가 마음속에서 그려내는 낙타의 이미지는 고통을 끌어안고 묵묵히 걸어가는 실존적 존재를 상징한다.
그녀는 자신의 딸 옥조에게도 언젠가 그 낙타를 스스로 깨워 길을 견디게 해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딸에게는 미안함이 먼저 떠오르지만, 그 고통조차 삶의 진실에 가까이 가는 과정이라 확신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미지가 나무의 뿌리이다.
문자는 방바닥 아래,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은 곳에서 하얗게 뻗어나가는 뿌리의 생명력을 떠올린다.
이 이미지는 그녀가 현실의 억압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자신만의 단단함을 길러왔음을 상징한다.
뿌리는 어둠 속에서 생명수를 찾아 나아가는 존재이며, 문자는 바로 그 힘을 발밑에서 느끼며 살아왔다.
문자의 사랑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한 사랑이다.
하지만 그 결핍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더 큰 세계를 본다.
그녀에게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관통하는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이겨내며 닿게 되는 한 단계 높은 경지이다.
문자는 한수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를 사랑해왔던 지난 세월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한 줄기 사막길처럼 받아들이고, 그 위를 낙타가 걸어가듯 천천히,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삶이 자신을 한껏 움켜쥐고 흔들 때에도 문자는 주저앉지 않는다.
그녀에게 고통은 삶의 무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더욱 깊게 파고드는 통로가 된다.
그리하여 문자는 고통을 초월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고요한 평정의 자리에 이른다.
『먼 그대』는 한 여인의 비루한 현실과 사랑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작품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인간 존재가 품을 수 있는 놀라운 강인함을 본다. 문자의 사랑은 결핍으로 시작되었지만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결핍을 딛고 삶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된다.
문자의 길은 멀고도 고독했으나, 그녀는 그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낙타처럼 묵묵히 걸어간 그 여정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백조히프(김재민), 독일 경영학 박사, 전 경성대학교 교수
‘인문학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글’을 쓰며,
경제 경영·문학·역사·철학·예술교양을 넘나드는 사유의 지평을 탐구합니다.
현재 브런치에서 《국내외 명작 단상 시리즈》를 연재 중이며,
크몽에서는 『러시아 문학』, 『독일 문학』, 『프랑스 문학』,『영미 문학』, 『한국 문학』 등
e-Book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네요.
언제나 인간의 내면을 통해 시대를 읽고, 시대를 통해 인간을 해석한다는 신념으로 글을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