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다니자키 준이치로, '슌킨 이야기'

- 보이지 않음으로 완성되는 사랑, 잔혹한 헌신의 미학

by 백조히프 김재민


⏹ 작품을 읽기 전에


'슌킨 이야기'는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1933년에 발표한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사랑과 복종, 미와 잔혹, 감각과 금기를 한데 엮어 ‘관계의 극단’을 탐문한다. 서정적이기보다는 냉정하고, 감동적이기보다는 불편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다니자키 특유의 미학은 가장 또렷한 윤곽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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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의 거리감


이 작품은 오사카의 한 절에서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묘비를 발견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슌킨 대자’와 ‘사스케 거사’. 이미 죽음 이후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장치는, 독자가 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만든다.


화자는 전기를 읽고 자료를 수집해 두 사람의 생을 재구성하는데, 이 ‘전기적 서술’은 감정을 직접 토해내기보다 관찰과 기록의 태도를 취한다. 그 결과 독자는 연민이나 동정보다는, 차갑게 정렬된 사실의 나열 속에서 오히려 더 큰 긴장을 느끼게 된다.


슌킨이라는 존재, 미와 폭군의 결합


슌킨은 어린 나이에 실명한 뒤 샤미센의 천재로 성장한다. 그녀의 음악적 재능은 탁월하지만, 성격은 가혹하고 전제적이다. 작은 실수에도 매질을 서슴지 않으며,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잔혹함은 단순한 악의가 아니라 ‘완전한 미’를 향한 집요한 의지처럼 보인다. 슌킨에게 인간관계란 교류가 아니라 통제의 대상이며, 사랑조차도 미의 질서 속에 종속된다.


⏹ 사스케의 헌신, 사랑인가 복종인가


사스케는 하인으로 출발해 제자가 되고, 마침내 전 생애를 슌킨에게 바친다. 그는 체벌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사랑의 증거로 받아들인다. 이 관계에서 사스케는 피해자이자 자발적 공모자이다.


다니자키는 이 남성을 통해 ‘사랑이 어디까지 자신을 말소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사스케의 헌신은 숭고해 보이지만, 동시에 불안할 정도로 자기 파괴적이다.


감춰진 사랑과 부정된 현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태어나지만, 그 사실은 곧 지워진다. 혈연과 책임이라는 현실적 흔적은 이 관계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취급된다. 슌킨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적 규범도, 도덕적 책임도 아니다. 오직 자신의 미적 세계가 훼손되지 않는가 여부이다.


사랑은 존재하지만 인정되지 않고, 관계는 깊지만 공적 언어를 갖지 못한다. 이 은폐의 구조는 작품 전반에 흐르는 음울한 긴장을 강화한다.


얼굴의 훼손과 시선의 문제


슌킨의 얼굴에 끓는 물이 쏟아지는 사건은 이 작품의 결정적 전환점이다. 얼굴은 사회적 자아의 표면이며, 미의 가장 직접적인 현현이다. 그 얼굴이 훼손되자, 슌킨은 더 이상 ‘보여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사스케는 자신의 두 눈을 찌른다. 이는 충동적 미담이 아니라, 관계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이다. ‘보지 않음’은 연민이 아니라, 슌킨의 세계에 완전히 동조하기 위한 선택이다.


⏹ 보이지 않음으로 완성되는 결합


사스케의 실명 이후, 두 사람은 비로소 평온에 도달한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외부의 시선도, 비교도, 판단도 없다. 사랑은 시각을 제거한 자리에서 오히려 완성된다.


다니자키는 이 장면에서 잔혹한 역설을 제시한다. 인간은 너무 많이 보기 때문에 불행하며, 관계는 너무 많이 드러나기 때문에 깨진다는 주장이다. 이 작품에서 행복은 밝음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만 가능하다.


다니자키 미학의 극단


'슌킨 이야기'는 끝없이 헌신하는 이타적 사랑의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미를 절대화할 때 인간관계가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이다.


다니자키는 독자에게 판단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 결과 독자는 이 사랑을 부정할 수도, 쉽게 찬미할 수도 없는 불편한 자리에 놓인다. 바로 그 불편함이 이 작품의 성취이다.


맺음말 ― 백조히프(김재민)


'슌킨 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감동이 아니라 당혹감이었다. 사랑을 이렇게까지 극단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가, 미를 향한 숭배의 집요함이 스스로 자기 눈을 찔러야 할 정도의 광기를 보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다니자키는 일본적 유미성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불편함을 감수하게 하고, 이해보다는 숙고를 요구하는 듯 했다. 그러자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의 치열한 문학적 탐구성이 인정되어졌다.


사랑과 복종, 미와 파괴라는 위험한 재료를 감상적 장식 없이 정면으로 다루는 태도는, 작가로서의 단단한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선택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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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히프(김재민), 독일 경영학 박사, 전 경성대학교 교수


‘인문학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글’을 쓰며,

경제 경영·문학·역사·철학·예술교양을 넘나드는 사유의 지평을 탐구합니다.

현재 브런치에서 《국내외 명작 단상 시리즈》를 연재 중이며,

크몽에서는 『러시아 문학』, 『독일 문학』, 『프랑스 문학』,『영미 문학』, 『한국 문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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