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피어난 가와바타의 미학

by 백조히프 김재민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설국』은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미학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응축된 작품이다.


이 소설은 뚜렷한 사건 전개나 서사적 긴장보다는, 한 인간의 감각과 인식이 자연과 타인의 존재를 통과하며 어떻게 미묘하게 흔들리는지를 집요하게 응시한다.


눈 덮인 변방의 세계, 이른바 『설국』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현실과 환상, 감각과 사유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공간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설국 마을.jpg


기차 창문에 비친 세계 ― 현실과 환상의 첫 균열


소설의 문을 여는 기차 창문의 장면은 가와바타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해질 무렵, 기차 유리창은 더 이상 바깥을 비추는 창이 아니라 거울이 된다. 그 위에 비친 요코의 눈동자와 바깥의 설경이 겹쳐지는 순간, 시마무라는 하나의 세계가 아닌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본다.


“눈 속을 뚫고 나오는 등불이 요코의 얼굴을 떠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는 묘사는, 감각의 착시를 넘어 현실과 환상이 서로 침투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 장면은 이후 설국에서 펼쳐질 모든 체험이 명확한 현실이 아니라, 늘 몽환적 경계 위에 놓여 있음을 예고한다.


⏹ 고마코와의 첫 만남 ― 손끝에 배인 삶의 온도


온천 여관의 다다미방에서 이루어지는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첫 만남은 도시와 변방, 관념과 삶의 대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사미센을 연주하는 고마코의 손끝에서 시마무라는 굳은 살을 발견한다. 그 굳은 살은 그녀가 살아온 삶의 무게이며, 연습과 절제의 시간이다.


“청아한 소리가 산울림처럼 방 안에 퍼져나갔다”는 표현 속에서, 고마코의 연주는 단순한 기예가 아니라 생의 진정성이 스며든 예술로 승화된다. 이 순간 시마무라는 도시적 허영과 자신의 공허함을 은연중에 자각한다.


요코의 목소리 ― 눈에 보이지 않는 순수의 형상


요코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장면은 『설국』의 정서적 결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 깊은 밤, 병든 유키오를 부르는 요코의 목소리는 “야산의 메아리”처럼 시마무라의 내면을 울린다.


가와바타가 그려낸 이 목소리는 육체를 넘어선 영혼의 발현이다. 투명하면서도 깊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그 울림은 시마무라에게 고마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미적 체험을 안겨준다. 요코는 끝내 손에 잡히지 않는 순수의 상징으로 남는다.


거울 속의 고마코 ― 사랑이 아닌 관조의 시선


거울 속에서 고마코를 바라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은 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거울 속의 고마코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는 문장은, 그가 현실의 고마코보다 이미지화된 고마코에 더 매혹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시마무라가 타인을 삶의 동반자가 아닌 미적 대상으로 소비하려는 관조적 태도를 상징한다. 사랑은 여기서 체험이 아니라 감상의 대상이 된다.


고마코의 일기장 ―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한 인간


고마코의 일기장을 통해 드러나는 그녀의 내면은 시마무라에게 또 하나의 충격을 준다. 도쿄에서 사온 책들을 읽고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그녀의 문장은, 게이샤라는 외형 뒤에 숨은 지적 성실함을 증명한다.


이 장면은 고마코가 단순한 정서적 대상이 아니라, 자기 삶을 진지하게 사유하는 존재임을 드러내며, 시마무라의 가벼움을 부끄럽게 만든다.


눈 속의 만남과 분노 ― 순수와 존엄의 충돌


눈 내리는 밤의 만남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가장 아름답고 동시에 가장 덧없다.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았다가 사라지는 눈송이는 그들의 관계 자체를 상징한다.


그러나 고마코의 분노 장면에서 이 관계는 결정적으로 균열된다. “나는 당신의 장난감이 아니다”라는 외침은, 그녀가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내지르는 절규이다. 이 분노는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시마무라의 무책임함을 고발한다.


영화관 화재와 은하수 ― 관조의 파국과 우주적 고독


영화관 화재 장면은 소설의 클라이맥스이다. 요코를 안고 절규하는 고마코의 모습 속에서 시마무라는 인간 존재의 숭고함과 비극을 동시에 목격한다. 불길 속에서 더 이상 관조는 허용되지 않는다.


마지막 은하수 장면에서 시마무라는 개인적 체험을 넘어 우주적 고독 속으로 던져진다. 은하수는 덧없는 인간 삶과 대비되는 무한의 상징이며, 『설국』의 모든 감각적 체험이 궁극적으로 귀결되는 사유의 지점이다.


맺음말-백조히프(김재민)


중학교 2~3학년 무렵, 『설국』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나는 이 작품의 명성에 일본의 국력과 번역가의 공이 적지 않게 작용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56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은 『설국』은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일본 북쪽 설국의 눈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인물,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시선은 놀랄 만큼 단아하고 명료하다. 그것은 감정을 과장하지도, 의미를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마치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처럼, 고요한 화면 속에 세계가 스스로 정돈되어 있다. 이제야 비로소 이 소설이 시간의 검증을 견뎌온 이유를, 제대로 납득하게 된다.


◆ 작가 프로필


김재민 사진(2014).jpg

백조히프(김재민), 독일 경영학 박사, 전 경성대학교 교수


‘인문학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글’을 쓰며,

경제 경영·문학·역사·철학·예술교양을 넘나드는 사유의 지평을 탐구합니다.

현재 브런치에서 《국내외 명작 단상 시리즈》를 연재 중이며,

크몽에서는 『러시아 문학』, 『독일 문학』, 『프랑스 문학』,『영미 문학』, 『한국 문학』 등

e-Book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네요.

언제나 인간의 내면을 통해 시대를 읽고, 시대를 통해 인간을 해석한다는 신념으로 글을 쓰고 싶습니다.


PS: 제가 발간한 e-Book '2차대전사 독일군 전격전+영국본토 항공전+경영 시사점'에 대한 소개 사이트 입니다.https://kmong.com/self-marketing/730895/dVqcXI4pXw


PS: 제가 발간한 e-Book '도스토옙스키의 3부작 완전해설본'에 대한 소개 사이트 입니다. https://blog.naver.com/corazon27/224118554226


PS: 제가 발간한 e-Book '자서전 1-유년과 초등 시절(1955~1966)'에 대한 소개 사이트 입니다. https://kmong.com/self-marketing/726125/6grM1p7wRa




작가의 이전글[문학단상] 다니자키 준이치로, '슌킨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