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위화, '인생'(살아내는 것, 活着)

- 모든 것을 잃고도 계속 살아가는 한 인간의 초상

by 백조히프 김재민

작품에 들어가며


『인생』은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위화의 대표작으로, 격변의 20세기 중국사를 한 개인의 삶에 응축시킨 소설이다. 이 작품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한 인간이 ‘그저 살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따라가며,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닌 무게를 묻는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비극의 강도가 아니라, 비극을 견뎌내는 태도의 문제를 끝까지 놓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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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 속에서 들려오는 한 인간의 인생


『인생』은 민요를 수집하던 화자가 늙은 농부 푸구이를 만나 그의 삶을 듣는 액자소설 구조를 취한다.


이 간접적 서술은 독자로 하여금 푸구이의 고통을 과잉 감정 없이 바라보게 한다. 푸구이는 자신의 인생을 원망하지도, 항변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있었던 일을 차분히 이야기할 뿐이다. 이 담담함이 오히려 독자를 깊은 심연으로 끌어들인다.


몰락이 구원이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1940년대, 푸구이는 부유한 지주 집안의 도련님으로 태어나 방탕한 삶을 산다.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가족까지 몰락시킨다. 그러나 이 몰락은 역설적으로 그의 생존을 보장한다.


지주 계급에서 탈락했기에 이후 토지개혁기의 유산자 학살을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화는 이 대목에서 인간의 도덕이나 노력보다 앞서는 ‘역사의 우연성’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개인의 선택이 아닌, 우연한 위치 변화가 생사를 가른다.


전쟁과 귀환, 그리고 이미 사라진 것들


국공내전 속에서 강제 징집된 푸구이는 전쟁터에서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는지를 목격한다.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고향에는 이미 어머니의 죽음과 딸의 장애라는 또 다른 상실이 기다리고 있다. 아내 지아전은 묵묵히 모든 고난을 견디며 가족을 지켜온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 여성은 말이 적지만, 삶의 무게를 가장 오래 짊어진 존재로 그려진다.


가장이 된다는 것의 늦은 자각


1950년대 초, 푸구이는 비로소 가장이 된다. 화려함도, 희망도 없는 삶이지만 그는 성실하게 땅을 일군다. 그러나 이 시기의 소박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대약진운동이라는 국가적 광기가 개인의 일상을 덮치면서, 아들 요우칭은 무모한 헌혈로 죽음을 맞는다. 국가의 열정이 한 아이의 생명을 앗아가는 장면은, 이 소설이 지닌 정치적 비판의 핵심이다.


혁명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문화대혁명은 남은 가족마저 파괴한다. 사위 완진은 출신 성분으로 탄압받고, 딸 펑샤는 전문의가 숙청된 무지와 혼란의 병동에서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혁명은 새로운 인간을 만들겠다고 외쳤지만, 이 소설 속에서 혁명이 남긴 것은 무덤뿐이다. 그러나 위화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는 기록하듯 서술한다. 이 절제된 태도가 오히려 현실의 잔혹함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가장 허무한 죽음, 그리고 남겨진 삶


손자 쿠겐의 죽음은 이 소설에서 가장 잔인한 아이러니다. 굶주림 속에서 살던 아이가, 배불리 먹고 싶다는 소망 때문에 삶은 콩을 너무 먹어 급과식으로 죽는다.


이는 비극의 절정이 아니라, 비극의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후 푸구이는 소 한 마리와 함께 살아간다. 소의 이름 또한 ‘푸구이’이다. 그는 죽은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다른 푸구이와 함께 밭을 간다. 떠나간 가족에의 기억이 그에게는 삶의 방식이 된다.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의 의미


『인생』은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생존을 말한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의무에 가깝다. 푸구이는 모든 것을 잃고도 살아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이 소설은 충분히 무겁다. 위화는 인간이 얼마나 많이 잃고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계속 살아감’이야말로 인생의 본질임을 담담하게 말한다.


맺음말 ― 백조히프(김재민)


이 소설을 덮으며 나는 한 가지 생각 앞에 오래 머물게 된다. 나와 동년배인 위화라는 작가는, 아직 40대의 나이에 어찌 이토록 많은 고된 삶을 직간접으로 통과한 듯한 소설을 써낼 수 있었을까 하는 경외감이다.


단순한 상상이나 취재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이 작품에 스며든 삶의 무게와 체온이 지나치게 진하다. 이는 삶을 멀리서 관찰한 시선이 아니라, 고통의 결을 몸으로 이해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시선이다.


『인생』이 끝내 도달하는 지점은 명확하다. 인생은 설명되거나 해석되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견뎌내는 과정이라는 인식이다. 푸구이는 깨닫지 않는다. 다만 살아낸다.


그 침묵의 태도 속에서 나는 깊은 실존적 의지를 본다. 살아 있음은 의미를 부여받아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부재한 상태에서도 계속 이어지는 행위라는 사실을 이 소설은 말해준다.


◆ 작가 프로필


김재민 사진(2014).jpg

백조히프(김재민), 독일 경영학 박사, 전 경성대학교 교수


‘인문학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글’을 쓰며,

경제 경영·문학·역사·철학·예술교양을 넘나드는 사유의 지평을 탐구합니다.

현재 브런치에서 《국내외 명작 단상 시리즈》를 연재 중이며,

크몽에서는 『러시아 문학』, 『독일 문학』, 『프랑스 문학』,『영미 문학』, 『한국 문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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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인간의 내면을 통해 시대를 읽고, 시대를 통해 인간을 해석한다는 신념으로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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