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전날은 매우 고요하고 화창할 때가 많다. 그날도 그랬다. 태풍이 온다고? 슈퍼 컴퓨터가 오류인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햇살은 투명하고 바람조차 잠잠했다. 오전에 제법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얼마 되지 않아 그쳐서인지 햇살은 깨끗한 도화지처럼 구김살이라곤 하나 없었다. 기상 예보대로 하자면 장화를 신었어야 했다. 기상 예보를 불신한 나는 걷기 편한 운동화를 신고 친구와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그때에는 몰랐다. 그날 내가 겪게 될 일들을...
출퇴근할 때에는 주로 운전을 한다. 그 외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며 대중교통 이용을 시티투어라고 이름 붙였다. 좌석에 편안히 앉아 거리 풍경과 사람들을 구경한다.
아니 저런 건물이 새로 생겼네.
저런 가게들이 입점했구나.
지금 공사하는 저 자리는 원래 무슨 건물이었지?
등등의 생각을 하며 투어를 한다.
운전을 그렇게 즐기지 않으므로 이런 시간은 참으로 평화로운 시간이다. 전날 웹사이트 지도로 미리 확인한 약속 장소와 길 찾기 기능을 통해 내 동선을 확인해 놓은 상태였다. 정해진 대로 버스를 한 번 타고 환승 지점에 내려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처음 타는 버스인데 앞차가 막 떠났는지 전광판 안내에 다음 차는 20분 후라는 안내가 나왔다. 늦지 않을까 걱정하던 차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산은 챙겨 나왔다. 조금 있으니 지하철을 경유하는 버스가 도착했다. 20분을 기다리느니 한 번 더 환승이 필요하지만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하고 버스에 탔다. 평일 낮 시간인데도 지하철로 가는 길은 교통 체증이 제법 있었다. 환승할 역에 내려 지하철을 탔다. 목적지에 내려 출구를 나오니 비는 좀 더 강도를 높이고 있었다.
세상 모든 소리는 빗소리에 항복했다. 약속 장소인 카페까지 택시를 타려고 했으나 빈 차는 보이지 않았다. 길 찾기를 통해 본 기억으로 지하철 역에서 700미터라고 했던 생각이 났다. 그냥 걸어서 가기로 했다. 걷다 보니 평지가 아니라 경사가 꽤 있는 지형이라 거의 등산을 하는 느낌으로 걸어야 했다. 거기다 비까지. 친구에게 조금 늦겠다고 전화를 하려고 건물 안 계단실에서 휴대전화를 찾았다. 가방 안에 전화기가 없다. 어디에도 없다
카페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가는 길에 손님이 없는 편의점에 들러 물었다. 친절하신 분이 잘 모르겠다고 하시면서도 휴대전화로 검색을 하여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십오 분 정도 늦었다.
간판을 확인하고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개인 사정으로 쉽니다' 하고 종이로 붙여 놓았다.
거리로 나와서 올려다보니 전등이 모두 꺼져 있었고 창문이 실내가 깜깜한 것으로 보아 휴일임이 틀림없었다.
친구들은 어디로 간 걸까? 어디 메모라도 붙여놓았나 하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약속 장소를 중심으로 가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들을 살펴보았다. 근처로 자리를 옮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비에 옷도 신발도 다 젖었다. 빗속을 걸어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배가 고팠으나 젖은 상태라 불편해서 그냥 생략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소파 위에 휴대전하가 얌전하게 앉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편안하게 보였다. 뽀송하게 윤이 나고 귀티마저느껴졌다. 나를 놀리는 듯 보였다. 피곤하고 젖은 것은 나뿐이었다. 귀하신 몸값을 뽐내는 휴대전화를 들어 스크린을 켜보니 형광빛을 발하는 바탕 화면에 문자 5, 카카오톡 메시지 28, 부재중 전화 14라는 숫자가 인형 머리에 붙은 나비핀처럼 얹혀있었다.
'카페가 노는 날이네, 고메로 옮기니까 그리로 와~'라는 메시지로 시작으로 하여 '걱정되니 빨리 연락 줘~'로 메시지는 끝나 있었다.
장소를 옮기면서 친구들이 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통화 중이어서 문자를 남기고 빗속을 떠났다고 한다. 집에 있는 휴대폰이 왜 통화 중이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알아보니 여러 명이 동시에 전화하면 통화 중으로 안내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에피소드들이 떠오른다.
만나기로 한 운명의 연인이 약속 장소로 오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던 한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고
둘은 이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다는 영화 속의 애틋한 사연들.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영화 제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근에도 있었다. 이런 애틋한 엇갈림으로 헛것이 보이도록 애타게 기다리는 에피소드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우리의 긍정 에너지 정봉이 미옥을 기다리던 '반쥴'. 둘은 같은 건물 다른 층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영화처럼 엇갈렸다. 휴대전화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지금은 21세기, 우주선 탑승자를 모집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휴대전화가 없는 하루. 20세기 여행을 하는데 그 하루를 온전히 바쳤다. 일기예보를 의심하는 건방짐과 휴대전화를 극진히 모실 줄 모르는 불손함으로부터 시작된 추억 여행. 그 여행을 통해 홀대하던 휴대전화에 대한 존경심, 나의 보잘것없음, 친구와 함께 하는 식사와 대화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하루 동안 긴 꿈을 꾼 것 같다. 휴대전화를 가지기 이전의 시간 속으로. 그리고 한 가지 더. 불행은 혼자 다니지 않는다는 실감.
휴대전화를 놓고 나온 날 카페는 휴업했으며 한낮의 버스는 배차 간격이 길었으며, 나는 소요 시간 예측에 실패했으며 비는 태풍 전날이 태풍 당일보다도 세차기까지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