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잡한 세비야 여행의 길(1)

2. 파랑 세비야

by 해고

오전 7시 즈음인가,

어김없이 새벽에 깬 나는 캐리어를 싸다 화가 나서 다시 침대 위로 드러눕고 싶어졌다.

분명 오기 전엔 공간이 너무 넘쳐서

예의상 뭐라도 채워넣자는 식으로 싼 짐이었는데.

마드리드에서 뭘 산 게 없는데도 캐리어는 뚱뚱하게 부풀어 닫히질 않았다.

덕분에 아침부터 심술이 잔뜩 났다.

(전날 밤에 싸놓았음 편할 것을.)


어찌저찌 버릴 것들은 처리하고 남은 것들로 꾸린 캐리어를 닫고, 아토차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매일 아침 과달라하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저녁엔 과달라하라로 돌아오기 위해서 탔던 집 앞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오늘 이후부턴 다시 타고 돌아올 일 없는 지하철이었다.

지하철 계단 입구 바로 옆에서 스페인 음식을 팔던 컨테이너 노포가 있었는데.

아...

왜 안 먹고 세비야로 향해버렸는지 모르겠다.


나의 한 달 치 짐이 들어있는 커다란 핑크색 캐리어와 함께 입구 앞에 서서야 무언가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좁은 간격의 에스컬레이터가 그날따라 유독 빠르게 내려가는 것 같았다.


지하철 타고 기차역까지 30분이면 갈 수 있길래 교통카드 횟수도 남았겠다

굳이 택시에 돈 쓰지 말자는 안일한 생각으로 노택시 이동을 계획했는데,


무게 분산이 안돼서

"뒷목을 죄여오는 무거운 크로스백 + 잘 다루지도 못하는 캐리어와 함께" 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까진 캐리어를 끌고 오랫동안 이동해본 경험이 없었다.

우선 밑바닥에 바퀴가 두 개나 달려있으니까 이제까지 공항에서 이동했듯 길거리에서도 슝슝 끌고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미친 듯한 속도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계단 앞에서 몇 분동안 안절부절했다.


내가 과연 순발력있게 이 이동수단에 올라탈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물론 중앙에 계단이 있었지만 아침에 짐 싸고 밖으로 나오면서 배출한 짜증으로 이미 온 힘을 다 빼버린 난 호기롭게 두 손으로 캐리어 손잡이를 꽉 붙잡고 한 발 힘차게 나아갔다.




그 일 이후로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


왠지 안될 거 같다는 예감은 곧 지금까지의 데이터.


내 힘은 내가 잘 알고 내 순발력도 내가 가장 잘 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캐리어는 에스컬레이터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입에서 저절로 이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으어어억…”


알고 보니 아래층에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발견하고 나서야 “꾸이다도!! 꾸이다도!!” 하고 외쳤다. 다행히 거리가 좀 있었던 터라 아무도 다치지 않고, 그는 자연스레 자기 갈길을 갔고, 난 죽을 맛이었다.




최근에 에스컬레이터 위쪽에서 놓친 캐리어가 아래쪽에 타고 있던 사람에게 떨어져 큰 사고로 이어졌다는 쇼츠를 본 적이 있다. 그 쇼츠를 보고서 맘이 아찔하고 뒷골이 당겼다. 이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에스컬레이터에 함께 타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그 아래에 누가 서있는지는 신경쓰지 않았던 건 사실이니까.


캐리어는 아래층에 도착해 거의 벽 끝까지 슬라이딩했었으니까…


자칫 잘못했다간 뒤에서 무서운 속도로 그 사람의 다릴 쳤을 수도 있는 거다.

앞으론 아무리 짜증나고 피곤해도 남들이 다칠 짓 하지 말자. 행동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보자 다짐했다...



지하철에 탄 후에 엄마와 전화를 했다.

저녁이었던 엄마는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한 나의 푸념과 울음을 들으며 차분하게 대응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청승맞게 눈물이 나왔다.

과연 이러한 정신과 몸 상태로 기차역까지 가서, 기차를 잘 타고, 세비야에서 택시를 잡아 숙소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다음화에서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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