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와 자퇴생
1. 녹색 마드리드
총 15시간 비행 끝에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에 도착했다.
이코노미 장시간 비행 때문에
몸이 구겨진 채로
어렵사리 기내에서 빠져 나왔다.
온 얼굴에 기름이 번들거리고
(특히 이마와 팔자에)
피곤해 곧 쓰러질 것 같은 몰골로
내가 이용한 항공사의
캐리어 픽업 위치를 찾아 요리조리 해매었다.
웬만하면 눈에 바로 띄는
나의 빤딱 재질 핑크 캐리어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파파고에
“에어 차이나는 어디서 캐리어를 찾나요?”를 쳐서 지나가는 여성 분께 여쭤본 후에야
알맞은 위치로 찾아갈 수 있었다.
어학원 측에 숙소까지의
픽업 서비스를 신청해 놓은 상태였는데
30분 비행기 연착과,
캐리어 안 나옴 이슈로
결국 50분 정도 지각을 하고야 말았다.
픽업 기사님이 가버리셨을까봐 안달복달하며 캐리어를 끌고 출구로 미친 듯이 달렸다.
다행히,
조금 지치고 피곤해진 기사님이
내 이름이 적힌 영어 종이판을 들고
나를 맞아주셨다.
나는 로시엔또, 로시엔또를 연발하며
그에게로 뛰었다.
그와 함께 공항 밖으로 나가니
맑은 밤 공기에 싸늘한 칼바람이 나를 힘껏 맞았다.
(정말 모두가 나를 맞아주었다.)
주변이 온통 새까매서 딱히 볼 수 있는 건 없었지만
내가 기다려 온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됨. 을
제대로 체감했으므로
"로드무비 속 우당탕탕 용감한 여행자"
라도 된 듯한 마음가짐으로
흥미롭게 상황에 빠져들었다.
아, 정말이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난 오랫동안 준비한 독립영화가
기나 긴 고비 끝에 상영되어
극장에서 오프닝을 감상하는 감독의 맘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윌 둘러보니 온통 외국인이었다.
아, 신이 났다.
그리고 기사님,
내 기억 속 기사님의 이미지가
묵직함과 상냥함을 모두 겸비한(!)
매력적인 캐릭터
영화 주토피아의 ‘보고 서장’과
닮아 있기 때문에 앞으로 그를
'보고 기사님'으로 부르도록 하겠다.
보고 기사님은 내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은 뒤
내게 차에 잠깐 앉아 있으라고 말했다.
스페인어 실력이 꽝이라 뭐라는지 못 들었지만 기다리라는 늬앙스 만큼은 바로 알겠어서
잠자코 기다렸다.
남의 차에 혼자 남겨지니
더욱 더 감상에 젖어가기 시작했다.
속으로 “됐어, 됐어!” 하고 소리쳤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
창문 밖으로 보드를 타고,
캐리어를 끌고,
가만히 서 있는 스페인 사람들이 보였다.
공항 바로 앞에 왜 보드 타는 행인들이 있는지는 영문이었지만 그들이 있어 더욱 설렜다.
이어질 한 달 동안
영문 모를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길
간절히 빌었다.
보고 기사님이 돌아올 때까지
오른쪽 창문에 딱 붙어 새로운 나라를 염탐했다.
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까진 그랬다.)
(스페인 입국 당일,
1화 배경인 차 안 풍경 공유합니다.)
01. 녹색 마드리드
1화. 보고 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