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냐와 자퇴생
1. 녹색 마드리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인천 공항에서 베이징까지 3시간,
베이징에서 마드리드까지는 12시간.
경유 시간 제외
총 15시간 이상 비행을 했던 "11월 2일."
전 날엔 설렘과 이런 저런 생각이 쌓여
3시간 정도 수면한 채 바로 출발했고
막상 기내에서도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내 옆좌석에 나란히 앉았던
스페인인 부부(이분들이 문제가 아니라)와
그의 올망졸망 귀여운
겨우 두세 살 정도로 보였던 아기.
에게 있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풀어보도록 하겠다.)
공항에 도착한 후부터는
보고 기사님의 도움으로
안전히 홈스테이 집에 도착했다.
그때 시각은 밤 9시 반이었는데
한국 시간으로는 오전 5시 반이었다.
홈스테이 집에서
호스트 "마르",
그의 딸 "나이아라"와 함께
(나이아라는 열 다섯으로 배우가 되기 위해
연기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저녁밥을 먹고
방에 들어와 곧 딥슬립을 하는 듯 했지만
역시나 새벽 2시 즈음 눈이 저절로 떠졌다.
삼일 가량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였고
하루라도 에너지를 회복할 여유가 있었더다면
저녁 늦게까지 숙면을 취해도 좋았겠지만…
어학원 레벨테스트가
오전 8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오히려 새벽 내내
심심한 상태로 밤을 새고
아침 일찍 나와
어두컴컴한 과달라하라 거리를 걸을 땐
심히 신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각성 상태였던 것 같다.)
거리에서 바나나를 까먹고,
난생 처음으로 마드리드 지하철을 타고
어학원이 있는 마드리드 중심가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정말 신났었다.
쌩쌩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온갖 방향으로 마구 휘날리고
하늘은 퍼랗고
유튜브를 통해서만 봤던 스페인 건물들이
양 옆으로 아름답게 늘어져 있었다.
“이야… 얘네는 맨날 이런 거 보면서 사는 구나…”
감탄하면서도
목에 맨 커다란 크로스 백을 두 손으로 꽉 쥐고 누군가 내 가방을 노리고 있진 않은지
경계하며 거리를 산책했다.
레벨테스트를 마치고
나와 같은 날 학원에 온 사람들과 함께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했다.
도무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함께 온 사람들 중
내가 가장 스페인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오리엔테이션 내내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찬바람을 맞을 땐 정신이 확 깨어 있었는데
뜨듯한 실내에서
정체 모를 말들을 듣고 있자니
정신이 희미해져갔다.
"A1"이라고 적힌 교재를 받아들고
어학원을 나오자마자
두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순식간에 맘이 너무 취약해졌다.
그래서 왜???
그 후로 가끔씩
그 날 왜 청승을 떨었는지
근원을 찾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겨우 내가 스페인어를 너무 못한다는 이유로
외롭기까지 할 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근 결론이 났는데,
오전엔 각성 상태로 돌아 다녀서
오히려 평소보다도 정신이 맑았는데
오후가 되니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가정이다.
힘겨운 비행 끝에 잠을 자지 못해
발생한 감정 불균형으로 마무리 지었다.
한마디로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랬다는 것이다.
외로움이란 감정이 컨디션에 따라
요리조리 흔들릴 수도 있다는 가설이
처음엔 믿겨지지 않았지만
곧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 난 컨디션이 안 좋으면
울거나 인성이 더러워 지는구나.
이유를 알 수 없던
청승 타임의 원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일은
내가 참 그때그때 몸 상태에 따라
맘과 정신이 휘둘리는 인간이란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겠지.
정말 모두가 그렇겠다는 것을
그때 처음 제대로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