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학에서 만난 참 기쁨

by 윤계숙

노성야학 졸업식. 졸업장을 받아 든 졸업생들이 모두 나와 눈물을 흘리며 단상에서 선생님들을 향해 큰절하고 있다. 이어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덕성여대에 합격한 졸업생 김영숙 씨의 졸업생 대표 인사들이 낭독되고 있다. 나는 상투적인 인사말로 가득한 나의 축사 종이를 접어서 가방에 집어넣는다.

시장님이 축사하기 위해 단상에 오르는 동안 내 머릿속은 어떻게 축사해야 하는지 아주 빠른 속도로 준비하고 있다. 시장님에 이어 교육장인 나의 축사 순서이다. 나는 가식 없이 감동한 그대로 말한다.

“사실 축사를 써 왔는데 그게 아무 소용이 없어서 여기 와서 제가 느낀 감동을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졸업식장에서 졸업생들이 우는 모습을 본 것이 3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중략)

제가 지금은 너무 바쁜 자리에 있지만 교육장 임기가 끝나고 조금 시간이 있는 자리로 가면 저도 노성야학에 와서 여러분께 배움을 나누어 드리도록 이 자리에서 약속하겠습니다.”

“와아!” 졸업생들의 환호성과 박수가 요란하다.

졸업식장에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성야학 수업을 온 첫날. 나는 학생들을 둘러본다. 최소 65세에서 90세에 이르는 학생 26명이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미동도 안 하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어느 공고의 교실을 빌려 수업하는 노성야학 교실은 흐린 불빛과 잘 써지지 않는 분필과 칠판으로 궁색함이 치덕치덕 묻어난다. 슬픔과 짜증이 함께 목젖을 간질인다.

나는 첫 질문을 던진다.

“오늘은 여러분이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나눠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한 분씩 빠짐없이 발표해 주세요.”

학생들은 ‘수업은 안 하고 무슨 말을 하라는 거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당황해한다. 곧이어 누군가 용기를 내 발표한다.

“저는 간판의 글씨를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젤 행복했어요, 그리고 핸드폰의 문자를 읽게 되었을 때는 정말 눈물이 나도록 행복하더라구요.”

여기저기서 “저도요!, 저도요!”라는 응원의 말들이 쏟아진다.

“저는 학교라는 곳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 제일 행복했어요. 어려서부터 동생들 키우느라 학교를 아예 못 갔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다 늙어서 학교엘 다니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저는 세상에 글 모르고 셈 못하는 사람이 저만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여기와 보니 이렇게 많은 언니, 동생들이 저처럼 글도 모르고 셈도 잘 못한다는 것을 알고 너무나 반가웠어요. 그리고 이렇게 언니, 동생 하면서 함께 공부하는 것이 젤로 행복하지요.”


노성야학은 45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의정부에 있는 성인 대상 야학이다. 교육장 취임식을 하고 교육장실로 올라와서 첫 번째로 맞은 손님이 노성야학 교장 선생님이셨다. 졸업식이 3월 4일에 있으니 와서 꼭 축사해 달라고 부탁하러 오신 것이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하고 혹시 어려운 것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교실 2칸이 당장 부족하다고 하셨다. 학생들이 늘어나는데 교실로 쓸 곳이 부족하다고…….


나는 교육청 바로 앞에 있는 학교로 가서 교장 선생님을 만나 노성야학 사정을 말하고 가능하면 교실 2칸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다행히 이튿날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교실 2개 사용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내심 안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나는 졸업식장에서 교실 2칸도 확보했노라고 말을 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또 한 번 환호하였다.

노성야학은 그렇게 나하고 인연을 맺은 곳이었다.


첫날 수업을 마치고 교실 문을 나서려는데 학생들이 문 앞에 쭉 늘어섰다. 무슨 일인가 놀라서 멈칫했더니 학생들이 내 손을 잡고 “선생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하는 것 아닌가!

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하지요. 조심히들 가세요.”라고 대답하며 부지런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가슴이 먹먹하였다. 학생들이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운전하는 눈에서는 자꾸 눈물이 흘렀다. 38년째 교직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동안 저렇게 진정 어린 인사를 몇 번이나 들어보았던가. 수도 없이 많은 감사의 인사를 받았지만, 저분들만큼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를 몇 번이나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 평균연령은 73세. 무학도 있고 초등학교 1, 2학년까지만 학교에 다니고 중단한 분들도 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온몸이 불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살다가 85세에 한국에 와서 야학을 다니는 93세의 김영자 학생은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온다고 했고, 관절염을 앓고 있는 신명숙 학생은 발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로 50분을 걸어 학교에 온다고 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결석하지 않았다.

학생들 대부분은 아직도 일을 하고 있었는데 식당의 허드렛일이나 청소일 혹은 폐지 줍는 일을 하면서 야학을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 번은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데 학생 한 분이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 가길래 서서 가만히 지켜보았더니 폐지가 가득 담긴 손수레를 끌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분의 손가락은 안으로 굽어서 펴지지 않았다. 얼굴엔 깊은 주름이 나이보다 몇 살은 더 들어 보이게 했지만, 단 한순간도 수업 중 한눈을 파는 일이 없는 가장 성실한 학생이었다.


노성야학 학생들은 오늘 가르쳐주면 다음 주에는 가르쳐준 내용을 까맣게 잊고 왔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잊는 것에 대해 너무나 미안해하며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걱정하지 마세요. 잊으면 제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다시 가르쳐드리면 되지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데 누군지 아세요?”라고 물었다. 학생들은 눈이 둥그레져서 나를 쳐다보며 궁금함을 감추지 않았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낸 용기와 배움에 대한 열정과 여러분의 노력을 저는 존경합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저희한테 그런 말씀을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저희도 선생님을 존경합니다.”라고 응답하였다.


난 4년간 노성야학 봉사를 하였다. 교육장 임기 끝나고 마지막 학교 교장으로 가던 해 3월 3일에 시작해서 2년, 퇴직하고도 2년 더 봉사하며 4년간 왕복 40km 되는 길을 봉사하러 다녔다. 그런데 예상에도 없이 갑자기 성당에서 중책을 맡게 되어 부득이 노성야학 봉사를 접어야 했다. 학생들은 나에게 노성야학에 다시 와서 꼭 자기들을 가르쳐달라고 신신당부하며 나를 보내주었다.

아직도 노성야학 학생들은 수시로 나의 안부를 묻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연락하고 있다. 어떤 학생은 자신의 첫 선생님이라고, 어떤 학생은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고, 어떤 학생은 보고 싶다며 연락한다.


수업하기 위해 교실에 들어가면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소박한 간식이 눈에 선하다. 간식에 담겨 있는 그들의 마음을 나는 잊지 못한다. 농사를 지었다고 책상 밑에 몰래 갖다 놓은 검은 봉지 안의 고구마 줄기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갖고 와서 밤 1시가 넘도록 다듬었던 기억도 아름답다.

고단한 노동으로 지쳐서 잠들 시간에 학교에 와서 단 한순간도 졸지 않고 수업을 듣는 그분들의 눈동자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누가 선생님인가? 난 감히 용기 내어 고백한다.

노성야학 학생들, 그분들이야말로 내게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 준 참된 스승이며 기쁨이었노라고.

2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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