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로니아, 너 마저!! ⚔️

�조지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by 자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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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배신’의 반복이다.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하고,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한 이순신은 선조의 시기 속에 백의종군이라는 치욕을 겪는다. 비잔틴 제국의 전성기를 열며 황제의 목숨까지 구했던 명장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이 지켜낸 군주에게 전 재산을 몰수 당하고 직위를 박탈 당했다. 멸망 직전의 프랑스를 구했던 잔다르크는 화형대의 불꽃으로 사라졌고, 아테네를 위해 세 차례나 중장보병으로 참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 의해 사형을 선고 받았다.


배신의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문장은 역시 ‘브루투스.. 너마저!’일 것이다.아들처럼 사랑하고 아꼈던 브루투스가 자신을 찌르려는 암살자 무리 속에 있음을 본 카이사르의 절규. 이 장황한 에피소들을 나열하는 이유는 단순히 지식을 뽑내기 위함이 아니다. (사실 맞을 수도 있다.) 나의 전부를 바쳐 사랑하고 지키려 했던 대상이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는 ‘배신의 굴레’가 인류 역사 내내 반복돼 왔음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조지 오웰이 목격한 ‘유토피아의 신기루’


<카탈로니아 찬가> 속의 조지 오웰 역시 이 비극적인 연대기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파시즘을 무너뜨리겠다는 일념으로 연고도 없는 타국 스페인에 발을 내디딘 오웰.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 계급이 주인이 된 혁명적인 분위기를 목도하고 감격했다. 계급 없는 사회라는 이상이 실현되는 듯한 그 짧은 찰나의 순간은, 그로 하여금 지루함과 추위, 형편없는 보급이라는 군인으로서의 비참한 현실을 견디게 했다. ‘그래, 이것도 전쟁이야. 유토피아를 건립하기 위한’이라는 효용감이 그를 지탱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세상을 올바르게 바꾸고 있다는 그 효용감은 순식간에 짓밟혔다. 가치 하나를 위해 몸을 던진 결과가 ‘배신자’라는 낙인이 되어 돌아왔을 때, 오웰이 느꼈을 환멸은 전선의 총상보다 깊었을 것이다.


방향만 같았던 ‘카풀’의 비극


씁쓸하지만,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오웰과 POUM은 이순신이나 잔 다르크처럼 역사적 거대한 흐름 속에서 소모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그저 목적지가 비슷한 이들과 ‘카풀’을 했을 뿐이다. 방향이 같고 자리가 넉넉할 때는 웃으며 동승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덩치가 커지거나, 중간에 목적지가 바뀌게 되면 누군가는 반드시 차 밖으로 밀려나야 한다. 안타깝게도 POUM은 운전대를 잡지 못했고, 차 주인의 변심을 견제할 힘도 없었다. 시스템이나 대응책 없이 오로지 ‘인간의 선의’와 혁명의 순수성’이라는 무른 땅 위에 집을 지었던 그들은, 아름다웠으나 현실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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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이 상수가 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결국 조지 오웰의 기록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누가 나쁜가’가 아니라 ‘무엇을 믿을 것인가’가 아닐까. 인류의 역사가 배신의 반복이라면, 우리는 타인의 선의에 내 삶을 온전히 의탁하는 어리석음을 멈춰야 한다.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목적지를 숨긴 채 누군가의 차에 올라탄다. 동료애나 연대라는 말로 서로를 다독이지만, 언제든 내가 차 밖으로 던져질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내가 탄 차의 운전대가 어디로 향하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설령 길가에 버려지더라도 다시 걸어갈 수 있는 나만의 근육을 기르는 것뿐이다.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 이 글을 쓴 오웰은 그런 ‘의심의 근육’을 가진 영리한 생존자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완벽하게 아군을 믿었기에 등 뒤에서 날아온 칼날에 누구보다 깊게 상처받고 황당해했던 ‘순수한 바보’에 가까웠다.


그가 남긴 이 철저한 기록은 바로 그 황당함이 빚어낸 몸부림이다. 내가 믿었던 정의가 어떻게 가짜 뉴스가 되고, 동료가 어떻게 첩자가 되는지, 그 믿기 힘든 현실을 목격하며 그는 결심했을 것이다. 나의 이 황당한 고통이 헛되지 않도록, 적어도 무엇이 진실이었는지는 남겨야겠다고. 우리가 오늘날 오웰처럼 허망하게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 냉철한 의심을 품을 수 있따면, 그것은 오웰이 우리 대신 그 지독한 배신을 온몸으로 맞으며 이 기록을 남겨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오웰의 무구했던 믿음이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의심할 수 있는 지혜’를 선물한 셈이다.


에효, 쓰다 보니 정말 피곤하다. 인간의 삶이란 게 결국 뒤통수 맞고, 황당해하고, 그러면서도 다시 기록하며 나아가는 과정의 반복이거늘… 시바. ㅎㅎ 걍 아무 생각 없이 자고 싶다. ㅎㅎ Like 시바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