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은 사람이 있다.
너무 많아서 탈이 되는 사람.
머릿속에서는 모든 게 완벽하게 정리되는데
몸이 따라가지 않는 사람.
완벽히 이해하고 나서 움직이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결국 시작하지 않을 핑계가 되어버린 사람.
그리고 반대편에 생각이 없는 사람이 있다.
묻지 않는 사람.
왜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이 발걸음이 누구의 가슴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그저 거대한 시스템이 설계한 궤도 위를 유능하게 흘러가는 사람.
이 둘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살고 있지 않다.
1961년 예루살렘.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한 남자가 방탄유리로 제작된 피고인석에 앉았다.
피고 아돌프 아이히만.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수용소로 실어 나르는
열차 이송 작전을 지휘했던 나치 장교였다.
세상이 상상한 아이히만은 광기 어린 살인자였다.
하지만 유리 방 너머에 선 그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평범한 모습이었다.
안경을 쓰고 대머리가 벗겨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다.
재판 내내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나는 거대한 시스템 속의 작은 톱니바퀴였다."
그에게 학살은 증오의 결과가 아니었다.
단 한 명의 유대인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열차 시간표를 짰고, 단 1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출세와 성과에 목매는 유능한 직장인이었을 뿐이다.
단지 그가 다니는 직장이 나치였고, 그의 업무 성과가 죽음이었을 뿐이다.
재판을 참관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느꼈다.
아이히만은 특별히 사악한 인간이 아니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단 한 번도 묻지 않은 사람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능력.
내 행동이 세계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가늠하는 능력.
아렌트는 이 성찰의 결여를 무사유라고 불렀다.
악은 특별한 악마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저 질문을 멈추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왜 이것을 하는지, 이것이 누구에게 무엇을 남기는지.
그 질문들을 조용히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언제든 거대한 비극의 공범이 된다.
우리는 매일 얼마나 많은 것을
어쩔 수 없다는 말 뒤에 숨긴 채 묻지 않고 지나치는가.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어로 시를 썼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저항운동에 뛰어들지 못했고, 총을 들지 못했고, 거리로 나서지 못했다.
1945년 광복을 반년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스물일곱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사후에야 세상에 나왔다.
제목조차 그가 직접 짓지 못했다.
그 육필 원고 속에서 우리는 그의 첫 문장을 만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문장은 결의가 아닌 고백이다.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지금 부끄럽다는 뜻이다.
행동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합리화하지 않았다. 그냥 그것을 안고 썼다.
쉽게 쓰여진 시에서는 이렇게 썼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써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아이히만은 모든 것을 하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윤동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역사는 아이히만을 악으로, 윤동주를 윤리로 기억한다.
행동의 크기가 그 사람을 결정하지 않는다.
성찰을 포기했는가, 포기하지 않았는가가 결정한다.
그런데 여기서 균열이 생긴다.
성찰만으로 충분한가.
윤동주의 시는 아름답지만 그의 시가 식민지를 끝내지는 못했다.
성찰은 윤리의 조건이지만 그 자체로 완결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행동은 어떻게 오는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브리다》는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스무 살 아일랜드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가 찾아간 숲속의 현자는 책을 주지 않았다.
대신 칠흑 같은 어둠 속 숲에 밤새도록 혼자 서 있으라고 했다.
춥고 무서웠다.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둠 속에서 밤을 버텨냈다.
아침이 왔을 때 브리다는 무언가를 알게 됐다.
그 앎은 설명되지 않았다. 그냥 몸에 있었다.
두려움을 통과하고, 틀리고, 그럼에도 계속 걸으면서 몸에 새겨지는 것.
브리다는 완벽한 이해 후에 움직이지 않았다.
행동하면서 이해했다. 앎은 그 뒤에 따라왔다.
이것은 윤동주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윤동주는 행동하지 못했지만 성찰했다.
브리다는 성찰하기 전에 행동했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을 다른 방향에서 가리키고 있다.
성찰이 먼저이고 행동이 나중인 것이 아니다.
행동이 먼저이고 성찰이 나중인 것도 아니다.
이 둘은 순서가 없다. 서로를 부른다.
성찰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다시 성찰을 깊게 만든다.
그 순환이 끊어질 때 아렌트의 무사유가 시작된다.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일이 아니다.
과거를 현재로 끌어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무게를 감당하는 일이다.
브리다는 숲에서 보낸 밤을 기억한다.
그 기억이 다음 선택을 바꾼다.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기억한다.
그 기억이 다음 시를 만든다.
아이히만은 기억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기를 거부한다.
자신이 한 일과 그 의미 사이의 연결을 스스로 잘라낸다.
기억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자신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선택할 수 없다.
그냥 흘러가게 된다. 관성이 이끄는 방향으로.
그것이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의 실제 모습이다.
악의 의도가 아니라 방향을 잃은 관성.
앞서 이야기한 책들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아렌트도, 윤동주도, 코엘료도 결국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
생각과 삶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생각이 너무 많아 발이 묶인 사람과 생각이 없어 관성에 몸을 맡긴 사람.
둘 다 그 순환이 끊어진 상태다.
당신이 오늘 한 일들 중에서 왜 하는지 스스로 물어본 적이 있는가.
완벽히 이해한 뒤에 움직이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진 않은가.
누군가의 말을, 어떤 관습을, 어떤 시스템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따르고 있진 않은가.
그리고 그것을 따르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
"원래 이런 거야. 다들 이렇게 해.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야."
생각한다는 것과 산다는 것은 별개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그 둘을 분리한 채 살아간다.
생각은 머릿속에 두고 몸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몸은 바쁘게 움직이는데 생각은 멈춰 있다.
당신의 생각과 당신의 삶은 지금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없다면 어쩌면 그게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