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다정한 사람은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

by BAAM

오염된 관심


요즘 웃으며 다가오는 이를 보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친다.

관심이 언제부터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걸까.


호의를 호의로 받지 못하는 사회라고 탄식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서로의 영역을 무례하게 침범해 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 불신의 공기에 물들었었다.

이 사람은 분명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라는 확신은

내 우주의 경계선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방어 기제였다.

우리는 왜 무해한 무관심보다 유해한 친절에 더 익숙해져 버렸을까.


왜 가만히 두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끊임없이 서로의 삶에 웃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침입하려 드는가.


상처가 쌓이면 사람은 두 방향으로 갈린다.

더 열심히 관계를 붙잡거나, 아니면 전부 내려놓거나.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어느 시점부터 세상 사람들 전부에게 무관심해졌고, 그게 편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 태도가 방패였다.

그런데 돌아보니, 내가 관계에서 저지른 실수의 대부분은

무관심이 아니라 과잉 관심이었다.


상대방은 그 정도를 원하지 않는데,

나 혼자 내 감정에 치우쳐 밀어붙였던 것들.

그게 상대에게는 부담이었고, 때로는 침범이었다.

진심이었기 때문에 나에겐 설득력 있게 느껴졌고,

그래서 더 오래 지속됐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내 세계관이라는

액자 속에 박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내가 느낀 관심의 본질이었다.


관심이 폭력이 되는 경로는 대개 이렇다.

상대를 걱정하는 척하지만 실은 상대가

내 기대를 벗어날까 봐 불안한 것이다.

상대의 성장을 바라는 척하지만 실은

상대가 내 세계 안에 머물러 주길 바라는 것이다.

감정의 진원지는 나인데,

그 에너지가 상대를 향해 뻗어나간다.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니 관심을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혼란스럽다.

이것이 사랑인지 통제인지, 배려인지 침범인지.

그 경계가 흐릿한 채로 우리는 서로의 삶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초대받지 않은 채로.




무관심의 철학


에리히 프롬은 미성숙한 사랑을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정의했다.

성숙한 사랑은 반대다.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전자에서 관심은 소유의 언어고, 후자에서 관심은 존재의 언어다.

우리는 대개 전자를 사랑이라 배웠다.

그 오염된 관심으로 서로를 오랫동안 질식시켜 왔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언어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인가.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무관심과 닮아 있다.

우리가 무관심을 냉담함과 혼동하는 지점이 있다.

냉담함에는 경멸이 전제되지만, 무관심은 다르다.

그것은 상대에게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허락하는 것이다.

당신을 다 안다고 자만하지 않는 것.

당신의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

그 허락이 무관심의 본질이다.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를 관계로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는 것.

상대의 흐름을 가로막지 않고,

내가 더 잘 안다는 오만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


사실 이것은 고도의 에너지 소모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때로 무언가를 저지르는 것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매 순간 당신을 확인해야 한다면 그것은 당신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다.

반대로 내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런 선언이 된다.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방식이 있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가장 단단한 신뢰는 조용하다.

확인하지 않고, 추궁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는다.

그 고요함 안에 존중이 있다.

나는 상처가 쌓인 뒤 관심을 껐다.

그때 나의 무관심은 철학이 아닌 방어였고, 지친 몸을 숨길 벽이었다.

하지만 소명이 생긴 지금, 나는 무관심의 이유를 다시 선택한다.

지침에서 비롯된 무관심은 다치지 않기 위해 세운 벽이지만,

신뢰에서 비롯된 무관심은 상대를 해방하는 문이다.

형태는 같다. 그러나 그 안의 온도는 전혀 다르다.



존재의 공전


별들은 중력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결코 핵끼리 충돌하지는 않는다.

그 거리가 유지될 때 비로소 각자의 빛이 살아남는다.


우리가 관계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더 가까워지는 법이 아니라,

정교하게 거리를 조율하는 법이다.

얼마나 다가갈 것인지,

그리고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그 감각이 거세된 호의는 결국 파괴적인 충돌로 끝난다.


만약 세상 모든 사람이 지금 내가

타인에게 쏟는 방식 그대로

서로를 들여다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아무도 자기 자신의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타인의 서사를 편집하느라

정작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비대칭의 세계.

그런 세상에서 관심은 배려가 아니라

주권을 침해하는 폭력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 닿는 순간 주체이기를 멈춘다.


바라보이는 대상이 되어 타인의 이야기 속에

끼워진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진정한 무관심은 그 강압적인 시선을 거두는 행위다.

당신을 내 서사 안에 배치하기를 포기하는 것.

당신이 당신 자신의 이야기 안에서

온전한 주체로 존재하도록 공간을 내어주는 것.

그것은 냉담함이 아니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형태의 존중이다.


나는 여전히 예민하다.

다만 이제는 내가 선택한 방향으로만 감도를 높인다.

나머지는 그저 흘려보낸다. 그것이 내가 터득한 무관심의 기술이다.

감각을 끄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방향을 조율하는 것.


오늘 나의 중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혹시 당신의 다정함도 누군가의 그늘을 빼앗고 있지는 않은가.


무관심이 존중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랑의 문법을 다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더 적게 묻고, 더 깊이 믿는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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