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솔로지옥을 보다가 꽁냥대는 장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장면이 넘어가고 문득 혼자 흐뭇하게 웃고 있는 내 자신이 좀 킹받았다.
화면 너머의 온기가 내 안으로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건 뇌가 하는 짓이다.
거울 뉴런은 타인의 행동을 관찰할 때 그것을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시뮬레이션한다.
누군가의 설렘을 보는 것만으로도 뇌는 유사한 회로를 작동시키고 도파민을 분비한다.
대리설렘이 그냥 감성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 뇌의 마법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붙는다. 바로 거리다.
화면 속 연예인의 성공이나 연애 프로그램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실제 나와의 거리가 충분히 멀다.
그 빛은 나를 위협하지 않기에, 나는 안전한 소파에 앉아 그 온기를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다.
적당한 거리의 빛은 나를 태우지 않고 그저 적절히 데울 뿐이다.
그런데 그 빛이 내 삶의 반경 안으로 들이닥칠 때,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TV 속 연예인이 아닌, 바로 옆자리 동료의 연애 소식을 들었을 때.
SNS 속 인플루언서가 아닌, 어릴 적 친구의 성공을 목격했을 때.
그 순간 당신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
몽글몽글했던 온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배가 살짝 아프거나
괜히 창을 닫고 싶어지는 서늘함이 찾아온다.
빛이 가까워질수록, 내가 그동안 외면해왔던 내 발밑의 그림자가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감정의 이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만 인정하기 싫을 뿐이다.
신경과학자들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질투를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은 전대상피질과 뇌섬엽이다.
이 영역들은 신체적 고통을 처리하는 곳과 정확하게 겹친다.
질투가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다.
가까워진 타인의 빛이 나의 결핍을 정확히 비추고 있기에
실제로 뇌 안에서 통증 회로가 비명을 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질투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타인에 의해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작동하는 방어 기제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뛰는 그 감각은 못난 감정이 아니라
수십만 년간 살아남은 자들이 물려준 생존 동력이다.
그리고 질투는 도파민 시스템과 연결된 갈망의 신호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타인에게 있을 때,
뇌는 그것을 박탈로 인식하고 경보를 울린다.
그 서글픈 경보가 바로 질투다.
멀리 있을 땐 기분 좋은 온기였던 것이 내 삶의 궤적 안으로 들어오면
통증으로 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경보는 아무 때나 울리지 않는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가진 사람을 볼 때는 경보가 울리지 않는다.
경보는 내가 원하는 것에만 반응한다.
그 경보는 사실, 내 무의식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떨리고 있는 나침반 바늘의 진동이다.
질투는 단순한 부정적 감정이 아니다.
내 이성보다 먼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짚어내는 정직한 감각이다.
나침반은 두 가지 경우에 제 기능을 잃는다.
주변에 너무 강력한 자석이 있어 바늘이 미친 듯이 날뛰거나,
내부의 액체가 차갑게 얼어붙어 바늘이 아예 굳어버리거나.
전자는 질투에 휩쓸려 방향을 잃는 것이고,
후자는 감각 자체가 꺼져버린 것이다.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성숙하다고 말한다.
질투를 초월한 사람, 여유가 넘치는 사람으로.
그런데 자문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진짜 초연함인가,
아니면 바늘이 얼어붙어 굳어버린 상태인가.
칼 융은 우리가 인정하기 싫은 감정을 억압할수록
그 감정은 내면에서 더 크게 자라난다고 보았다.
그림자는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몸집을 불리고 있을 뿐.
억압으로 인해 원하지 않게 된 것과
진짜 초연해서 원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바늘이 얼어붙은 것이고,
후자는 어쩌면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에
모든 것을 끌어들일 수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기에 오히려 아무것도 놓치지 않는 것.
이보다 성숙한 게 어디 있는가.
문제는 그것이 진짜 초연함인지,
오랜 시간 스스로를 억눌러온 결과인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침반 바늘이 떨린다는 것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신호다.
나에게도 여전히 갈망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아주 인간적인 증거.
비관이 짙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도 나보다 앞서나가는 사람들을 봤다.
나침반은 그들을 향해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내 마음의 온도는 아주 차가웠다.
그들이 가진 것이 그저 탐나서가 아니라
나는 왜 무리 속에 섞이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왔다.
경보는 계속 울렸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을 읽지 못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그 욕망을 내 것이라 인정하지 못했다.
저 빛은 나와는 너무 먼 곳에 있다고, 스스로 거리를 그어버렸다.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먼저 단정 지었기에 타인의 온기는 따뜻함이 아니라 박탈감으로만 읽혔다.
그러니 모든 타인의 성공이 나의 실패처럼 느껴졌다.
내 욕망을 부정하느라 타인의 성취를 축하할 공간조차 내어주지 못한 것이다.
나침반이 있어도 온도가 영하면 한 발짝도 뗄 수 없다.
방향을 알아도 몸이 굳어 있으면 걸을 수 없다.
지금은 다르다. 솔로지옥을 보며 흐뭇했던 그 감각이 뭔지 나는 안다.
그 꽁냥거림이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그어놓은 거리가 좁혀진 것이다.
경보가 사라진 게 아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이
이제는 닿을 수 있는 곳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이 차갑고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이 멀었던 게 아니었다.
스스로 온도를 낮추고 세상과의 거리를 스스로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의 온도란 곧 그 거리를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내 온도계가 제자리를 찾을 때, 타인의 온기는 나를 태우는 불길이 아니라
내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
자기 객관화는 단순히 자신의 장단점 목록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감정이 가리키는 곳을 정직하게 읽어내는 것이다.
질투가 일어난다면 내가 무엇을 그토록 갈망하는지 묻고,
흐뭇함이 느껴진다면 내가 어떤 온도를 원하는지 확인하면 된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
읽는 법을 몰랐을 뿐이다.
내 욕망을 부정하며 살았던 시절,
나의 나침반은 갈 곳을 잃은 채 제자리에서 떨고 있었다.
방향을 가리켜야 할 바늘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그 날카로운 끝으로 나 자신을 찌르고 있었다.
감정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존재한다.
타인의 삶이 내 안에서 일으키는 파동을 가만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침반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바늘이 가리키는 곳이 너무 멀어 보여서 고개를 돌리거나,
나를 찌르는 통증이 두려워 그 신호를 애써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의 나침반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그 곳까지의 거리를 얼마나 멀게 느끼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당신의 온도는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