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클래식

by BAAM

침묵이 내 방에 찾아오지 못하게


자취를 시작하면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이 있다.

혼자 밥을 먹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고,

그 시간이 생각보다 조용하다는 것.

그 조용함이 불편해서 우리는 서둘러 무언가를 튼다.

유튜브, 넷플릭스,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침묵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

화면 속 타인의 대화와 웃음소리에 기대어 밥을 삼킨다.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묘한 안도감.

우리는 그렇게 혼자인 상태를 필사적으로 관리한다.

이것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고요인가.

아니면 그 고요를 뚫고 들려올 진짜 나의 목소리인가.




고독은 오직 연출될 때만 허용된다


언제부터인가 혼자 있는 것이 결핍의 증거가 되었다.

혼자 밥을 먹으면 쓸쓸해 보이고,

홀로 카페에 앉아 있으면 친구가 없는 사람처럼 비치며,

혼자 산책하면 갈 곳 없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SNS는 누군가와 함께한 하이라이트로 가득 차고,

고독은 오직 근사하게 연출되었을 때만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된다.

이 교묘한 구조 안에서 혼자인 시간은 자꾸만 외로움이라는 낙인을 얻는다.

빨리 채워야 할 구멍이자, 서둘러 탈출해야 할 상태.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요한 방에 홀로

머물 줄 모르는 데서 비롯된다고.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

혼자 있기에 서툰 존재가 되었다.


폴 틸리히는 외로움과 고독을 이렇게 구분했다.

외로움은 혼자 있는 고통을,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을 뜻한다고.

객관적인 상태는 같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 명명하느냐에 따라

그 시간의 성질은 완전히 달라진다.



채울 수 없었던 것


음악 작업을 마치면 이상하게 늘 공허했다.

지독히도 외로웠다. 이걸 담아내고 싶었지만

깊이가 없었다. 무언가 만들면 만들수록

오히려 더 비어있는 기분.


그 기분이 싫어서 억지로 없는 약속을 만들었다.

딱히 보고 싶지 않아도 연락했고, 가고 싶지 않아도 나갔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그 공허함이 잠깐 사라지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충만함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더 큰 허기를 안고 돌아와 술에 취해 잠들었다.

사람으로 채운 게 아니라 잠시 덮어놓은 것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공허함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고독을 해결하려 했던 게 아니라 피하고 있었던 거다.

그 시절 나는 타인에게 기댈수록

더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 더 비어간다는 것을 몰랐다.

작업도, 만남도, 전부 표면이었다.



소음 속에서는 깊이가 생기지 않는다


깊이가 없었다.

깊이 없는 작업과 깊이 없는 만남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나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은 채로 무언가를 만들려 했고,

나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은 채로 누군가를 만나려 했다.

소음 속에서는 깊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 시작은 비관이었다.

타인에게 기대지 말자.

사람은 필요없다.


상처받은 자리에서 등을 돌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비관이 결국 온전한 나 자신을 마주하게 했다.


처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을 때 알았다.

나 외에 나를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것은 더 이상 비관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순간부터 단단해졌다.


소음이 걷히고 나서야 들리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지.

이런 생각들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을 때 나올 수 없는 대답들이다.

고독은 결핍이 아니다. 소음이 걷힌 자리에 비로소 자기 자신이 들어오는 시간이다.



음표들이 서로를 죽이지 않도록


악보에는 쉼표가 있다.

그 쉼표가 없으면 음악이 소음이 된다.

빼곡하게 채워진 음표들은 서로를 죽인다.

여백이 있어야 각각의 음이 살아난다.

쉼표는 음악의 결핍이 아니라 음악의 구성 요소다.

클래식이 수백 년을 견디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라는 클래식을 완성하기 위해

지금 내가 겪는 고독은

녹슬어가는 시간이 아니다.

광택을 내는 시간이다.


당신은 지금 혼자인 그 시간을,

무엇이라 부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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