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이라는 이름의 백지
거리를 걷다 보면 거대한 장례식 행렬을 보는 기분이 든다.
검정, 회색, 베이지. 다시 검정, 회색, 흰색.
약속이라도 한 듯 채도를 빼버린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스쳐 지나간다.
가끔 눈을 찌르는 색이 나타날 때가 있다.
그 선명한 색들은 무채색 수풀 속에서 홀로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용감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색을 고를 때 설렘보다 두려움을 먼저 느낀다.
예쁘지만 너무 튀는 옷은 나를 무리 밖으로 밀어내지는 않을까,
취향을 드러낸다는 것이 나의 촌스러움을 증명하는 빌미가 되지는 않을까.
결국 우리가 입는 무채색은 취향이 아니라
무리 안에 숨기 위해 스스로를 지워버린 방탄복일 수 있다.
지금의 우리는 왜 이토록 조용해졌을까.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거리는 지금의 정제된 미감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에너지로 가득했다.
그 시절 대한민국의 패션은 단순히 자신을 꾸미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그동안 억눌렸던 자아가 터져 나오며 완성된 세상을 향한 개인의 목소리였다.
X세대라 불리던 그들의 핵심은 오직 '나'였다.
권위주의 시대의 무거운 외투를 벗어던지자마자 해외여행 자유화와 대중문화의 해일이 덮쳤다.
역사상 처음으로 집단의 구호 대신 개인의 취향이 허락된 시대였다.
하지만 그 자유의 폭발은 너무나 과격했다.
오렌지족이라 불리는 이들이 뿜어내는 현란한 색채와 과시적 소비는
사회적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국가는 이를 '풍속 저해'로 규정하고 검열하기 시작했다.
외제차를 타거나 귀걸이를 한 청년들의 입장을 제한하고,
국가가 거리의 색깔을 직접 단속하는 기묘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 소란의 끝에 IMF가 왔다.
국가적 파산은 화려했던 색채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
생존이 지상 과제가 된 사회에서 개인의 개성은 곧 사치이자 위험이 됐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 뜨거운 색들은 경제적 몰락과 함께 급격히 식어버렸다.
그 색들이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패션이 조용히 역할을 바꿨다는 것이다.
나를 드러내는 도구에서, 적을 만들지 않는 도구로.
검정과 회색과 베이지는 어디서든 섞일 수 있고 실패할 확률이 없는 색이다.
튀지 않는다는 것이 안전하다는 뜻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선택한 이 빨강이 나를 무리 밖으로 밀어내지는 않을까,
이 파랑이 나의 무지함을 증명하는 빌미가 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SNS가 일상이 되면서 타인의 시선은 더 촘촘해졌다.
촌스럽다는 한마디가 피드에 박히는 세상에서 무난함은 세련됨의 다른 이름이 됐다.
알고리즘이 전 세계의 취향을 실시간으로 펼쳐놓는 동안,
내가 직접 틀리고 찾아가는 과정은 점점 번거로운 일이 되어간다.
결국 우리가 입는 무채색은 취향이 아니라,
눈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배경 속으로 지워버린 방탄복일 수 있다.
옷은 이제 개인의 언어가 아니라,
내가 안전한 집단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는 유니폼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반대의 움직임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퍼스널컬러를 찾고, 빈티지 셀렉샵을 뒤지고, 나만의 향수를 고르는 사람들.
자기 색을 찾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더 정교해지고 있다.
억압과 탐색이 같은 시대에 공존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스케치북을 들고 태어났다.
살아가면서 알록달록한 크레파스들을 손에 넣게 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대로 색을 칠하면
이건 틀렸다고 혼낸다는 강박이 우리 손에서 크레파스를 뺏어갔다.
결국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흰 도화지를 내밀며
'이게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리즘'이라고 우기는 것은 아닌가.
텅 빈 도화지는 세련된 미감이 아니라,
사실은 거절당하기 싫어 아무것도 적지 못한 비겁한 백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다른 종류의 무채색이 있다.
스티브 잡스는 평생 검정 터틀넥을 입었다.
마크 저커버그는 매일 같은 회색 티셔츠를 고른다.
옷 고르는 데 쓸 에너지가 아깝다고.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쓰기로 했다고.
이건 욕망의 포기가 아니다. 욕망의 집중이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어디 있는지 알기 때문에 나머지를 걷어낸 것이다.
무채색에는 두 종류가 있다.
두려움에서 나온 무채색.
튀기 싫어서, 실패하기 싫어서,
시선이 두려워서. 이건 색을 잃어버린 것이다.
선택에서 나온 무채색.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쓰기로 한 것.
이건 오히려 자기 욕망이 어디 있는지 가장 선명하게 아는 사람이다.
형태는 같지만 온도는 전혀 다르다.
색이 사라진 곳이 옷만이 아니라는 걸 안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집 안에서는 다르다.
직접 찾아 고른 오브제, 오래 맡아보고 결정한 향,
세 군데를 바꿔보고 나서 겨우 정착한 조명.
공간에는 아직 취향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많다.
근데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그것이 진짜 취향인가.
스포티파이는 매주 믹스를 만들어준다.
핀터레스트는 내가 좋아할 인테리어를 이미 알고 있다.
알고리즘은 내가 선택하기 전에 먼저 골라준다.
취향은 선택의 반복으로 만들어진다.
골라보고, 틀리고, 다시 골라보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알게 된다.
알고리즘은 최적화다. 내가 반응할 확률이 높은 것을 먼저 꺼내놓는다.
그런데 알고리즘이 골라줬다고 해서 그게 내 취향이 아닌 건 아니다.
떠서 사봤는데 진짜 좋을 수도 있고, 알고리즘이 없었다면 평생 몰랐을 것과 만날 수도 있다.
문제는 알고리즘이 아니라 태도다.
골라준 것 앞에서 "이게 진짜 내가 원하는 건가"를 한 번이라도 묻는 것.
그 찰나의 차이가 최적화와 취향을 가른다.
무채색을 입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있다.
욕망이 다른 곳에 있어서 색을 지운 사람.
욕망을 잃어버려서 색이 사라진 사람.
욕망은 알지만 드러내기 두려운 사람.
집단의 유니폼을 입고 소속을 증명하는 사람.
누가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는다. 본인만 안다.
취향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계속 갱신되는 것이다.
어떤 색 앞에서 손이 먼저 가는지. 어떤 향을 맡았을 때 멈추게 되는지.
그 반응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흰 도화지를 내밀 거라면, 적어도 바니시 칠이라도 해두길.
당신의 스케치북에는 지금 어떤 색이 칠해져 있는가.
아직 크레파스를 쥐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