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도 뼈대가 있다면

by BAAM

사소하게 지나쳤던 순간들


나는 늘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좋은 책도 많이 읽고 긍정적인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남들 눈엔 여전히 기대치에 못 미치는 사람이었고,

생각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진짜 스승들을 만났다.


그중 하나가 군대였다.

싸움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고 하지만,

사실 사소한 게 아니었다.

이미 오래 쌓인 것이 터진 것이다.

나도 그랬고, 그도 그랬다.

나의 서툰 분노는 주먹으로 나갔고,

그의 차가운 응징은 잉크로 돌아왔다.


나는 격리됐다.



상처받은 인간이 가장 먼저 하는 것


상처받으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피해자 서사로 향한다.

그 서사는 따뜻하고, 나를 보호해주고, 아무도 반박하기 어렵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라는 확신은

무너지는 자아를 붙잡아주는 가장 손쉬운 닻이다.

그 닻을 내리는 순간 우리는 안도한다.

내가 피해자라는 서사 안에서 숨을 쉰다.

분노는 방향이 생기고, 슬픔은 이유가 생기고,

나는 억울한 사람이 된다.


그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그 서사가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유일한 것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거기서 멈출 때다.

피해자 서사는 나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나를 가두기도 한다.

나도 그랬다. 억울했고, 원망스러웠고, 분노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

하지만 그 본능 이면에는 더 차갑고 무거운 것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외면할 수 없는 선명한 자기혐오였다.





자기 혐오는 왜 더 고통스러운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내가 결국 그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원망보다 훨씬 더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밖을 탓하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내가 먼저였다는 사실 앞에서 그 편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원망하다가 돌아서면 다시 내가 밉고,

내가 밉다가 돌아서면 또 원망스럽고.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

내 안의 그림자와 처음으로 정면으로 마주한 것이었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기어코 그를 생각했다.

인간이란 참 묘한 존재다. 돌이킬 수 없지만

저질러놓고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존재.

그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바란 건 아닌데, 라는 망설임이

그의 펜 끝에도 머물렀을 것이라고.


그가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지 않길 바랐다.

다 떨쳐버리고 갔으면 했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간부에게 전해달라고 했더니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선처 안 해준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선처받으려고 쓴 게 아니었으니까.



원망스러우면서도 미안했다.

그 복잡한 감정 안에서 나는 스스로를 집요하게 난도질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알았다. 난도질이 아니라 조각이었다는 것을.

나라는 인간을 다시 깎아내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질문이 바뀌었다.

왜 이랬을까에서, 앞으로 어떻게 잘할 거냐로.

거창한 깨달음은 아니었다.

그냥 질문의 방향이 한 뼘 바뀐 것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인간의 두 얼굴


조그만 창문 너머로 나를 들여다보고 가는 간부들이 있었다.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혹시라도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들의 인사고과에 오점을 남기진 않는지 확인하고 가는 그 눈빛들.

그것이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입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처리해야 할 서류이자, 관리해야 할 사고 사례였다.

나를 철저히 대상화하는 그 무심한 시선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한 흉터로 남아 있다.


반면, 6살 많은 동기 형은 달랐다.

동네 친구의 친척이라는 먼 인연 하나로,

진심 어린 걱정을 안고 계속 보러 와주었다.

같은 복도, 같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인간의 전혀 다른 두 면모가 교차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안다.

나를 사건으로 보던 그 간부들도

결국 한낱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기 앞길을 걱정하며 하루를 살아내는

평범하고 나약한 개인들일 뿐이었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 삶이 너무 무거워

타인에게 무관심했을 뿐이다.


그래서 더 역겨웠는지도 모른다.

특별한 악의도 없이

사람을 한낱 사건으로 전락시키는

그 평범한 무관심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찾아와

창문 너머의 나를 사람으로 봐준 이들이 있었다.

그 한 줌의 온기가 고마웠다.




슬픔은 무게가 아니라 압력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뒤 말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지만,

딱 하나,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는 빼앗을 수 없다고.


슬픔을 무게로 받아들이면 결국 짓눌려 무너진다.

하지만 그것을 압력으로 받아들이면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진다.

다이아몬드가 엄청난 압력 속에서 탄생하듯,

인간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압력 속에서 단단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단단함은 경직이 아니다.

상처가 씻은 듯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흉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흉터를 안고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어느 순간, 그 흉터는 내 피부의 일부가 되어 있다.




극복은 선언이 아니다


군대에 있으면 다들 집에 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나는 격리된 곳에서 차라리 원래 부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굳이 안 해도 될 경험을 하는 게 참 값지긴 하구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때, 스스로 참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극복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극복했다고 선언한 적도 없고,

다 괜찮아졌다고 느낀 적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 그냥 살아지고 있었다.


거창한 깨달음의 순간이 아니라,

스스로가 "참 웃긴다"는 생각이 드는 그 찰나.

내 감정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그 순간.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탈중심화라고 부른다.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관찰하는 위치로 이동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실제 메커니즘이다.




무너진 자리에 뼈가 붙는다


일본에는 '킨츠기'라는 도자기 수리 기술이 있다.

깨진 틈을 감추는 대신 오히려 그 균열을

금으로 메워 도드라지게 만드는 작업이다.

상처를 부끄러워하며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 깨짐의 역사를 당당히 드러내고 빛나게 하는 것.

그것이 킨츠기의 미학이다.


슬픔에도 뼈대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그 금으로 메워진 자리일 것이다.

흉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흉터가 나를 지탱하는 가장 견고한 지지대가 되는 셈이다.

본인이 모를 뿐, 우리 안에는 이미 다시 붙어 단단해진 뼈들이 있다.


만약 당신이 지금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어딘가에서 뼈가 붙고 있다는 증거다.

고통은 붕괴의 신호가 아니라, 결합의 진통이다.


고통이 잦아들고 뼈가 다 붙고 나면,

그 자리는 흉측한 상처가 아닌

눈부신 금빛 선이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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