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조용한 날이 없다

by BAAM

이 아이는 도대체


주변에서 늘 듣던 말이 있었다.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쉽게 생각해."

"너무 깊게 생각하지마."

그 말이 나오면 대화가 거기서 멈췄다.

그건 상대의 생각이 거기까지라는 마침표였고,

더 이상 내 심연으로 들어오고 싶지 않다는 거절의 신호였다.


내 방식이 그랬다.

나는 멈추는 법을 몰랐고,

상대는 멈추고 싶어 했다.

그 신호를 문장 그대로가 아닌,

거절로 이해하는 데 참 오래도 걸렸다.


돌이켜보니 내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는 6년 내내 2지선다 같았다.

주의가 산만함, 지도가 필요함. 혹은 명랑하고 쾌활함.

나를 좋아하는 선생님과 싫어하는 선생님이 극명하게 갈렸던

그 두 줄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도대체 누굴까' 하는 존재론적 고민을,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 먹으며 생각했다.

이제와서 보니 덩치가 작아서 주의라도 산만했어야 했나 보다.

어쩌면 내 인생에는 타인의 훈육이 아니라,

나만의 지도가 정말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소음으로 소음을 덮을 수 없다


생각이 많으면 그 생각들이 서로 엉켜서 아무것도 안 되는 상태가 온다.

머릿속이 늘 시끄럽다. 한때는 그 소음을 더 큰 소음으로 덮으려 했다.

시끄러운 곳에 가면 잠깐은 잊혔지만, 조용해지면 소음은 다시 거기 있었다.

소음으로 소음을 덮는 건 해결이 아니었다.


반대 방향을 찾다가 명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명상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은 더 시끄러워졌다.

그러다 방법을 찾았다. 30초만 시계 초침을 바라보는 것.

아무 생각 없이. 그게 생각보다 어렵다.

10초도 안 돼서 뭔가 떠오른다. 그래도 계속 바라본다.


불면증이 심하던 때는 호흡을 했다.

들이마시고, 참았다가, 길게 내뱉는 것.

몸이 먼저 반응한다. 생각보다 몸이 빠르다.


그러다 문득 연결됐다. 고3 때 연기를 배우면서 익혔던 것.

지금 내가 울고 있으면서, 동시에 내가 울고 있다는 걸 바라보는 것.

그때는 무대 위의 기술인 줄만 알았다. 아니, 알면서도 몰랐다.

이건 무대 밖에서도 평생 써먹는다는 걸 느꼈지만

정작 일상에서 꺼내 쓸 줄은 몰랐다.

연기를 잘하려면 인생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그때 처음으로 몸에 닿았지만

그 깊이를 쌓는 방법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극복한 게 아니다. 공존하는 법을 찾은 거다.



이름표를 붙인다는 것


어릴 때는 별로 관심 없었던 애니메이션을 어른이 돼서 더 많이 본다.

인사이드 아웃도 그랬다. 보고 나서 한참 생각했다.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각자의 얼굴과 이름이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다.

감정에 이름이 있다는 게 당연한 것 같지만,

정작 내 감정이 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알았다. 내가 불안하다는 걸.

다만 멀리서 바라보지 못했던 거다.

이름표를 붙인다는 건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아니다.

그것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름이 붙는 순간 그 감정이 나를 끌고 가는 힘이 약해진다.

그게 평정심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름표를 붙이는 건 간단해 보인다.

귀여운 캐릭터들을 떠올리면 될 것 같으니까.


그런데 나는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굳이

그놈을 자리에 앉혀놓고 심층 면담을 한다.

만약 이별을 했다면 나는 묻는다.

너는 지금 그 사람을 잃어서 슬픈가,

일상이 망가져서 그런가 불안한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정이 많아서 그런건가


수십만 가지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남들이 보면 “뭘 그렇게까지 피곤하게 살아?” 싶겠지만,

나에게는 이게 평정심을 찾기 위한 유일한 생존법이다.


물론 그 정체를 파고든다고 해서 즉시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감정의 뿌리 끝까지 내려가느라

한동안은 그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이름표를 붙여놓고도 그 이름표가 주는 무게에 짓눌려 한참을 깔려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독하게 마주하고 나서야,

아주 천천히 나를 끌고 가던 감정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훨씬 느리고 피곤한 방식이지만, 나는 그렇게 건너왔다.



생각은 나를 거절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 지독한 생각들에서 벗어났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여전히 생각이 많다. 여전히 깊고, 때로는 지나치게 집요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들이 나를 집어삼키게 두지 않는다.

생각이 밀려오면 나는 조용히 시계 초침을 바라보고,

내 안의 감정들에게 이름을 붙여 면담을 신청한다.

예전의 나에게 생각이 거절당할 이유였다면,

지금의 나에게 생각은 나를 이해하는 도구다.


6년 내내 나를 괴롭혔던 생활기록부의 그 두 줄 사이에서,

나는 드디어 나만의 지도를 그렸다.


타인의 훈육으로 다듬어지지 않았던 작은 덩치의 아이는,

이제 무대 위와 아래를 동시에 볼 줄 아는 관찰자가 되었다.


혹시 당신도 누군가에게

"생각 좀 그만해"라는 말을 듣고

마침표 앞에 서있다면

당신도 당신만의 심층 면담을 시작해 봐도 좋다.

조금 느리고 피곤하겠지만.


극복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머릿속의 소음과 공존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오늘도 내 머릿속은 여전히 시끄럽지만,

나는 더 이상 내 심연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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