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스승에게는 유통기한이 있다

by BAAM

상처

나는 학교 가는 게 즐겁지 않았다.

선생님이 싫었던 건 아니다. 몇몇의 선생님들은 미웠지만,

그보다 더 미웠던 건 시스템이었다.

나의 학창 시절은 체벌이 당연했던 시기였다.

체벌이란 명분으로 폭력을 휘두르던 선생들도 많았다.


그들은 지식이 아니라 각자의 흉기를 들고 복도를 걸어왔다.

당구 큐대, 부채, 빗자루, 마대걸레, 벨트 그리고 맨손.

특정 수업시간이 될 때면 수업 시작 종소리는 마치

형을 집행하는 징소리로 느껴지기도 했다.


분필 가루 날리는 교실은 전장이 아니었다.

전장은 양쪽이 무기를 들었을 때나 쓰는 말이지,

그곳은 그저 일방적인 사역이 벌어지는 축사였다.

고작 숙제를 안 했다고 받는다기엔 감당하기 힘든 형벌이었다.

그들에게 교탁은 지휘대였고, 우리들의 책상은 거대한 무덤이었다.


교무실을 지나다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때려야 멍이 들지 않는지, 더 고통스러운지

아주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무언가 속에서 뒤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도축을 하고 퇴근 후에 삼겹살을 구워 먹는 모습이랄까.


그것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스승의 얼굴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부품을 두들겨 맞출지 고민하는 노련한 수리공의 모습

그들에게 우리는 가르쳐야 할 인격체가 아니라,

정해진 규격을 벗어나면 안 되는 고집 센 자재들에 불과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정답을 외우라고 윽박질렀지만,

정작 그 폭력의 끝에 무엇이 남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아니, 관심조차 없었다.

매질은 그들에게 가장 빠르고 손쉬운 교실 관리 매뉴얼이었을 뿐이고,

그 매뉴얼은 우리의 입을 막아 질문할 권리를 압수했다.



나는 장난기가 많은 학생이었고, 어느 날 나름 편한 선생님한테 질문을 했었다.


"쌤 근데 왜 그렇게 애들을 두들겨 패시는 거예요?"

(속 뜻은 당시엔 당신도 인간적이고 따뜻한 면이 있잖아 그러니 때리지 마)


이건 반항이 아니었다.

이게 최선의 방법인지 근본적인 나의 질문이었다.



어느 대답보다 짧고 강렬한 왼쪽 뺨의 타격이었다.


그 타격은 단순히 통증이 아니었다.

그것은 질문하지 말라는 시스템의 가장 확실한 답변이었다.

고작 "왜"라는 한마디를 내뱉은 대가가 얼얼한 뺨의 통증과 함께

곤두박질치는 나의 자존심을 확인한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곳에서의 "왜"는 호기심이 아니라 도발이었다.


매질 앞에 정답은 있어도 이유는 없었다.

선생이 휘두른 손바닥은 내 질문을 뭉개버렸고,

주변 선생들은 태연하게 본인들의 업무를 처리했다.


그렇게 그들은 폭력이라는 가장 빠른 길로 우리를 밀어 넣으며,

아무도 왜 해야 하는지 스스로 해답조차 찾지 않게 했다.


나는 늘 "왜?"라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은 채 가장 길게 느껴지던 학창 시절 12년을 모두 보냈다.




권위를 죽여라


티베트 불교에는 이런 말이 있다.

"구루를 만나면 그를 죽여라."

선불교의 임제 스님도 말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앞에서 저렇게 이야기하고 죽이라고 말하니 복수극 같겠지만,

죽여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권위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원래 그런 거니까."

생각을 멈추게 하는 권위. 원래는 없다. 그냥도 없는 것이다.

임제는 말한다.

"나를 옭아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숴버리라."

부처라는 이름에 속박되면 절대자유를 누릴 수 없다.

선생님이라는 권위에 의존하면 스스로 생각할 수 없다.

왼쪽 뺨을 맞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죽여야 할 것은

"어른은 강하다." , "선생님은 항상 옳다."는 그 환상이었다.


스승도 모를 수 있다


1818년, 조제프 자코토라는 프랑스 교수가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상태로 네덜란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는 네덜란드 학생들을 보며 생애 가장 거대한 가르침을 얻었다.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몰랐지만,

그는 대역본 한 권을 던져주며 알아서 읽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스스로 배웠다.


자코토는 깨달았다.


"가르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나아가서 "교사의 시시콜콜한 설명은 도리어 학생의 인지능력을 갉아먹는다."

자크 랑시에르는 이 일화를 바탕으로 《무지한 스승》을 썼다.

이 일화의 본질은 학생들이 스스로 배웠다는 성공 신화가 아니다.

스승이라는 위치에 있던 그가, 제자들의 지능이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그 경이로운 광경을 보고 거꾸로 배웠다는 사실에 있다.

스승과 제자라는 건 고정된 계급이 아니라,

언제든 뒤집히고 무너질 수 있는 유동적인 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어른이 아이에게, 유식자가 무식자에게 배울 수 있다는 식의 도덕적인 훈계가 아니다.

특정 상황에서 지능과 지능이 부딪힐 때 일어나는

그 폭발적인 통찰을 목격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여기서 비극이 발생한다. 자코토는 자신의 '모름'을 인정함으로써 학생을 해방했지만,

나의 선생님들은 자신의 '모름'을 권위 뒤로 숨김으로써 우리를 구속했다.


나는 깨달았다. 선생님들도 사실 몰랐던 거다.

왜 이걸 가르치는지. 심지어 현타도 느꼈을 것이다.

왜 학생들이 이걸 배워야 하는지. 이게 학생들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

그들은 본질에 대해 무지했기에, 그 무지를 들키지 않으려

더 강하게 매질을 하고 시스템의 부품 노릇에 충실했던 것이다.


니체: 떠남은 사랑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나는 진실로 그대들에게 권하건대 내게서 떠나라."
"나를 버리고 자신을 찾도록 하라."

이것은 거절이 아니라 가장 지독한 형태의 사랑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알고 있었다.

제자가 스승의 월계관에 취해있는 한,

그 제자는 영원히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언제까지 제자로만 머물러 있는 것은, 스승에 대한 보답이 아니다."

라는 말은, 스승의 복제품이 되지 말고

스승을 딛고 일어서는 거인이 되라는 명령이다.


왜 떠나야 하는가?


결국 중요한 건 내면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스승의 목소리가 너무 크면,

정작 내 안에서 속삭이는 진짜 진리는 들리지 않는다.

스승의 논리가 너무 완벽하면,

내 안의 불완전하지만 날카로운 직관은 죽어버린다.

칼 융이 프로이트라는 거대한 성벽을 허물고 나왔던 이유도,

자코토가 학생들에게 책만 던져주고 입을 닫았던 이유도 같다.

그들은 타인의 목소리를 지웠을 때 비로소

들려오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주파수를 믿었던 것이다.

떠난다는 것은 배신이 아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내 안의 용광로에 집어넣고 녹여서,

나만의 황금을 추출해 내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스승의 형체는 사라지겠지만,

그 가르침의 본질은 당신의 핏줄 속에 녹아 흐르게 된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당신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스승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당신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확신인가?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선 먼저 정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정적은,

당신의 손을 잡아주던 스승을 죽이고

홀로 광야에 섰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



권위를 죽이되, 배움은 취하다


권위를 죽이고 스승을 떠난다는 것이,

그들이 전달한 모든 데이터를 폐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준 재료를 내 방식대로 요리할 주권을 되찾는 일이다.

나는 시스템이 싫었고, 시스템 안의 권위가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시스템 안에서도 배움은 일어난다.

임제는 부처를 죽이라 했지만,

그것은 부처의 지혜까지 버리라는 무조건적 거부가 아니었다.

부처에게서 배울 것은 배우되,

부처라는 '이름'에 압도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학문적인 지식 외에도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그것을 '선생님이 말했으니까 정답'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지식은 도구로서 가져오되,

그 지식을 휘두르는 그들의 권위는 내면에서 끊임없이 거부했다.

나는 교실이라는 감옥 안에서도 그들이 던져준 부스러기를 모아

나만의 무기를 숫돌에 갈고 있었던 셈이다.

내가 직접 확인하고, 직접 생각해서 얻은 것만이 진짜 내 것이 되었다.


탈을 쓰지 않는 진짜 스승들


스승이란 단순히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비로소 성장시킬 수 있어야 스승이다.

진짜 스승은 친절하게 "나는 너의 스승이다"라고 탈을 쓰고 오지 않는다.

학교 선생님들은 선생이라는 직함을 달고 왔다.

하지만 그들 중 진짜 스승은 몇 명이나 됐을까?

반면, 내 인생의 진짜 스승들은 선생님이 아니었다.

나는 늘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좋은 책도 많이 읽고 긍정적인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남들 눈엔 여전히 기대치에 못 미치는 사람이었고,

생각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진짜 스승들을 만났다.

그들은 실제 선생님들보다 더 무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때로는 '실패'의 모습으로,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고독'이나 시린 '배신'의 얼굴로 찾아왔다.

그들은 "내가 너를 가르치겠다"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나를 처절하게 깨부수며 성장시켰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스승을 만났다.

직함도, 탈도 없었지만 그들이야말로 내 인생의 진짜 스승이었다.

그리고 늘 새로운 스승을 만난다.

그들은 "나는 스승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를 성장시킨다.

그게 진짜 스승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어른의 스탠스


나는 그런 스승들을 겪으며 결심했다.

내가 아직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이에게

가장 가까운 어른이 된다면,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

첫째, 강압적인 "나를 따르라"는 폭력이다.

그것은 아이를 타인의 설명 없이는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의존적인 존재로 박제한다.

둘째, 무책임한 "남들처럼 하라"는 최악이다.

우리를 고유한 생명이 아닌,

거대한 시스템의 소모품으로 끼워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셋째, 막연한 "너는 뭐든 할 수 있다"는 방치다.

지도 한 장 없이 망망대해에 던져진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방관이 아닌, 세상의 명암을 짚어주는 안내다.


나는 인간을 우주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직 스스로를 지탱할 힘이 없는 존재에게는

잠시 나의 중력을 빌려주어 안전한 궤도를 만들어주는 '안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소유가 아니다.

그가 스스로의 질량을 키워 자신만의 중력을 갖게 될 때,

기꺼이 '나의 궤도'를 벗어나 '너의 우주'를 펼치도록 돕는 자립의 과정일 뿐이다.

진정한 화합은 서로를 구속하는 고립이 아니라,

각자의 궤도를 존중하며 함께 공전하는 것이다.

중력이 없으면 궤도도 없듯,

적절한 보호 속에서 자라난 존재만이 비로소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단단한 자립을 이뤄낸다.

뺨을 때려 질문을 뭉개버리는 선생은 궤도를 파괴하는 폭력일 뿐이다.

나는 상대가 자신만의 주파수로 인생을 항해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질문이 스스로의 확신이 될 때까지

기다려줄 줄 아는 어른의 인내심이 아이의 인생을 바꾼다고 믿는다.


유통기한: 언제 스승을 떠나야 하는가


모든 스승에게는 유통기한이 있다.

나의 학창 시절, 그들의 유통기한은 교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이미 지나 있었다.

그들이 건넨 것은 생생한 삶의 지혜가 아니라, 곰팡이 핀 권위와 낡은 정답뿐이었으니까.


니체는 말했다.

"그대들이 나를 부인할 때, 비로소 나는 그대들 곁으로 돌아오리라."

이 역설이야말로 스승의 존재 이유를 관통한다.

제자가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고 제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스승의 임무는 비로소 완성된다.

따라서 스승을 떠나는 것은 배신이 아니라 완전한 성장이다.

진짜 스승은 제자가 자신만의 중력을 얻어

궤도 밖으로 나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기꺼이 미소 짓는다.

하지만 가짜 스승은 제자의 독립 앞에 불같이 화를 낸다.

"배은망덕한 놈."

그들에게 제자는 키워내야 할 생명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를 유지해 주고 빈약한 자존감을 채워줄 영원한 관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26년의 가짜 중력들


이런 '가짜 중력'의 전장은 오늘날 학교 담장 밖에서 더 거대하게 펼쳐진다.

유튜브의 구루들, 자기 계발 멘토들, SNS의 인플루언서들은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며 '충성스러운 고객'을 수집한다.

그들에게 제자의 자립은 곧 매출의 하락을 의미하기에,

끊임없이 새로운 결핍을 주입하며 당신을 곁에 묶어두려 한다.

그들에게 교육은 해방이 아니라 영속적인 비즈니스일 뿐이다.


진짜 스승의 조건


그렇다면 진짜 스승은 어떤 사람인가?


1.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다

"나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야."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처럼,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어 제자가 그 벽을 넘게 한다.


2. 의존이 아닌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

"너는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제자를 자신의 중력권에 묶어두지 않고,

스스로 궤도를 그릴 수 있게 해방시킨다.


3. 자신의 유통기한을 명확히 안다

"이제 네 길을 가라." 제자가 자신의 뒷모습을 부정하는 순간

스승으로서의 가장 영광스러운 은퇴로 여긴다.


4. 권력이 아닌 스탠스로 증명한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 대신, "스스로 관측하라"는

태도로 지식의 주권을 제자에게 돌려준다.


5. 우상의 탈을 쓰지 않는다

스스로를 신비화하거나 우상화하지 않는다.

그저 타인이 스스로의 우주를 발견하도록 돕는 투명한 통로일 뿐이다.


전족을 벗어던져라


인간은 본래 무한한 잠재력을 품고 태어난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 거대한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우리의 정신에 전족(纏足)을 채운다.

규격화된 틀 안에 아이들을 가두고,

자라나려는 의지를 억지로 꺾어 정해진 사이즈의 신발에 맞춘다.

그렇게 뼈가 뒤틀리고 영혼이 짓눌린 채 자라난 이들은

더 이상 스스로 걷는 법을 알지 못한다.

틀 밖으로 나가는 것을 공포로 여기며,

평생 누군가가 쥐여준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살아간다.

우리에겐 이미 스스로를 증명할 본능적인 야성이 있다.

더 이상 타인이 그어놓은 선 안에서 안도하지 마라.

당신을 무능하게 만들었던 그 낡은 신발을 벗어던져라.


한낱 사람들, 그리고 나


세상에 나가보니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그저 월급 받는 공무원이었고,

그들도 한낱 사람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학창 시절 선생님들 중엔 친구의 아버지, 아는 형의 아버지도 있었다.

그들도 불안을 안고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완벽하지 않았고, 모든 답을 가지지 않았으며,

때로는 틀렸다. 때로는 나를 억압했고,

때로는 납득시키지 못하고 숨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서도 배웠다.

아니, 배울 점을 스스로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들을 넘어서는 법을 배웠다.

임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했고,
나는 선생을 만나 그 권위의 허상을 죽였다.

니체는 자신을 버리고 스스로를 찾으라 했고,
나는 시스템을 버리고 자립을 택했다.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이 진짜라 했고,
나는 "내가 스승이다"라고 말하지 않는 이들에게서 진짜를 보았다.

결국 이 모든 목소리는 하나로 수렴된다.

타인의 등을 바라보며 걷는 일을 멈추고,

오직 자신의 내면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을 내딛으라는 것.

모든 스승에게는 유통기한이 있다.

진짜 성장은 스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그들이 가르쳐준 적 없는 자신만의 광야를 발견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들은 한낱 사람이었기에 완벽한 정답을 줄 수 없었고,


나 또한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타인의 정답에 나를 끼워 맞추는 대신

기꺼이 나만의 오답을 써 내려가며 나아간다.

그들이 가르쳐준 세상을 넘어,

이제는 내가 믿는 세상을 직접 창조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