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완성하는 유일한 방법

by BAAM

타인의 하이라이트와 나의 비하인드 씬


나는 늘 불안하고 조급함을 갖고 살았다.

누군가 큰 성공을 거두었을 때 나만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SNS를 열면 누군가는 오늘도 성장하고 있었고, 나는 늘 제자리였다.

사실 나는 늘 내가 잘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품고 살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확신만큼이나 지독한 완벽주의가 나를 붙잡았다.

늘 아직은 준비가 덜 됐다는 생각에 발을 떼지 못했다.

남들처럼 뜨겁게 살고 싶어 몸부림치면서도,

동시에 내 제자리를 한탄하며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열정적인 동시에 무기력했던, 그 모순된 시간 속에서

나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조급했다.


비교는 의도하지 않아도 찾아왔다.

늘 스스로 압박하는 존재는 나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지름길만을 찾아 방황했다.

그 조급함이 어디서 오는 건지 오래 들여다봤다.

알고리즘은 가장 빠르게 성공한 사람을 가장 먼저 보여준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자신의 속도를 가늠한다.

타인의 하이라이트를 보며 자신의 전체와 비교한다.

실패는 올라오지 않는다. 방황은 보이지 않는다. 돌아간 길은 삭제된다.

비교가 디폴트가 된 세계에서 조급함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 설계는 나에게 타인의 하이라이트와 나의 비하인드 씬을 맞바꾸게 강요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실패를 삭제하고 오직 속도만을 숭배하게 만드는 이 거대한 설계 안에서,

내가 느낀 조급함은 나의 무능이 아니라 그 구조가 의도한 정상적인 오작동이었다.

그 설계의 정체를 이해하고 나서야 나는 그 조급함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실패의 정의


세상은 실패를 너무 무책임하게 정의한다.

늦는 것, 돌아가는 것, 가던 길을 바꾸는 것.

한 번 시작했다가 그만두는 것과 이것저것 건드려보는 것.

그리고 아직 아무런 결과물이 없는 상태.

이 모든 것이 세상이 말하는 실패의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을 쌓으며 예열 중인 상태일 뿐이다.

이것저것 도전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맞는 궤도를 찾는 중이고,

방향을 바꾸는 사람은 오답 노트를 써 내려가는 중이다.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사람은 남들이 보지 못한 풍경이라는 자산을 쌓는 중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세상이 말하는 실패란 오직 자본의 효율성에 근거한 판정일 뿐,

우리 삶의 밀도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은 기다려주지 않지만, 삶은 숙성될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실패는 단 하나다.

모든 시도를 멈추고, 다시는 시작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

더 이상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고,

어떤 각도도 수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정지 상태.

그것만이 진짜 실패다.

지독한 완벽주의에 빠져 준비가 안 됐다며 발을 떼지 않는 것도,

실은 실패할 기회조차 스스로 박탈하는 은밀한 포기일지 모른다.


넘어지는 건 실패가 아니다.

넘어진 자리에 영원히 누워 있기로 결정하는 순간에만 실패는 비로소 완성된다.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가장 큰 적이 비교라고 했다.

이건 고작 옆집 사람과 비교하던 시대의 경고다.

지금 우리는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의 천재들과 나를 실시간으로 대조한다.

세상이 설계한 그 가혹한 비교의 잣대로 실패를 정의하기 시작하면,

우리 중 대부분은 태어날 때부터 패배자로 확정된다.

그 따위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내 궤적의 완성본을 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속도가 아닌 방향


빠르게 점화되는 엔진이 있고, 오래 예열해야 하는 엔진이 있다.

전자가 우월한 게 아니다. 용도가 다른 것이다.

단거리용 엔진에게 왜 장거리를 못 버티냐고 묻는 것만큼,

장거리용 엔진에게 왜 처음부터 빠르지 않냐고 묻는 것도 잘못된 질문이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목적지까지 택시를 타고 최단 거리로 도착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목적지를 향해 느릿하게 걸어가며

길가의 풍경을 눈에 담고, 낯선 골목의 공기를 기록한다.

누군가 직선으로 간 길을 나는 돌아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돌아간 길에서 마주친 것들,

길을 잃었던 경험조차 그 어떤 것도 버릴 것이 없었다.

속도는 결과를 결정하지 않는다. 방향이 결정한다.

그리고 그 방향을 찾는 데 걸리는 시간,

즉 각자가 갖고 있는 예열 시간은 사람마다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예열 중


몸이 멈춰 있다고 해서 생각도 멈추는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내면에서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정리되고, 소화되고, 다음을 준비하는 중이다.

씨앗이 흙 속에서 죽은 듯 고요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그 기다림을 낭비라고 부르는 것은

씨앗이 싹을 틔우기 전의 시간을 실패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다만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는 중요하다.

멈춰 있는 시간은 단순히 숨을 고르는 태만이 아니라,

내면을 단단하게 구축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비교에 자신을 갉아먹는 시간이 아니라,

내 조준점의 각도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더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시간.

다음 발걸음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속도보다 안에서 차오르는 밀도가 중요하다.


멈춰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되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지를 선택해야한다.




지금 나는 느린 것인가, 멈춘 것인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순풍도 없다.

얼마나 빠른 지는 중요하지 않다.

계속 시작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한 번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

한 방향이 아니라고 느껴서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

느리더라도 어제와 다른 각도로 서 있는 것.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실패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만의 속도는 죄악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사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당신은 지금 느린 것인가, 멈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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