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남미로
#1
우리는 출신 학교와 수능 성적표, 거주지, 먹는 것, 입는 옷, 하는 일, 그리고 누구를 만나며 하루를 보내는지에 따라 철저히 분리된다. 난 항상 이 증명의 굴레에서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내고 싶었고, 언제나 조급한 마음이었다. 황금 백수 시기는 그 증명의 굴레에서 일종의 면죄부였다. 임용 합격은 지난날 나의 노력과 성실함의 증거가 되었다. 교원자격증과 임용 합격자 증명원. 그 두 장의 종이로 서울 전역 교감선생님들에게 시간강사와 기간제 교사로 일해 달라는 러브콜을 받던 때가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기간제 교사를 시작했는데 예상보다 교직 생활의 강도가 높았다. 4시 40분에 퇴근할지라도 매일 아이들에게 에너지를 주고 나면, 겨우 저녁을 차려먹고 설거지도 못한 채 병든 병아리처럼 잠들기 일쑤였다. 행정 업무의 양도 너무 많아서 퇴근할 땐 머리가 뜨거운 날들이 이어졌다. 계약 기간보다 더 일해줄 수 있냐는 학교 측에게 별달리 거절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던 나는,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고 얘기했다. 학교를 뜨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충동적인 발권이었다. 그렇게 엉겁결에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세련됨과 여유로움이 가득한 샌프란시스코. 그곳은 정말 도회적이면서 아름답게 정돈되어있었다. 한 달 정도 그곳에 머물며, 오래전 미국으로 이민 간 큰엄마가 샌프란을 ‘지루한 천국’이라고 표현한 것이 납득되었다. 난 정제된 아름다움보다 날것의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바다코끼리와 함께하는 잔잔한 파도가 아닌, 솜털까지 날려버릴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고 싶었다. 문득 남미가 생각났지만 근육질이 되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는 엄마의 말을 꺾지 못했다. 대신 제주도가 생각났다. 제주도에서 기간제 교사로 돈 벌며 여행할 생각에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와 애월로 향했다.
한강의 ‘검은 사슴’이라는 작품도 내가 제주로 향하는 데 한몫했다. 강원도의 쇠락한 탄광 마을이 배경인 소설을 읽으며, 태곳적 순간을 상상했다. 밤에는 한 줌의 빛도 없는 순수한 어둠의 세상. 건물 따위는 없었을 낮은 세상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 영겁의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을 파도 소리.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자연에게 삼켜지고 싶었다. 손에 땀이 나면서도 마음이 편해지는 상상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아득했지만, 제주도에 간다면 손에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제주에서의 일상 역시 서울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학교 화장실 창문으로 엽서 크기만 한 푸른 바다가 보이는 점과, 퇴근 후 곧바로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직장 내 성희롱을 맞닥뜨렸다. 어느 금요일 저녁 교무부장을 포함한 40대 교사 3명과 번개로 회식을 가졌는데, 그곳에서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울 말들을 듣고 추행을 당했다. 그 후 며칠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처음 정신건강의학과에 가게 되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수면제와 안정제를 먹으며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는데, 약을 먹은 후 말 그대로 식욕이 사라져서 몇 날 며칠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 가장 큰 힘듦은 수척해진 얼굴이나 불규칙한 수면이 아닌, 마음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기분 나빴으면 회식 자리에서 얘기했어야 한다며, 본인들의 잘못은 없고 내 책임으로 돌리는 가해자들.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성추행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경찰관. 아무것도 모른 채 담임선생님이 오지 않아 당황했을 2학년 아이들. 가해자들에게는 너무 화가 났고, 경찰관에게는 지쳤으며, 아이들에게는 미안했다. 행복을 찾아 떠났는데 결국 이런 상황을 맞이한 내 처지가 서럽고, 고향에서 엄마 밥 먹으며 마음 편히 있을걸 하는 후회도 몰려왔다. 그렇게 마음의 고통이 계속 커지던 중 주변 사람들의 조언으로 해바라기 센터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지원해주는 심리 상담을 받았다. 약 3개월 정도의 심리 상담이었는데 그 과정을 통해 내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상담을 할수록 난 항상 현재에 만족하지 못함이 드러났다. 증명의 굴레 속에서 현재에 집중하기보다, 미래의 성취에만 관심을 두었다. 나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좋은 수능 성적, 대학 졸업장, 임용 합격을 꿈꿔왔다. 그리고 교사가 된 후에는 5년 이상의 경력이 필요한 대학원 파견과 유학휴직에만 온 정신이 쏠렸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없었다. 그러나 현재감 없는 삶은 너무나 허무하고 공허했다. 대학 입학과 임용 합격 등의 노력이 모두 어느 순간 당연한 것처럼 다가왔고, 항상 현재의 나를 계속해서 채찍질했다.
내 얘기를 쭉 듣던 상담사는 현재감을 강조했다. 현재감이란 현재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현재 행복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난 지금껏 너무나 목표지향적으로 살아왔다고. 현재 내가 살아있는 것을 느낄 틈도 없이 지내다 보니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도 서툴다고. 지금부터는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행복함을 느끼며 살아보자 하셨다.
상담이 끝나갈 때쯤 별이 보고 싶어졌다. 처음 가졌던 제주의 자연에 대한 동경은 흐려졌지만, 막연히 별을 보고 싶었다. 우리나라의 최남단인 마라도가 별을 보기 좋을 것이라는 생각 들었다. 애월에서 마라도까지 버스와 배로 가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곽지 해수욕장에서 202번 버스를 타고 한참 동안 모슬포항으로 향했다.
시내를 지나 어느 마을을 지날 때였다. 난 창가에 앉아있었는데, 보라색 커튼 사이로 가을 오후의 따뜻한 햇빛이 얼굴을 비췄다. 그때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버스에 탔는데, 그 웃음소리와 햇빛이 너무나 예쁘고 어울려서, 버스 안에 봄이 활짝 핀 것 같았다. 내 마음 속에도 꽃이 피고, 따뜻해졌다. 그리고 그때 이 느낌이 현재감이구나 싶었다. 마라도에 가서 내가 바라던 별이 무수한 하늘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곳으로 가는 길에 이 느낌을 받고 만족하는 것. 살면서 이 현재감이 꼭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버스에서 내려 모슬포항까지 걸어갔다. 배는 모슬포항에서 출발해 약 30분 정도 지나 마라도에 도착했다. 마라도에 온 관광객들은 대부분 당일치기로 온 모양이었다. 오후 4시쯤 모슬포항으로 출발하는 마지막 배가 마라도에서 출발하자 얼마 안 되는 마라도 주민들과 나만 덩그러니 섬에 남겨졌다. 섬의 끝과 끝까지 걸어서 30분이면 충분한 그곳에는, 등대를 제외하면 높은 건물이 없어 사방이 잘 보였다. 저 멀리 제주가 육지처럼 보였다.
한밤중이 되자 마라도에서는 인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로지 검은 사위와 바람소리 그리고 습하고 쌀쌀한 공기만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뉴스에 나올법한 사건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한걸음 내딛는데,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는데 삽살개 한 마리가 있었다. 삽살개는 나를 이끌고 등대가 있는 섬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등대에서 삽살개가 멈추길래 나도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봤다. 그때 난 우주에서 너무나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온 세상의 별들이 내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별들이 그간의 힘든 과정들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무수한 모래알 같은 별들을 보며 내 존재를 덧없게 생각하지 말고, 그래도 결국 사람을 사랑하며 살자는 마음을 먹었다.
다시 애월에 돌아왔을 때 사건은 이미 법원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해바라기 센터에서 연결해준 변호사님에게 법률 지원을 받은 덕이었다. 하지만 사건이 재판으로 넘어가자, 난 하루 종일 법원 사이트에 들어가서 사건 상태를 새로고침하며 지냈다. 모든 일상생활이 사건에 점령당했다. 답답한 마음에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해보면 사건은 빨리 끝나도 반년이라며, 이 시간에 여행을 다녀오는 것은 어떻겠냐며 제안해주셨다. 그때 바로 떠오른 곳은 남미였다. 우리나라와 대척점인 곳. 내가 있는 곳에서 지구의 정반대에 가면 이 불행도 따라오지 않으리라. 남미에 대해 꿈꾸는 무언가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곳에 있는 자체만으로도 현재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서둘러 제주도의 적은 세간살이를 정리하고 고향으로 향했다. 몸이 좋아지면 남미에 가는 것을 허락하겠다던 엄마도, 나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남미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남미 여행을 위해 준비하는 매일매일이 너무나 설렜다. 사건은 잊은 채 남미 유적지에 관한 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보며 가고 싶은 곳들을 조사했다. 준비 역시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며칠 만에 볼리비아에 가기 위해 황열병 주사를 맞고, 비자 발급을 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고 남북으로 긴 대륙의 변화무쌍한 사계절 날씨를 버틸 짐 꾸러미를 꾸렸다. 마침내 12월 어느 날 나는 고향을 떠나 누나가 사는 수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새벽, 김포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