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말..
퇴임 명을 받고 나는 유유히 의연하게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측근 리더들과 대낮부터 술집으로 갔다.
다가올 거라고 예상했던지라 거의 짐을
가볍게 해 놓아서 쌀 짐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유유히 가볍게 떠났다.
후배들의 기억으로는 나는 쿨하게 떠났다고 한다.
그러려고 애썼다기보다는
그냥 그 방법밖에 몰랐던 것 같다.
임원 선배들도 다들 그렇게 떠났으니까.
한두어 달은 해방감에 좋았다.
내손으로 사직서를 쓰고 싶었던 많은 고비들을 넘기고
"짤리는 영광"을 맛봤으니 얼마나 후련하던지.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퇴임 6개월 전부터는
몸이 아팠었는데 자각을 못했었던 것 같다.
어떤 친구 말로는 자신이 퇴직을 결정했을 때
"우물을 푸면 물이 올라왔어야 했는데
흙이 올라오는 것 같다"라고 했는데
딱 내 상태가 그랬다.
아침 7시 반이면 사무실에 앉아있었던
생활을 한 지 12년째였고,
마지막 해에는 저녁 약속을 하기도
쉽지 않았고 저녁 8시면 골아떨어졌다.
그런 지난한 시절을 보내고 맞이한 퇴임이라서
처음 한두어 달은 해방감이 있었다.
책도 약간 보고, 음악도 듣고, 요가도 하면서
차가운 겨울을 보냈다.
물론 불안감이 그림자처럼 내 머리 위를
어른거린다는 걸
몸으로는 직감했지만 애써 모른 척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두어 달 이후 그동안 모른 척했던
집안의 복잡한 일들을 알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나의 시간은 빨려 들어갔다.
마치 일하느라고 애써 모른 척하면서
그냥 둘둘 말아서 억지로 구겨놓았던
장롱 속의 이불들이
장롱 문을 열자마자 우르르 쏟아졌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그냥 지나치는 게 없다.
내가 일하느라고, 그것도 열심히 일하느라고
에너지가 없어서 외면했던
복잡한 집안일들이 그냥 고스란히
한 구석에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많다는 말을 누가 했던가?
시간이 간다고 해결되다고 믿고 싶을 뿐 아닐까?
실제로 해야 할 것들은 늘 그대로 먼지가 쌓인 채로
곰팡이가 슬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세월을 산 지금도 인생살이가
어떤 것이 현명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생에서 일과 가정, 자신과 가족 등등의 균형점이란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 참 아직도 모르겠다.
그런 여러 가지 일들에 마음이 다치고 나서 보니,
몸과 마음이 모두 아프기 시작했다.
정신과도 가서 우울증 약도 받았고,
장염으로 3주일 넘게 계속 탈진이 되고,
그러다가 갑상선항진증이라는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 두서너 달은 책상에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가 바닥이 되었다.
체중은 10Kg 정도 빠지고, 팔다리가 후들거려서
지하철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조심스러웠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돌이켜 보니, 일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그 시절에 애써 모른 척했던
집안일과 나의 몸이 한 번에 숙제를 급행으로
해치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조금씩 나누어서 하겠지만,
나는 미련했었다.
다시 돌아가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미련한 나를
또 질책하는 것 같아서
시원하게 답을 못하겠다.
그러나 지금 한창 달리기 중인 사람들이시라면,
장롱 안에 애써 모른 척 한 이불도
가끔씩은 열어보았으면 한다.
아주 대단한 럭키가이가 아니라면
그거 잘 없어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무너져서 왈칵 쏟아질 때가 올 수도 있다.
한 번에 몰아서 숙제를 해치우는 것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많이 곪아있기 십상이다.
묵혀둔 것일수록 도려내야 하는 것들이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