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어와 모국어가 다른 자의 분열과 고통, 서경식《디아스포라 기행》
《디아스포라 기행》은 세 번째 읽는 서경식 책이다. 90년대 출간된 《나의 서양미술 순례》이 서경식과 첫번째 만남이었다. 두 번째로 서경식의 책을 만난 것은 일본어 공부 교재로 사용한 《子どもの淚(한국어 출간 제목 : 소년의 눈물)》이란 원서였다. 빼어난 일본어 표현 문장이라는 평을 받으며 일본 에세이스트 상을 받은 《子どもの淚》은 저자가 어린 시절 읽었던 책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책을 통해 어린 시절 풍경을 그리고 있다. 조선인으로서의 차별로 인해 받은 상처에 대한 이야기 대목에서 마음이 짠해진 기억도 있다.
디아스포라란 말은 ‘이산(離散_가족이나 단체의 구성원이 헤어져 흩어짐)’을 뜻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로, 오늘날에는 다양하게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쓰인다. 《디아스포라 기행》 에서는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로 ‘디아스포라’를 사용하는데, 현재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대략 6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고국에서 살지 못하고 떠돌며 살아가고 있다.
디아스포라에게 ‘자기 정체성’이란 문제는 고통스럽게 삶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재일한국인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가 모국어이지만, 그들의 피는 한국인이며 한국 국적을 지녔다. 일본 쪽에서 보면 재일한국인은 일본어라는 같은 모어를 지닌 소수 마이너리티이고, 한국 쪽에서 보면 재일한국인은 같은 민족인데 말이 통하지 않는, 즉 모어가 다른 사람이다.
이런 분열되고 혼란된 상황은 식민지 피지배자인 조선의 후손이면서 구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에서 태어났기에 벌어진 일이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공무원이 될 수 없고, 연금 혜택이나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재일조선인은 그 자체로 일본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이며, 그 차별은 아주 은밀하게 삶 전체 곳곳에서 이루어진다. 디아스포라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운명에 저항하는 운명의 아이러니를 짊어진 존재들이며, 영원한 이방인이다.
《디아스포라 기행》은 재일조선인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서경식이 윤이상, 자리나 빔지, 팰릭스 누스바움, 슈테판 츠바이크, 파울첼란 등 자신과 같은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간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고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삶의 폭력이 어둡고 깊은 언어를 통해 이야기된다.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의 가족사는 한반도 분단 상황으로 인한 고통의 역사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그의 형 서승과 서준식은 조국의 말을 배우고 역사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서 건너와 모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국가기관이 조작한 간첩사건으로 체포되어 오랜 세월 수형생활을 했다. 군사독재 시절 두 형은 감옥에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시도까지 했고, 서승 씨는 그로 인해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화상으로 얽어진 서승의 얼굴은 우리 현대사의 참담함을 보여준다.
“감옥 안은 정적에 싸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조용함과는 다르다. 수감자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기운이 바싹바싹 느껴진다. 조용하긴 한데 바로 다음 순간 절규가 공기를 찢을 것만 같아 몸을 사리게 되는, 긴장을 품은 정적이다. 또 감옥에는 독특한 냄새가 난다. 어떤 냄새인지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씻어도 지워지지 않고 벽과 옷에 스며버린 냄새, 한마디로 폭력의 냄새. 그것도 충동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장기적인 폭력의 냄새다.”
디아스포라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처참하고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보는 이의 심장을 아프게 하는 팰릭스 누스바움의 작품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누스바움은 나치 치하에서 브뤼셀에 망명했다. 브뤼셀의 은신처에서 누스바움은 누구에게도 보일 희망 없는 그림을 그렸는데, 숨어 살던 중 이웃의 밀고로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 밤거리에서 한 남자가 자기를 부르는 관헌을 돌아보는 순간을 그린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과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보여주는 〈두 사람의 유대인〉은 누스바움이 공포 속에서 나치의 폭력을 증언하는 작품이다. 모든 것을 빼앗긴 자가 절망 앞에서 자신이 인간적으로 존엄하다는 것을 외치는 그림이다.
‘디아스포라 기행’은 서경식 자신의 내면의 고통과 만나는 시간이다.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독일에서 죽어간 윤이상, ‘후지노 노부루’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재일한국인 미술가 문승근 등은 모두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자신의 터전을 잃고 고통받아야 했던 디아스포라, 바로 서경식 자신의 모습이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며 생각한다. 고통 속에서 건져낸 통찰과 깊이 있는 글이 담긴《디아스포라 기행》은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속의 붕어가 살아가기 위해 의지하는 마지막 물방울일지도 모른다.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는 고야의 그림 〈모래에 묻히는 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절체절명의 나락으로 빠진 듯한 개를 그린 이 그림의 설명 뒤에 서경식은 이런 말을 덧붙인다.
“이 개는 고야 자신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이 개는 나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절망의 토로는 《디아스포라 기행》에서도 이어진다. 그 깊은 절망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아프게 울렸다. 책의 첫 장 타이틀이 ‘죽음을 생각하는 날’이다. 인간답게 살 수 없다면, 매일 내 존재가 존중받지 못한다면, 차별과 보이지 않는 폭력이 은밀히 계속된다면 내가 살아있는 날은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날이다. 서경식은 2023년 일본의 한 온천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어둡지만 깊고 지적이면서 섬세한 그의 글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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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강과 호수에 있던 우리들의 조상은, 식민지 지배라는 홍수의 시대에 일본이라고 하는 수레바퀴 흐름 속으로 끌려들어 간 것이다. 큰 물이 빠진 후 강호로부터 떨어져 나온 수레바퀴 자국 웅덩이 속에 우리들은 남았다. 지글지글 물은 말라간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붕어가 산소 부족에 허덕이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미는 것과 같다._ 프롤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