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브닉의 검은 문어(2007)

by 율리

두브로브닉의 검은 문어

한 시간만 있으면 퇴근이다. 오늘 할 일을 다 해서 심심하다. 어제 비가 왔다. 하루종일. 그런데 아침에 우산을 안 챙겨 와서 저녁에 난감했다. 마사지도 받으러 가야 하는데.. 다행히 피부관리실 앞까지 동료과장님이 태워주시고 돌아올 때는 관리실 언니가 우산을 빌려주었다. 언니가 눈썹도 밀어주고 굳은 목도, 어깨도 풀어줬다. 빌린 우산을 쓰고 집에 돌아오며 행복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나를 돌보시는 것이 느껴졌다. 받는다는 게 참 좋구나 싶었다.

엄마가 챙겨줬던 매실액을 처음 꺼내 먹으며 감사했다. 엄마가 계시고 매실액을 담그는 엄마여서 감사하다. 아픈 배가 가라앉을 것 같다. 아픈 게 친밀하게 느껴진다. 친구가 생긴 거 같다. 꼬록꼬록 말을 건다. 혼자 누운 방인데 혼자 같지 않다. 풍요롭다. 속삭인다. 하나님 참 좋아요. 긴 시간 중 아주 작은 순간이지만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생각 못했는데요 뭔가를 소유해서 감사하고 기쁘고 안심이다가도 쉽게 잊나 봐요. 없는걸 더 바라게 되고 부족해하네요.

다음 주엔 조개를 잡으러 간다. 서해안 갯벌로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간다. 가족이라 신나지만 조개 잡는 것 자체에 눈이 반짝거린다. 꿈을 꾸었다. 방안 가득 물이 밀려들어온다. 책상 위에 올라가 투명한 물을 들여다본다. 조개를 잡으러 물에 풍덩 빠진다. 손을 뻗는다. 조개 잡는 꿈을 꾸면 기분이 좋았다.


두브로브닉 요새는 거대한 검은 문어가 떠받히고 있을 거 같다. 긴 잠을 깨고 문어가 꿈틀거리면 성안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바다로 난 성벽 구멍으로 푸른 물속 검은 그림자를 응시한다. 창끝은 날카롭고 그들은 멈춰서 있다. 검은 문어가 뭍위로 올라오지도 않을 텐데.. 한 번도 도시를 휘감아 쓸어버린 적이 없는데도 검은 문어가 바닷속을 유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안 사람들의 일상은 멈춰버린다.
바닷물이 한없이 맑고 바다바닥은 하얀 석회석이라 검은 문어는 숨을 곳이 없다. 그가 지나는 곳은 어둔 그림자가 진다. 가만히도 있어보고 원을 그려 글씨도 써보지만 아무도 보는 이 없다. 어둔 동굴 속에 들어앉으면 밤도 낮도 없고 잠들거나 깨어있는 시간만 오르락 내린다. 붉은 지붕이 보인다. 붉다. 하얀 집들이 보인다. 수면 위로 너울거리는 붉고 흰 것들이 춤을 추며 알아듯지 못할 언어로 글씨를 쓴다. 어지럽다. 꼬르륵 가라앉아본다. 물결 소리 없는 바닥까지 무겁게 내려앉는다. 둔 직한 물기둥이 밀려온다. 눈을 감는다.

나는 내가 겨드랑이가 아가미인 물속사람이면 좋겠다. 검은 문어의 감기는 눈을 빤히 쳐다보고 싶다.

열매 따고 조개 잡는 것에 열띤 기쁨을 느끼는데 내가 성취주의자라고 해도 따지지 말아야겠다. 복잡한걸 모두 빼고 내가 느끼는 저녁놀 같이 번져오는 충만함. 밤샘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며 걷던 다리길 새벽내음, 개울물 수풀에 손을 넣어 잡은 보리새우의 까슬함, 보드라운 흙놀이에 나타난 눈먼 땅강아지의 촉촉함. 내 모든 감각이 고루 행복해하던 나의 유년시절. 이것이 어찌 관계에서만 오는 충만이겠는가. 나에게 남은 건 퇴근 후 따뜻한 물로 샤워하기, 새로 빤 이불속에서 잠자기.. 빈곤하다.

꽃을 만지기로 한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내 눈과 코와 손끝에 가득한 만족함.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과 주신 감각을 가난하게 하는 것이 따로 가야 하는 게 아닌데. 내가 포기한 거겠지. 남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 하여 내가 한 모든 게 의로울 수 있길 바라는. 꽃 배우는 일도 이건 다른 사람한테 선물할 수 있으니 사치가 아니야 하며 핑계를 달아야 하지 않았던가.

나는 사람들과 살며 내 이웃을 사랑하는 내 비전대로 살 것이다. 그러나 유익한, 모두에게 풍성한 사람이 되고픈 욕심에 내 삶을 빈곤하게 방치해두지 말자. 동화 쓰기로 아이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면 어떠랴. 내가 잠시 멈춰 서서 생각나는 대로 감각의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검은 문어 들여다보기 겨드랑이로 숨 쉬는 게 닫힌 문안에 잠 못 드는 것보다 행복하다.

2007.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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